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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소녀 최면물-280화 (280/299)

< 280화 > 거지 (3)

“어…그렇구나.”

나는 로제의 말을 듣고 조용히 시선을 피했다.

최근에 구조요청이 많았던 것도, 지지 않을만한 상대한테 너무 많이 진 것도 내가 자꾸 최면을 걸어서 그렇다.

그러니까 이건 내 탓이다.

마법소녀의 등급 재심사라는 건 그리 좋은 얘기가 아니다.

마법소녀 스스로가 현재 자신의 등급에 만족하지 못해 신청하는게 아니라면, 대부분의 재심사는 현재 배정된 등급보다 실제 능력이 낮다는 판단하에 진행되기 때문이다.

지하철의 네 명은 아마도 내가 계속해서 최면을 걸어 패배시킨 탓에 재심사를 받게 된 것 같다.

순수하게 마법의 위력과 신체능력, 마력량을 측정하는 파워 레벨 측정.

사건 사고에 대한 처리능력, 대응능력을 검사하는 대처 등급 시험.

현장에서 실제로 어찌 행동하는가를 확인하는 실전평가.

점수에 따라 마법소녀는 현재의 등급을 유지하기도, 떨어지기도 한다.

넷 다 실력만큼은 자신의 등급에 어울리는 마법소녀고, 내 탓에 오히려 실전경험과 마법 숙련도가 더 올랐을 테니 등급이 떨어지거나 유지되는건 걱정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등급의 변동보다 큰 문제는 따로 있다.

재심사라는 건 말 그대로 재심사다.

넷은 A시 순환 라인에 배치되어있는 마법소녀지만, 재심사에 들어가는 순간 소속이 없는 마법소녀로 변한다.

이후 배치구역이 적절한지, 등급이 세세하게 변경되는 것에 따라 다른 곳에 배치하는게 좋은건 아닐지를 판단해, 어디에 배치하는게 좋을지도 다시 심사한다.

등급에 상관 없이 배치 구역이 변할 가능성이 높다.

같이 힘을 합쳐서 이기려고, 잘 해보려고 했는데 지기만 해서 결국 재심사, 이제 막 친해진다 싶은 사람들하고 헤어지게 생겼으니 로제가 우울해할 만도 했다.

로제는 힘없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제 친해졌는데…선생님이 이것저것 가르쳐줘서 많이 강해졌는데, 그래도 져서....”

“음...너무 성급해하지 마, 재심사를 한다고 해서 무조건 배치가 바뀌는 것도 아니고….”

“아뇨, 바뀌는 건...확정이에요.”

로제는 단호하게 말하며 샤워실 쪽을 턱짓했다.

“저 사람...엄마가 가르친 사람 중 하나라서, 이것저것 말해줬어요.”

“엄마라면….”

“그리고 아르나도...하아, 저희 둘은 A시에 있어야 한다고...지금 심사 받는 건 루이랑 시에나 뿐이고, 아르나랑 저는 허울뿐인 실전평가를 받는 중이에요.”

...루이는 매니악한 팬이 많긴 하지만, 그것 뿐이다.

시에나는 팬이 좀 있긴 해도 집이 가난하다.

루이는 은퇴했다고는 하나 최상위 7인 중 한명의 딸, 아르나는 트루비전 고위간부의 딸...무슨 얘기인지 더 듣지 않아도 답이 나온다.

둘을 함부로 건드려 A시 밖에 배치했다가는 뒷일을 감당하기 힘들다.

하지만 루이와 시에나는 어딜 보내도 상관 없다.

딱히 연줄이랄것도 없으면서 실력은 꽤 나쁘지 않아 B시...아니면 D시, C시로 보내버려도 괜찮은, 오히려 딱 보내기 좋은 수준으로 성장한 순간 알맞게 재심사 평가가 시작된 마법소녀다.

“다른 곳으로 가더라도 A시로 배치되면 좋겠는데…가끔 볼수라도 있게....”

운이 좋으면 A시의 백화점 방위나 도로 대기, 놀이공원 같은 곳으로 갈 수도 있겠지만...그건 기대하지 않는 게 좋겠지.

