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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소녀 최면물-279화 (279/299)

< 279화 > 거지 (2)

카드가 없으면 지하철을 타지 못한다.

결제하지 않고 지나가려 하면 차단기가 펴지며 경보음이 울리게 되어있다.

이 당연한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나는 지하철 앞에서 잠시 어떡하면 좋을지 망설였다.

즉, 센서에 인식되지 않으면 된다.

답을 내린 나는 주변에 사람이 없는 순간을 기다린 후 게이트를 완전히 뛰어넘었다.

게이트는 상당히 높았지만, 몸이 가벼워져서 그런지 쉽게 넘을 수 있었다.

커다란 가방을 메고도 이런 게 가능하다는 사실이 조금 놀랍다.

예전에는 생각도 하지 못했을 신체능력이다.

나는 떡진 머리를 손으로 빗어 넘기며 밑으로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에 탑승했다.

출근 시간이 이미 지나서 그런지 사람들은 많이 보이지 않는다.

나는 언제나와 같이 운전실에 탈 생각을 하며 뒤늦게 한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운전실에 샤워실이 있으니까 거기에서 샤워하면 되잖아?

이런 당연한 생각을 지금에서야 해내다니.

소파나 침대에서 잠도 좀 잘 수 있다.

나는 드디어 씻고 잘 수 있다는 기대와 함께 차량을 기다렸다.

“어….”

“...누구?”

그렇게 언제나처럼 차량이 떠나기 직전에 운전실 문을 두드린 나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루이, 아르나, 시에나, 로제 넷 중 누구도 아닌 모르는 사람이 문을 열었다.

나는 예기치 못한 상황에 당황하며 그대로 얼어붙었다.

나온 사람은 전체적으로 깔끔하다는 인상을 주게끔 정돈된 복장을 한 여자였다.

여자...마법소녀인가?

왜 모르는 여자가 안에서 나오는 거지?

운전실에서 나온 여자는 나를 위아래로 살펴봤다.

아무리 봐도 지하철에서 일하는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는데 왜 여기에서 이러냐는 눈빛이다.

내 정체를 파악하려 하다 내 가슴께에서 시선을 멈춘 여자는 인상을 쓰며 말했다.

“마법소녀 오타쿠?”

내가 입고 있는 옷의 왼쪽 가슴쪽에 그려진 에스더의 엠블렘을 보고 하는 얘기였다.

이 옷은 에스더의 방송을 보고 이벤트에 응모해 당첨되야만 얻을 수 있는 옷이다.

발에는 그레이프가 광고한 러닝화, 에스더 운동복...누가 봐도 마땅히 심각한 마법소녀 오타쿠라고 생각할만한 복장이다.

“굳이 에스더를...아니, 줏어 입은 건가? 거지? 정신병자…? 하아...진짜.”

여자는 내 기름진 머리와 수염투성이 얼굴, 커다란 가방을 순서대로 보더니 눈 앞에서 한숨을 쉬며 무전기를 들어올렸다.

방위군에서 사용하는 물건이다.

나는 그제야 여자의 복장이 내가 알고있는 무언가와 비슷하게 생겼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훈련병을 준비할 때 본 방위군 간부의 옷과 같아 보이면서도 약간 다르지만, 이건 군복이다.

아마도 야외 활동용 간부용 군복...장식이 적고, 전체적으로 색이 어두운 깔끔한 복장이다.

군용 무전기, 군복, 잘 정돈된 머리, 옷 위로도 보일 정도로 단련된 몸….

“통신, 여기는 부엉이, 상황발생, 상황발생.”

이 여자는 군인이다.

군인이 대체 왜 여기 있지?

큰일 났다.

운전실에 일반인이 함부로 다가오는 건 범법행위다.

통신을 거는 건 상황 보고를 하고 조치하기 위해서, 나를 범법자로 체포하기 위해서다.

마법소녀가 아닐 이 여자에게는 최면도 통하지 않고, 애초에 지금은 최면을 걸 비전폰이 없다.

“자, 잠깐...수상한 사람이 아닙니다.”

“수상한 사람이 운전실 문을 두드렸다. 정신이상자일 가능성 있음.”

“아니...마법소녀는 어디로 가고…마법소녀, 아무나 불러주세요!”

군인이 대체 왜 여기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군인이 감염체와 소형 괴수들을 안전하게 사냥하는 건 불가능하다.

분명 이 군인은 어떤 용무로 운전실에 찾아온 것 뿐이고, 안에는 내가 아는 마법소녀가 따로 앉아있을 것이다.

나는 확신을 가지고 마법소녀를 불러달라 요청했다.

“하아...정정한다, 오타쿠 발생. 반복한다, 오타쿠 발생.”

그러자 여자는 차가운 태도로 발을 들어 나를 밀쳐낼 준비를 했다.

역겨운 쓰레기를 보는 눈이다.

내 행동이 오히려 여자에게 나에 대한 확신을 심겨준 모양이다.

어떡하면 좋지.

이대로 방위군에게 잡힐수는 없다.

인중을 가격해서...아니, 목을 졸라 기절시키고 도망갈까.

“무슨 일이죠? 아…!”

“로제…!”

“선…!”

과격한 방법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준비하던 나는 운전실 안에서 걸어나온 로제를 보고 반가워했다.

로제는 나를 보고 선생님이라고 부르려다가 여자를 보고 부자연스럽게 목소리를 멈췄다.

누군가에게 나에 대한 걸 비밀로 하는 최면 때문이다.

“...아는 사이십니까?”

“어...그, 그게….”

로제는 최면 때문에 혼란스러워 하고 있었다.

