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8화 > 거지 (1)
집주인이 쓴 것으로 보이는 편지에는, 화재 경보로 전화를 했지만 내가 전화를 받지 않아 직접 찾아와 봤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이 후 집안 상황을 본 후 이건 사람이 사는게 아닌 것 같다며, 바로 퇴거 조치를 했으니 불만이 있으면 전화하라고 적혀있다.
나는 문 앞에 쪼그려앉아 집주인의 편지를 읽으며 한숨을 쉬었다.
“하아….”
집주인은 조금 사정이 힘들 때 전화하면 월세를 한 달 미뤄주고, 두 달까지도 미뤄주는 착한 사람이었다.
요즘 시대에 보기 힘든 선량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이렇게 갑자기 사람을 내쫓다니….
...아니, 이정도로 끝난 걸 보면 역시 착한 사람이 맞다고 해야 하나.
나는 두달 치 월세를 내지 않고 나중에 주겠다고 미루고 있는 상태였다.
딱히 돈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바이러스 괴수 사태 때 힘들다고 부탁하니 미뤄주길래 그냥 미뤘다.
보증금은 세달 치 월세, 밀린 월세는 두 달, 남은 한 달 월세는…부족하긴 하겠지만, 집 수리비로 쓰겠다는 거겠지.
최근에는 그레이프가 자주 청소해줘서 집안이 깨끗해지긴 했지만, 벽면과 바닥 여기저기에는 그레이프아 섹스할 때 손톱으로 긁고 엉덩이로 찍은 흔적들이 여전히 남아있었다.
침대 프레임이 바닥을 파낸 흔적도 있고, 누가봐도 정상적으로 집을 쓰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가 보기에도 엉망이라고 할만한 방 상태였다보니, 내쫓아진 것에 뭐라 변명할 말이 없었다.
그레이프도 방안에 새겨져있는 자신의 흔적들이 마음에 드는 듯 딱히 고치려 하지 않았고, 나도 귀찮아서 건드리지 않았다.
거기에 화재까지 일어났으니, 집주인 입장에서 화가 날 수밖에 없다.
오히려 이 정도로 끝내주고, 사람을 불러서 짐들을 정리해 밖에 내 놓아준 집주인이 천사인 게 아닐까.
그래도 딱 오늘까지만 샤워하고, 자고 나가고 싶지만, 어쩔 수 없어 보인다.
현관문은 잠겨서 꼼짝도 하지 않았고, 갑자기 리프에게 납치되었던 내 손에 열쇠같은 건 들려있지 않았다.
방 문을 열 방법이 없다.
왼손으로 문고리를 파괴하는 건 어떨까..
아니...그런 짓을 했다가는 부순 흔적이 남는다.
이미 집에 올라오며 엘리베이터 CCTV에도 찍혔고...무조건 걸린다.
집주인에게 무단참입으로 신고당하고 싶진 않다.
그런 범죄 기록이 쌓이면 A시에 수배당하고, 퇴출당하게 될 수도 있다.
방위군에게 쫓기는 몸이 되는 건 사양이다.
좋은 사람이니까 전화해서 부탁하면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까 싶기도 하지만, 전화를 할 방법이 없다.
비전폰도 없지만, 집주인 할아버지의 전화번호같은 건 기억하고 있지도 않았다.
방법이 없다.
“쯧….”
왜 불이 난 거지...그레이프가 청소해줬는데...불이 날리가 없는데…운이 없어도 이렇게 없다니...하필 이렇게 피곤할 때 불이 나서 집에서 쫓겨나다니….
X가 말한 업보라는 말이 머릿속에 떠올라 스트레스를 더한다.
아니, 이건 업보가 아니다.
X랑 리프가 집에 오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쯤 집에서 자고 일어났을 것이다.
합선되어 불이 난 것도 바로 알아차리고 직접 불을 끄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냈겠지.
그러니까 이건 X와 리프 탓이다..
...누구 때문에 일이 어쩌다 이렇게 되었냐 하는 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이렇게 피곤한데도 집에 들어갈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가득 쌓여있는 피로감이 짜증으로 변하는 걸 느끼며 머리를 긁었다.
오늘부터 어디에서 자지...모텔이라도 가야 하나….
나는 그제야 내가 지갑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어디에 뒀었지?
래피드가 돌아가고 나서 튀김을 사 왔으니까, 그때까지는 가지고 있었다.
그 후에 리프가 들이닥치고, 비전폰만 들고 쫓겼으니까...지갑은 집 안에 있었을 것이다.
나는 집주인이 문 앞에 정리해 꺼내둔 짐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지갑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발견됐다.
하지만, 상태가 좋지 않았다.
낡은 지갑은 일부가 불타 있었고, 안에 있어야 할 결제 카드들도 이미 맛이 가 있었다.
내가 멀티탭하고 가까운 곳에 던져놓기라도 했던 걸까….
비전폰 뿐만 아니라 결제수단도 사라져 버렸다.
이러면 모텔에 가는 것도 어렵고, 비전폰을 사는 것도 불가능하다.
결제 카드도 비전폰도 없다.
결제 카드는...재발급 받으면 되지만, 재발급을 받으려면 시민 ID카드가 있거나, 비전폰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 나는 ID카드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나는 시민 ID카드를 따로 들고다니는게 귀찮아 비전폰에 전자신분증 등록을 한 지 오래였다.
그러다 보니 ID카드는 자연스럽게 잃어버렸고, 재발급 신청도 하지 않았다.
비전폰의 전자신분증으로 대체하면 되니까, 지금까지 A시에 살면서 딱히 재발급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는데...이런 일이 일어날 줄이야.
