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1화 > 거지 (4)
당연하게도 전혀 헤메지 않고 빠르게 회사 앞에 도착한 나는 닫혀있는 출입문에 손을 가져다 댔다.
하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나는 뒤늦게 내가 비전폰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회사 빌딩을 출입하려면 비전폰에 등록되어있는 ID가 필요하다.
퇴사한 직원이어도 ID등록 해제는 분기별로 하는걸로 알고 있다.
아직 해제되지 않았을 테니 비전폰만 있으면 들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비전폰이 없으니 당연히 들어갈 수 없다.
“어떡하지….”
그러고보니 그냥 비전폰만 가지고 있으면 당연하게 오갈 수 있어 깜빡하고 있었지만,
ID가 없으면 엘리베이터도 탈 수 없다.
어떡하면 좋을까….
잠시 고민한 나는 좋은 생각을 하나 떠올렸다.
점심시간이 되면 사람들이 회사에서 나온다.
그레이프도 점심 후에 A시에 돌아온다고 했으니, 출근하면 그때쯤 회사로 올 것이다.
만약 안 온다면 점심에 나오는 사람을 붙잡아서 그레이프한테 연락좀 해달라고 하면 된다.
답을 내린 나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점심이 되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꽤 남아있다.
그동안 회사 앞에 서서 기다릴 수는 없으니, 근처에 적당히 앉을만한 곳이라도 찾아 앉아있을 생각이었다.
나는 점심시간까지 앉아있을 생각으로 가까운 카페로 걸어갔다.
그레이프가 심부름을 시키면 자주 가고는 했던 곳이다.
그리고 잠시 후, 카페에서 쫓겨났다.
“사람을 가려 받다니...후회할겁니다.”
“커피 주문을 하고 앉아있으라고 했을 뿐입니다.”
“점심시간 지나면 주문한다고 했잖아요.”
“나가세요.”
“내가 여기 커피를 얼마나 많이 사 줬는데…!”
정확하게는 그레이프의 카드로 내가 산 거였지만, 나름 이 카페에 자주 들르는 단골이었던 나는 커피를 사지 않고 앉아있으려 했다는 이유로 쫓겨나는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단골손님 대우를 이렇게 하다니, 이런 형편없는 아르바이트생을 고용한 점장의 수준이 의심스럽다.
카페에서 나온 나는 또다시 걸음을 옮겨 가까운 공원에 도착했다.
“제길….”
공원에 오는 길에 다른 카페도 들려봤지만, 그곳에서는 나를 상태 좋은 옷을 운 좋게 주워 입은 거지 취급했다.
가방 좀 큰 거 메고 있다고, 냄새 좀 난다고, 머리 좀 떡졌다고 이런 취급을 하다니.
그레이프한테 맛없고 서비스 안 좋은 카페라고 주변에 소문내 달라고 부탁해야겠다.
나는 벤치에 가방을 올려놓은 뒤 주변을 둘러봤다.
작은 공원 안에는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몇몇인가 보였다.
나보다 훨씬 지저분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각자 커다란 가방을 바로 옆에 두고 대낮부터 나무 그늘 밑에 누워 낮잠을 자고 있다.
집도 없고 돈 벌 능력도 없는데 안전하다는 이유로 다짜고짜 A시에 찾아온 거지들이다.
회사 구역에는 편의점도 많고 식당가도 많은 만큼 폐기되는 음식도 많다.
그 탓인지 이 구역 주변에서 거지들은 아무리 없애도 사라지지 않았고, 공원에는 시간을 흘러가는대로 흘려보내는 거지들이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거지가 많은 건 또 아니었다.
거지들은 CCTV와 순찰 드론에 의해 발견된 즉시 방위군에 체포 후 원래 살던 곳으로 돌려보내지게 되어있다.
때문에 근처에 수상한 사람이 나타나면 그 즉시 가방을 메고 도망치거나, 어딘가 보이지 않는 곳으로 숨어버린다.
그렇게 사라진 거지들은 CCTV로부터 좀 더 잘 숨을 수 있는 밤에만 골목 사이사이를 통해 이동하며 식사를 해결하고는 한다...고 마진사에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나는 벤치에 앉아서 소문은 들어봤지만 처음 보는 거지들을 보며 신기해하고 있었다.