나와의 관계가 비밀이라는 건 어디까지 비밀인가.

선생님이라는 것도 밝히면 안되는게 아니라, 아는 사이라는 것도 밝히면 안되는 걸까.

나는 로제의 반응을 보고 이 여자에게 나와 로제의 관계를 밝힐 수 없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이 여자는 거짓으로 방위군 비밀부대원 행세했던 나와 다르게 진짜 방위군 소속의 군인이다.

즉, 여자가 납득할만한 가까운 관계면서 더는 캐내려 하지 않을만한 관계가 필요하다.

“남자친구입니다!”

“네?!”

여자는 깜짝 놀라는 로제의 반응에 고개를 돌렸고, 나는 로제를 노려보며 빨리 고개를 끄덕이라고 신호했다.

로제는 당황해 나와 여자를 번갈아 보더니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여자는 묘한 표정으로 나를 노려봤다.

“...남자, 친구?”

“이사중인데, 생각나서 잠깐 들린 것 뿐입니다...얼굴 좀 보러 온 건데….”

“이게 지금 말이 되는...하아....”

여자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다시 고개를 들며 짜증이 가득한 얼굴을 한 여자는 무전기에 대고 신경질적인 목소리를 냈다.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정정한다...따님분의 지인이었다...상황 종료.”

다행히 방위군에 체포당하는 일은 면할 수 있었다.

그건 그렇고 따님분이라니...릴리를 얘기하는 건가.

통신을 마친 여자는 혀를 차며 길을 비켜줬다.

“일단 들어오시죠, 차량 출발해야 하니까.”

나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익숙하게 운전실 안으로 들어선 뒤 문을 닫았다.

그러자 여자는 나를 가만히 노려보다가 로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로제는 흠칫 놀라며 여자의 눈치를 살폈다.

여자는 운전석에 앉아 능숙하게 방송을 하고 차량을 출발시켰다.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여자의 눈치를 보며 가방만 바닥에 내려놓은 뒤 가만히 서 있었다.

잠시 후, 달리는 차 안에서 여자가 운전석에 앉은 채 이마에 손을 짚으며 말했다.

“...로제 님, 운전실에 남자를 데려오시면 곤란합니다.”

“아, 네….”

“그런 위로가 한창 필요하실 때라는 건 이해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여기는...애초에 복장도 그렇고 씻지도 않은 게, 대체...남자 취향이...하아...아닙니다.”

“어….”

“제가 로제 님께 이런 말 할 위치가 아니죠. 두분 다 그냥 알아서 하세요.”

로제는 무척 억울한 눈빛을 하면서도 할 말이 없는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완전히 침묵한 여자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샤워실 겸 화장실로 향했다.

알아서 하라고 했으니 일단 좀 씻고 와야겠다.

“화장실 위치도 알고, 한두 번 부른 것도 아니신 것 같군요.”

“어...그건...그게….”

아무리 나라고 해도 이런 분위기에서 샤워하고 나오는 건 힘들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씻는 걸 포기하고 로제가 서 있는 곳을 지나쳐 소파에 가서 앉았다.

그러자 로제도 주뼛주뼛하며 내 옆에 천천히 다가와 따라 앉았다.

“하아….”

그 모습을 본 여자는 한숨을 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마른 세수를 한 여자는 샤워실로 향하더니 군복 단추를 푸르며 나와 로제에게 시선을 향했다.

허튼 짓 하지 말라고 경고하는듯한 날카로운 눈빛이다.

“두분 대화하시죠, 10분정도 샤워좀 하고 나오겠습니다.”

“네? 아, 어….”

“10분입니다. 방송은...자동 방송으로 해둘테니, 조용히, 대화 하고 계시죠.”

여자는 그 말을 끝으로 샤워실에 들어가 버렸다.

샤워실에서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둘이 무슨 대화를 하든 샤워기 물 소리때문에 난 들리지 않으니 대화하세요, 라고 하는 것 같은 행동이다.

나랑 로제가 서로 사귀는 사이라고 하니 배려해 준 건가…?

이런 배려는 별로 필요 없는데…오히려 더더욱 샤워를 할 수 없게 됐다.

그보다...대체 여군이 왜 여기 있는거지.

출근시간이 지났다고 해도 아직은 마법소녀 두 명이 근무해야 하는 시간인데, 마법소녀는 로제밖에 보이지 않는다.

마법소녀 셋이 휴가라도 낸 건가...아니면,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 로제가 옆에서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저기.”

“응?”

“괜찮으세요, 선생님?”

나는 그제야 로제를 마주보며 로제의 상태를 살폈다.

로제는 상당히 피곤해보이는 눈을 하고 있었다.

목소리도 힘이 없고, 사소한 움직임 하나하나에서 기가 죽었다는게 느껴진다.

“이번에도 무사하셔서...다행이에요.”

“아, 응.”

“도중에 기억이 없어서, 쓰러졌던 것 같아서 걱정했는데...상처가 없으신 걸 보니 다행히 구조가 늦지 않았나보네요.”

걱정했다는 듯이 말하고 있지만 나보다는 로제가 더 걱정스러워지는 모습이다.

뭔가 안 좋은 일이 있었던 걸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나는 우울해져있는 로제에게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그런데...무슨 일 있었어? 다른 애들은? 왜 마법소녀가 아니고 여군이 여기 있는거야…?”

“아…그게....”

“말해.”

로제는 잠시 망설이며 내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내가 재촉하자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저희, 요즘 너무 많이 져서...그것도 안 질만한 상대한테 진 것도 많고, 구조 요청도 많아서요….”

“응? 어...어.”

“등급 재심사 받는 중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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