< 282화 > 거지 (5)
“거지가 아니긴 뭐가 아냐! 당장 꺼져! 누구 굶겨 죽일 일 있어?! 가게 뒤에 음식물 쓰레기 버려둘테니까 그거나 먹으러 가!”
“거지 아니라고!”
세수도 하고 머리도 감았는데 대체 왜 나를 거지 취급하는 걸까.
제대로 씻었으니 냄새는 안 날텐데.
머리를 제대로 안 말리고 잔 탓에 머리모양이 이상해져서 그런가?
“빗자루 흔들지 마! 먼지 묻어! 이거 이제 구하지도 못하는 옷이야!”
“거지같은 옷 자랑하지 말고 저리 가! 가!”
“거...거지같은…?! 이...간다 가!”
나는 거지로 오해받는 억울함을 애써 삼키며 식당에서 멀어졌다.
그래도 에스더가 마법소녀일때는 나름 팬들중에서도 선택된 사람만 입을 수 있는 옷이었는데...거지같은 옷이라니.
에스더한테 일러줄테다.
이 식당은 음식에서 촉수 음액이 나오는 형벌을 받게 될 것이다.
나는 언젠가 오늘날을 크게 후회할 식당을 뒤로하고 다시 회사 앞으로 향했다.
내 생각대로, 점심시간이 된 회사 앞에는 눈에 익숙한 얼굴을 한 사람들이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개발이 아닌 인사과와 영업 쪽의 사람들...나와는 다른 개발팀에서 일하던 사람들도 하나둘씩 보인다.
그레이프의 연락처를 가지고 있는 건 그레이프와 같은 개발팀의 사람들 뿐이다.
나는 나와 같은 개발팀에서 일하던 사람이 보이면 말을 걸 생각으로 회사 입구 근처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자 회사 사람들은 한명씩 나를 보고 수근거리며 지나갔다.
“뭐야...거지? 낮에?”
“거지가 몸이 왜 저렇게 좋아보여…?”
“대낮에 구걸이라도 하나? 뭐, 먹을거 달라는 거야?”
“편하게 산다 정말….”
이 자식들이…얼마전까지 같은 회사 사람이었던 사람을 거지 취급하다니….
다들 초점이 나가있어서 그런지 보는 눈이 없는 것 같다.
아니면 기억력이 원숭이 수준이던가...분명 머리나 눈, 둘 중 한 쪽에 문제가 있는게 틀림없다.
“그건 그렇고 개발 1팀 팀장님...슬슬 돌아가는건가?”
“으아, 왜 파견이냐고...출근길에 마주칠 때마다 보기만 해도 치유받았는데.”
“법률상담 앱 제작인지 뭔지 더 오래하면 안되나….”
“기간 넘기면 위약금 있을 걸.”
나를 못 알아보고 지나간 회사 직원들은 끼리끼리 뭉쳐 잡담을 하며 걸어갔다.
개발 1팀이면...내가 있던 팀이다.
팀장은 그레이프였으니 사람들이 지금 하고 있는 건 그레이프에 대한 얘기였다.
오늘도 이 회사 사람들은 그레이프 얘기를 하고 돌아다니고 있다.
퇴사를 해도 정말 변함이 없는 회사다.
뭐, A시 전체를 통틀어봐도 보기 힘든 미녀가 같은 회사의 팀장이니 관심이 많이 가긴 하겠지….
“근데 요즘 회사 자주 안 오시지 않아?”
“아, 그거? 개발팀하고 사이 안 좋아져서 그런 거 같다던데?”
“그거 혹시 그 예전에 있던 개발자 얘기? 그 엄청 음침한?”
“걔 퇴사한게 팀에서 자꾸 괴롭혀서 팀장이 감싸주니까 질투하고 더 괴롭혀서 퇴사한 거래잖아.”
“...그 팀장이 감싸줄 정도면 질투할만 한 거 아닌가? 나같아도 좀 열받을 것 같은데.”
나는 그레이프와 내 얘기를 하고 있는 회사 사람들의 대화를 엿들으며 어이가 없어 웃었다.
아무리 그레이프가 예쁘다 해도 그레이프랑 좀 친하다는 이유로 괴롭힘당하는 걸 그럴수도 있다고 말하다니.
이런 그레이프 미치광이들만 있는 회사, 퇴사하길 잘했다.
“너 그 얘기 들었어? 그레이프 팀장 남자 생긴 거 같다던데?”
“남자…? 근데 그거 그냥 소문이잖아. 뭐, 요즘 예민해진 팀장이 가끔 온순해지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는….”
“아니, 확실하다니까? 요즘 휴가 자꾸 가는 것도 남자 생겨서 같이 놀러 가려고….”
“...그냥 이제 파견 끝날 때 가까워져서 안 썼던 휴가 전부 쓰는 거 아냐?”
“진짜 남자친구 생긴걸까…선임비서님 절대 남자 안 사귀실 줄 알았는데.”
“전에 다른 사업체 젊은 대표가 그레이프 팀장 복도에서 마주치자마자 갑자기 꼬셨던 거 기억나? 그거 남들 다 보는 앞에서 차는 거 보고 난 레즈비언이신 줄 알았어.”