이 공원에서 거지가 머문다는 소문은 들어봤지만, 정말로 이렇게 있는 걸 보는 건 처음이다.
정말로 거지가 있는 공원이었구나.
공원 안에 있는 거지들의 수는 총 7명, 몇몇은 공원 중앙의 식수대에 대고 찌그러진 금속 그릇을 설거지하고, 세수하고 있었다.
거지들은 순서대로 물로만 세수한 뒤 지저분한 셔츠를 잡아당겨 얼굴을 닦고 나무 밑으로 걸어갔다.
씻고 자려는 것 같다.
거지들은 밤에 활동하니까, 지금 시간이면 슬슬 잠을 잘 시간인 건가.
그건 그렇고 왜 나를 보고도 도망치지 않는걸까.
의문을 가지면서도 식수대로 향한 나는 그릇을 씻고 있는 거지를 내려다보며 가방을 등에서 내렸다.
식수대에서 이럴 생각을 오고 공원에 온 건 아니였지만, 나도 슬슬 씻고싶다.
다른 거지처럼 나도 식수대 옆에 있는 수도꼭지에서 머리를 감고, 식수대에서 세수를 하면 될 것 같다.
나는 가방에서 그레이프가 사준 샴푸와 세안제를 꺼냈다.
“어…?”
그러자 내 바로 옆에서 그릇을 닦고 있던 거지가 놀란 목소리를 내며 나와 눈을 마주쳤다.
거지는 나를 노려보더니 웃는 얼굴로 내 가방을 가리켰다.
가방은 깊숙이 있던 샴푸와 세안제를 꺼내며 풀어헤쳐져 있었다.
“너...너 좋은 거 많네?”
“응?”
“가, 가진다?! 이거 내꺼다?!”
“어? 뭐야?!”
거지는 갑자기 내 가방에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나는 전혀 반응하지 못했다.
어느새 가방에서 위로 꺼내져 있던 그레이프의 브래지어가 거지의 손에 잡혀 있었다.
“이 미친 새끼!”
그레이프의 속옷에 다른 놈이 손댔다는 사실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다.
나는 거지의 다리에 정확하게 발차기를 날렸다.
도망치려던 거지는 그대로 넘어져 바닥에 쓰러졌다.
“흐으으읍! 스읍…! 후읍…!”
“야, 안놔? 야! 내놔!”
거지는 다리를 세게 맞았는데도 전혀 아프지 않은것처럼 미친듯이 그레이프의 브래지어에 얼굴을 묻었다.
나는 소름돋는 불쾌감에 혐오감을 느끼며 거지를 계속해서 걷어찼다.
브래지어를 잡아당겨봤지만 정말 정신 나간듯이 냄새를 맡고 있다.
“후읍...하아…! 이거, 뭐얏…! 스읍…! 아...히힛…!”
“우웁….”
그레이프의 브래지어는 순식간에 엉망이 되어버렸다.
서로 잡아당긴 탓에 중간이 뚜둑뚜둑 소리를 내며 터졌고, 가슴이 닿는 부분은 기분나쁜 거지에게 더럽혀졌다.
눈을 뒤집고 헥헥대는 거지가 브래지어를 혀로 핥기 시작했다.
“하아...하아...이 냄새...못 참아...여자 냄새, 아니, 그보다 더…! 켁!”
더는 보고 있을 수 없게 된 나는 거지의 머리를 잘 조준한 뒤 발차기로 목 뒤쪽을 걷어찼다.
조금 세게 차긴 했지만, 죽을 정도는 아니다.
거지는 머리를 맞고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거지 한 명을 기절시킨 나는 혀를 차며 고개를 들었다가 어느새 주변에 가까워진 거지들을 보고 인상을 썼다.
잠깐의 소란으로 잠이 들려던 거지들이 전부 일어났다.
거지들은 모두 내 짐을 노리고 있었다.
“뭐야...신입인 줄 알았는데, 보물을 들고 왔어…?”
“야, 야...나랑도 나눠...나도 줘...여자 속옷 줘…!”
“샴푸? 세안제…? 옷…? 너 좋은 거 많다…?”