A시에 머무르고 싶어하는 건 평범한 사람들 뿐만 아니라 마법소녀도 마찬가지다.

그런 곳에 생긴 빈자리는 다른 시의 마법소녀들의 신청에 의해 바로바로 사라져 버린다.

“하아아….”

로제 또한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인지 우울한 한숨만 계속해서 쉬고 있었다.

나는 내가 생각해봐도 방법이 없어 아무 말 없이 앉아있었다.

솔직히 말해, 내가 재심사를 하는 담당이여도 루이와 시에나를 다른 곳으로 보내고 싶어질 것 같다.

아르나는 실력이 급상승해 상급에 가까워져가고 있고, 루이도 중급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무시무시한 단일 공격력을 자랑한다.

처음에는 로제도 아르나도 능력은 있으면서 실전경험이 부족했을테니, 능력은 부족하지만 경험과 판단은 좋은 루이와 같이 둘만한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굳이 둘을 루이와 붙여놔야 할 필요가 없다.

아르나와 로제는 다른 곳으로 보낼 수 없고, 이미 팀의 리더를 맡을만큼 성장했다.

그러면 굳이 루이와 시에나를 한팀으로 둘게 아니라, 다른 실전경험이 부족한 마법소녀를 배치시키는게 이득이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는게 정상이다.

그나마 기대할만한 상황이라면 새로 배치되는 마법소녀가 A시 어딘가에 배치되어있던 마법소녀들로, 루이, 시에나와 배치구역을 서로 바꾸는 것이다.

딱히 다른 시에 보낼 마법소녀가 필요하지 않은 상황이면 이러기도 한다.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는게 문제였다.

“하아….”

“음...저기...힘내.”

“네...죄송해요...저도 참...이런걸로 흔들리면 안되는데, 힘드네요…빨리 어른이 되야 하는데...후우!”

로제는 마스크를 쓴 얼굴을 양 손으로 짝 소리가 나게끔 때렸다.

그대로 잠시 얼굴을 가리며 거칠게 호흡한 뒤 손을 내리자, 로제의 눈에서 피로가 사라졌다.

아니,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그러고 보니...선생님이 있는 부대는 방위군 간부한테도 비밀인 것 같습니다?”

“어, 그렇지…?”

“서로 전혀 못 알아보는 것 같길래...그래도 남자친구라고 하시는 건...그래서 잘 넘어가긴 했지만...조금, 당황했습니다. 아, 이사 가신다고 하셨죠?”

“아, 응….”

로제는 우울한 얘기를 더 하고싶지 않았는지 화제를 억지로 전환했다.

나는 로제에게 짧게 대답하며 묘한 갑갑함을 느꼈다.

어떻게든 강해보이려 하는 로제의 딱딱한 말투가 오늘따라 귀엽지 않고 힘겹다.

“...아, 도착 방송 해야겠습니다.”

“어, 얼른 해.”

“그럼 잠시….”

로제도 나의 어색한 반응을 느꼈는지, 굳이 자동 방송으로 해둔 운전석에 다가가 역에 도착하는 방송을 했다.

방송을 마치고 잠시 후 샤워실에서 여자가 옷을 입은 채 밖으로 나와 운전석을 차지했다.

나는 다시 소파로 돌아온 로제와 아무 말 없이 나란히 앉아있었다.

나와 로제를 힐끔거리며 짜증내는 여자와 나를 신경써주면서도 자기 상황이 힘겨워 우울함을 참을 수 없는 로제의 감정이 실내를 가득 채운다.

뭐라고 말할 수 없는 분위기가 주변을 감싼다….

나는 빨리 차량이 역에 도착하기만을 기다렸다.

# # #

“하아…!”

회사 구역에 도착하자마자 숨막히는 분위기에서 탈출한 나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지하철 밖의 공기가 이렇게도 가볍고 상쾌했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나는 몸 속에 가득 내려앉은 무거운 공기를 뱉어낸 뒤 머리를 흔들며 찝찝한 기억을 털어냈다.

마법소녀가 재심사를 받는 건 원래 자주 있는 일이다.