“그사람, 진짜 잘생겼었는데...돈도 많고 젊고 잘생기고….”
회사에서 나오는 직원들은 부서에 관계없이 다들 그레이프의 얘기를 하고 있었다.
회사 사람들은 다들 그레이프에게 관심이 가득했으니 서로 뭉치기에 이렇게 좋은 주제도 없기는 하지만, 정말 영양가 없는 대화다.
여자 직원들도 전부 있는지 없는지 모를 그레이프의 남자친구 얘기로 열을 올리며 지나가고 있다.
“남자 생긴건 확실하지?”
“핸드폰을 손에서 놓질 않잖아? 이런데 남자가 없다는 건 말이 안 되는 거거든?”
“진짜, 여자면 무조건 알잖아~그거 남자야 남자...하, 어떤 남자랑 연애하시는걸까...엄청 잘생기고 잘난 사람이겠지?”
“어차피 우리가 이렇게 얘기해봤자 비서님 남자친구가 엄청 잘생기고 키도 크고 돈도 많을 거라는 건 확정이지.”
“하긴…눈 엄청 높잖아. 찬 남자가 한둘이 아니던데.”
“전에 누가 편의점에서 콘돔 집어드는 거 봤다고 하지 않았어? 라지사이즈?”
“와...그것도 큰가봐….”
왜 이렇게 다른사람 사생활에 관심이 많은걸까...심지어 성생활까지...성희롱이다 성희롱.
그레이프가 법률 관련된 회사에서 파견왔다는 사실을 잊고있는건가?
고소나 당했으면 좋겠다.
“근데 요즘 그거때문에 그쪽 팀 과장이랑 부장이 엄청 찝쩍거린다고 소문 많던데.”
“아~그거? 뭐, 골키퍼 없으면 골 안들어가냐고 하는거?”
“골키퍼가 초보일 때 빨리 뚫어야 한대잖아. 자기들은 경험이 많다면서.”
“경험이 많은게 아니라 늙어서 상해가는 거 아냐...?”
“잘생기고 크고 돈많은 남자인 거 확실한데...무슨 자신감이래…?”
그레이프도 참 피곤하겠다.
나는 사람들의 얘기를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려보내며 나와 같은 팀이었던 사람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다 눈에 익은 사람을 발견한 나는 곧바로 걸음을 옮겼다.
“저기.”
“힉?! 드릴 돈 없어요!”
“아니, 씨...잠깐만.”
“방위군 부를 거에요!”
개발팀 안에서 디자인 관련 업무를 담당하던 여직원에게 다가간 나는 재빠르게 도망치려는 여직원의 앞을 막아섰다.
그러자 여직원은 기겁하며 핸드백에서 비전폰을 꺼내들었다.
나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몰리는 걸 느끼고 인상을 쓰며 말했다.
“저기요, 같이 일했던 사람도 못 알아 봅니까?”
“그, 그쪽이랑 일한 적 없어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아니 진짜...이보세요!”
“히이이익!”
나는 여직원의 비명소리와 함께 시야 구석에서 날아오는 걸 아슬아슬하게 손으로 잡았다.
다짜고짜 핸드백에 얼굴을 얻어맞을 뻔 했다.
말을 건 사람을 때리려 하다니...어떻게 이런
“무, 무슨짓이야! 그 손 안 놔!”
“야, 야, 신고해...신고!”
“...어이가 없네.”
먼저 공격해온 상대의 핸드백을 잡았을 뿐인데, 주변의 남자 직원들이 나를 경계하고 주변에서 던질 것과 찌를 것을 찾아 들기 시작했다.
나는 억울함과 짜증을 동시에 느끼며 여직원을 노려봤다.
어떻게 퇴사하고 한 분기도 안 지난 사람의 얼굴을 못 알아 볼 수가 있지?
“거지가 난동 부린다고 신고해...이거 마약한 거 아냐?”
“점심부터 재수없게….”
“자...그쪽 뒤쪽에 통로 건너 자리, 출구에서 가장 가까운 자리에 누가 있었죠? 세 칸 옆이니까 한번 잘 생각해 볼까요?”
나는 시끄럽게 떠드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화를 억누르며 여직원을 천천히 설득했다.
그러자 여직원은 부들부들 떨며 눈을 깜빡이더니 갑자기 인상을 썼다.
그대로 가만히 내 얼굴을 바라보던 여직원은 깜짝 놀라며 날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설마...앵거 씨?! 이 거지가?!”
“뭐라고요?”
“아, 아뇨...아닙니...아니, 마, 맞으...세요? 다른 사람인데…?”
“다르긴 뭐가….”
뭐가 다르냐고 물어보려던 나는 내가 많이 달라지긴 했다는 생각에 말을 멈췄다.
눈 빛에 움푹 패여있던 것도 사라졌고, 몸도 몇 배는 좋아졌고, 키도 조금...보이진 않을테지만 자지도 커졌다.
확실히, 퇴사하기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완전히 다른사람이나 다름 없다.