“신입…? 이것들이….”
그레이프의 브래지어를 훔치고 망가뜨린 것도 짜증나지만, 나를 거지 신입 취급하는 건 더 짜증난다.
나는 서서히 다가오는 거지들을 노려보다가 바닥에 있던 찌그러진 그릇을 주워들어 보란듯이 왼손으로 잡아 우그러뜨리기 시작했다.
찌그러지긴 했지만 아직 쓸만해 보였던 그릇은 순식간에 날카로운 철침처럼 일그러졌다.
“누굴 거지 취급하고 있어…? 안 꺼져? 너네 팔다리도 이렇게 만들어줄까?”
“힉…!”
“가, 강화인간이다! 군인이야!”
펜 정도 두께로 뭉친 철침을 바닥에 던져 꽂자 거지들은 나를 방위군의 특수전 병사와 같은 강화인간이라고 생각했는지 공원 중앙의 맨홀을 열고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하수도 밑에 보금자리라도 만든건가?
쥐새끼 같은 움직임이다.
10초도 되지 않는 사이에 공원에는 나와 기절한 거지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나는 잠시 거지를 내려다보다가 한숨을 쉬고 세수를 하기 시작했다.
브래지어는...짜증나지만 그냥 줘야 할 것 같다.
이미 서로 잡아당기며 망가진 것도 문제지만, 생리적으로 더러워서 싫다.
저딴 놈이 입으로 물고 빨아댄 브래지어를 그레이프가 입는 건 보고싶지 않다.
변태도 아니고...냄새를 맡고 빨다니...소름이 돋는다.
변태 거지를 퇴치한 뒤 세수도 하고, 머리도 감은 나는 가방에서 수건을 찾았다.
내 수건은 스프링클러에 젖었다가 말라서 그런지 좀...냄새난다.
나는 그레이프가 방에 찾아올때 입던 셔츠를 꺼내 얼굴과 머리의 물기를 닦았다.
확실히 내 수건과는 다른 좋은 향기가 났다.
“켁….”
샤워는 아니지만 간단하게나마 씻고 개운해진 나는 가방을 정리한 뒤 거지를 발바닥으로 차댔다.
거지는 내게 걷어차이면서도 그레이프의 속옷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계속해서 거지를 발로 차 맨홀 앞까지 데려간 나는 맨홀 뚜껑 위에 거지를 올려놨다.
“후우….”
입구를 막았으니 기절한 거지가 깨어나기 전까지는 나오기 힘들 것이다.
나는 조용해진 공원의 여유를 느끼며 가방을 한쪽 벤치에 올린 뒤 가방 입구가 가려지게끔 등을 기대고 앉아 다리를 쭉 폈다.
씻었으니, 가볍게 낮잠이라도 자야겠다.
정말로 말 그대로 가볍게, 푹 잠들지 않고 눈만 감아 휴식하듯이 잠이 든 나는 햇빛이 눈을 내려찍듯 찔러올때 쯤 눈을 떴다.
푹 잠들지는 못했지만, 이것만으로도 피로가 상당히 많이 풀렸다.
맨홀 쪽을 보니 거지는 여전히 기절해 있었다.
혹시 죽은 건 아닌가 싶어 가까이 다가가보니 숨은 쉬고 있었다.
아니...숨을 쉰다기보다는, 그레이프의 브래지어 냄새를 맡고 있다고 해야할까….
기분 나쁜 놈이다.
거지의 등을 한번 더 밟아준 나는 가방을 등에 메고 근처 식당에 다가가 식당 안의 시계를 살폈다.
마침 점심시간이 되기 바로 직전인, 딱 좋은 시간이었다.
지금 회사에 가면 될 것 같다.
“아이고! 이제 장사 시작해야하는데 재수없게! 저리 안 가?!”
그렇게 시간을 확인하고 식당에서 떨어지려던 순간, 갑자기 식당 안에서 아줌마가 걸어나왔다.
아줌마는 나를 보자마자 혐오감이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빗자루를 휘둘렀다.
나는 아슬아슬하게 빗자루를 피한 뒤 아줌마를 노려보며 말했다.
“아줌마! 나 거지 아니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