아르나는 빠르게 성장해 상급 마법소녀를 넘보고 있었으니, 승급 심사 요청을 한 순간 어차피 팀은 분열되었을 것이다.

나 때문에 조금 앞당겨지긴 했찌만, 언젠가는 일어났을 일이다.

A시가 아닌 곳으로 가게 될 수도 있지만, 그것까지 내가 신경써줄 필요는 없다.

다른 구역에 갔다가도 상황에 따라 다시 돌아오기도 하는게 마법소녀다.

정말 여차하면 방위군과 트루비전에 강한 연줄이 있는 로제와 아르나가 알아서 빼내주겠지.

신경쓰지 말자.

내 잘못이 아니다.

언젠가 일어났을 일이다.

...그러고 보니 로제는 그레이프의 연락처가 있는 것 같았으니, 비전폰을 빌려서 그레이프한테 연락하면 좋았을 텐데.

분위기가 안 좋아서 그런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아니...생각하지 말자, 지하철에서는 아무일도 없었다….

아무도 못 만났고, 아무일도 없었다….

“후…! 좋아….”

마음을 안정시킨 나는 기지개를 켠 뒤 출근길을 걷기 시작했다.

몇번이고 오간 도로에는 출퇴근 시간이 아닌데도 바쁘게 움직이는 회사원들이 가득했다.

거래처와 연락을 하며 걸어가는 사람, 어딘가에서 일을 한 뒤 피로하게 회사로 복귀하는 사람, 두 손에 커피를 가득 달고 걸어가는 사람...피로회복제를 들고 영업하는 제약회사의 영업사원...전부 피곤에 찌든 회사원들 뿐이다.

퇴사하기 전에는 나도 정장을 입고 이런 사람들 사이에 섞여 커피 심부름을 하고는 했지만, 지금의 나는 달랐다.

에스더가 감염된 이후 서로의 눈치를 보며 아무도 입지 않게 된 운동복, 씻지도 못하고 나와 곧바로 땀을 흘리며 엉망이 된 머리 모양, 하루 사이에 수염이 까칠하게 자란 얼굴, 등에는 내 상체보다도 크고 잡동사니가 가득 들어 달그락거리는 배낭을 매고 있다.

누가 봐도 집에서 쫓겨난 거지 백수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조금 상태가 좋은 옷을 입었다는 것을 제외하면 A시에 보이는 홈리스랑 별반 다를 게 없는 모습이었다.

정장을 입고 걸음을 옮기는 사람들은 그런 내 모습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근처 공원에서 사는 거지라고 생각한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조금도 창피하지 않았다.

아무리 나를 냄새 나는 백수로 본다 해도…나는 래피드와 처녀막을 만지고 정액을 안에 사정한 남자다.

그레이프와 섹스하고, 에스더의 보지도 핥고, 회사원들이 출근할 때마다 목소리를 들으며 좋아하는 아르나, 루이, 로제, 시에나도 전부 따먹은 남자다.

아무리 나를 무시하는 눈빛을 보내도 나는 당당하다.

별것도 아닌 일반인의 시선같은건 신경쓸 필요 없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눈 앞에서 코를 막고 지나가는 여자는 조금 신경쓰인다.

몸에서 조금 먼지와 땀이 뒤섞인 냄새가 나긴 해도, 그렇게까지 냄새나진 않을텐데….

혹시 떡진 머리에서 기름 냄새가 나나?

아니,  물에 젖었다 마른 것들이 가득 든 가방에서 나는 퀴퀴하고 찝찝한 쉰내 때문인가?

나는 등에 맨 가방을 내려 냄새를 맡았다.

내 예상과 다르게 가방에서는 심한 냄새가 나지 않았다.

안 난다는 건 아니지만, 지나가면서 눈살을 찌푸릴 정도는 아니다.

그럼...정말로 내 몸에서 냄새가 나는건가?

혹시 모르니 회사에 들어가면 화장실에서 머리 좀 감고, 세수도 해야겠다.

세안제랑 샴푸도 확실히 챙겼고, 수건은...건조기로 그냥 말리면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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