“뭐야? 아는 사이야…?”
“앵거면 그 사람 아냐? 그레이프 팀장이 감싸고 다녔다는…?”
“음침하고 비실비실한 사람 아니었어…? 몸이 무슨...아니, 좀 괜찮게 생겼는데?”
“근데 퇴사한 사람이 무슨 일이래?”
회사 사람들은 웅성거리며 나와 여직원 주변에 원형으로 진을 쳤다.
재미있는 오락거리라도 발견한듯한 반응이 불쾌하다.
여직원은 나를 위아래로 천천히 살펴본 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몸도 그렇고...얼굴도...그냥, 완전히 다른 사람인데….”
“...좀 달라지긴 했죠.”
“아니...근데...퇴사하고 거지가 된 거에요? 구걸이라도 하러 왔어요?”
나는 도를 넘어선 발언에 조용히 여직원을 노려봤다.
예전에는 이런 말을 들으면 그냥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돌리고 아무것도 못 들은 척 했지만, 지금의 나는 다르다.
그러자 여직원은 자신이 말실수를 했다고 생각했는지 겁 먹은 모습으로 고개를 떨어뜨리며 사과했다.
“죄...죄송해요...너무 거지같아서…아니, 거지같이...아니….”
“후우우우….”
“근데 복직하겠냐고 물어볼때도 안 온다고 해놓고...왜 온 거에요? 진짜 뭐 망해서 구걸하러 온 거 아니에요…?”
대체 왜 이 회사 사람들은 나를 욕하지 못해서 안달이 난 걸까.
나는 끓어오르듯 치솟는 화를 가라앉히기 위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퇴사하길 잘했다.
“뭐야...앵거? 그 퇴사한…? 그레이프 팀장이 그렇게 감싸줬다는?”
“아, 저게? 퇴사하고 거지 됐나봐?”
“진짜 웃기네...여긴 왜 온거야? 뭐, 저 여직원 스토커야…?”
이 기분은 대체 뭘까....
주변에서 이상한 소리를 떠드는 놈들을 전부 쥐어패주고 싶다.
어쩐지 나에 대한 이유모를 적대감이 전보다 더 심해진 것 같다.
나는 이런 곳에서 더 얘기하고 있다가는 주먹을 휘두르는 걸 참지 못할 것 같다고 생각하며 여직원에게 본론부터 꺼냈다.
“그레이프 오늘 출근 했어요?”
“예?”
“아직인가? 오늘 그레이프 출근 해요?”
“...팀장님한테 왜 반말하세요?”
그런데, 여직원은 내 대답에 대답해 주기는 커녕 이상한 걸 따져 물었다.
내가 그레이프한테 반말하든 말든 대체 무슨 상관이지.
나는 순순히 내가 원하는 대답을 하지 않는 여직원의 모습에 짜증스러워하며 다시 한 번 질문했다.
“그레이프 오늘 출근 하냐니까….”
“팀장님한테 왜 반말하시냐고요.”
“아니...퇴사했는데 반말하든 말든 제 자유지 무슨 상관이시죠?”
“아무리 그래도 팀장님이신데 그건 아니지 않나요?”
무슨 소리지 이게…?
아주 잠시도 정신을 놓은 적이 없는데, 왜 대화 내용이 내 뇌를 파괴시키고 있는건지 모르겠다.
나는 자꾸 이상한 소리를 하려 하는 여직원을 무시하며 똑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아니고 말고 그건 그쪽이 상관할 게 아니고...그레이프 오늘 출근….”
“그건 왜 자꾸 물어보시죠?”
“아니...하…아니다, 그냥 가세요....”
나는 대답해줄 생각이 없어 보이는 여직원을 그냥 보내야겠다고 생각하며 손을 휘저었다.
퇴사하고 그레이프랑 매일 섹스하다보니 어느새 잊어버리고 있었지만, 이 회사에는 원래 이런 사람들 뿐이었다.
그레이프랑 관련된 얘기면 과도하게 예민해져서 쓸데없고 이상한 신경전을 해대는 정신병자들...나는 괜히 말을 건 걸 후회하며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냥 직원이 나왔을 때 조용히 뒤를 밟아서 기절시키고 비전폰을 잠시 빌려서 사용할 걸 그랬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눈앞의 여직원을 보내고, 주변에 멈춰서서 나와 여직원을 보고 있는 다른 사람들을 해산시킨 뒤 미행하면 된다.
“퇴사한 사람이 갑자기 회사에 찾아와서 왜 팀장님이 출근하는지 안 하는지를 물어보냐고요.”
“물어봐야 되니까 물어보겠죠, 가세요.”
“아니...하, 지금 팀장님 스토킹하는거에요 지금?”
“예?”
왜 얘기가 그렇게 되는거지…?
나는 어이가 없어도 너무 없는 발언에, 초점이 나가있는 여직원의 눈을 보며 이상한 생각을 했다.
...내 말을 이상하게 비꼬는 최면이라도 걸려있나?
“뭐야? 스토킹이래?”
“그레이프 팀장 스토커래.”
“무슨 상황이야?”
“신고해야 되는 거 아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