ID카드 재발급을 받으려면 비전폰이 있어야 하고, 없을 경우 시민 확인을 받아야 한다.
ID카드 발급을 위한 시민 확인은 A시 거주자가 아니라면 일찍 끝나지만, A시 거주자임을 증명하는 ID카드는 하루 이상의 시간이 걸린다.
거주지 불법 이전을 막기 위한 정밀검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ID카드, 결제 카드, 비전폰 셋 중 하나만 가지고 있으면 두 가지를 분실하더라도 빠르게 재발급, 재구매를 할 수 있다.
이 세 개를 한번에 다 잃어버리는 사람은 드물다.
그리고 그 드문 사람이 바로 나였다.
비전폰을 새로 사려면 결제 카드가 있어야 한다.
결제 카드를 재발급 받으려면 ID카드나 비전폰이 있어야 한다.
ID카드를 재발급 받으려면 비전폰이 있어야 한다.
“아…!”
이 답없는 상황에 머리를 싸매던 나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고개를 들었다.
오늘은 그레이프가 D 시에서 돌아오는 날이다.
그레이프한테 돈 좀 빌려달라고 하자.
비전폰이 없으니, 그레이프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전화하는 건 당연히 불가능하다.
그레이프와 직접 만나서 돈을 달라고 해야 한다.
근데, 어떻게 직접 만나지…?
전화가 안 되니까...일단 갔다오면 최대한 빨리 집에 온다고 했으니까, 집 앞에서 기다리면 되려나.
리프가 그레이프는 오늘 점심이 되어야 돌아온다고 했었지….
아직 시간이 꽤 남았다.
근데, 점심에 오는 게 맞을까?
오늘은 월요일이고...그레이프는 휴가를 많이 썼으니까, 오전 반차를 쓰고 회사에 갔다 오지 않을까…?
저녁까지 집앞에서 쪼그려 앉아서 기다리긴 싫은데....
어디 길가는 사람에게 비전폰을 빌려서라도 그레이프에게 전화해서 물어보면 되지만, 나는 그레이프의 전화번호를 모른다.
연락처 등록은 했어도 번호를 하나하나 외우진 않았다.
어떡하면 좋을까….
...회사에 찾아갈까.
그레이프가 회사로 오면 바로 만날 수 있고, 집으로 가도 회사에는 그레이프의 연락처가 있으니 바로 전화할 수 있다.
연락처를 보고 와도 되고, 회사 사람한테 비전폰을 빌려서 바로 전화해도 된다.
그나마 이게 제일 좋은 방법인 것 같다.
회사 사람들이 순순히 나한테 비전폰을 빌려주고 그레이프한테 연락하게 해주지 않을 것 같지만, 안 빌려주면 좀 혼내주면 되겠지.
어차피 이제 내 상사도 아니고.
답을 내린 나는 현관문 앞에 널려있는 내 물건들을 내려다봤다.
이대로 두면 아파트 관리인이 알아서 드론을 불러 처리할 게 분명하다.
...점심시간까지는 시간도 남았고, 이 참에 나한테 당장 필요한 것들망 챙겨둬야겠다.
나는 짐들 사이에서 A시로 옮겨올 때 썼던 큰 가방부터 찾아 꺼냈다.
디자인적으로 예쁘지는 않지만, 튼튼하고 좋은 피난용 가방이다.
오랜만에 꺼낸 가방을 뒤집어 먼지를 털어낸 나는 필요한 물건들을 하나하나 집어넣기 시작했다.
아마도 화재에 의해 스프링쿨러가 터지며 젖었을 것으로 보이는 여러 옷가지와 잡동사니…젖은 옷에서 퀴퀴한 냄새가 난다.
...일단 나도 옷을 갈아입긴 해야 한다,
나는 주변을 살펴보며 빠르게 옷을 갈아입었다.
치마처럼 허리에 두른 가운 안으로 속옷을 올려 입고, 바지를 입은 뒤 가운을 푼다.
상의와 하의는 예전에 에스더의 방송에서 응모해 받은 추리닝 세트다.
한쪽 가슴에는 에스더의 엠블럼인 하트스타가 그려져 있다.
에스더가 네거티브가 된 뒤, 입고 다니기에 눈치가 보여 옷장 구석에 넣어뒀던 옷이지만, 그래서 그런지 이게 제일 냄새 나지 않는 옷이었다.
양말은 래피드가 모델이었던 따끈포근 수면양말, 신발은 그레이프가 광고했던 러닝화….
편한 추리닝에 양말, 러닝화, 씻지 못한 얼굴...누가 봐도 직업 없는 백수로밖에 안 보이는 모습이다.
옷을 챙겨 입은 뒤에는 그나마 멀쩡한 옷들을 가방에 잘 개서 넣었다.
그레이프의 속옷이 상당히 많다.
아침부터 현관에서 여자 속옷을 정성스럽게 개 가방에 챙겨넣고 있는 사람이라니, 신고당하기에 딱 좋다.
그레이프의 옷 부터 빠르게 정리해 넣은 나는 그레이프가 선물해준 갈색 양 인형을 집어 들었다.
인형은 젖지도, 불에 타지도 않고 멀쩡했다.
운 좋게 이불에 덮여 있기라도 했던 걸까.
다음은 젖은 노트북과 컴퓨터….
노트북이 망가진 건 타격이 크다.
내가 가지고 있는 노트북은 트루비전이 전자제품 시장을 장악한 지금에 와서는 쉽게 구할 수 없는 구시대의 물건이었다.
마진사에 접속하려면 필수적인 물건인데 이렇게 잃게 될 줄이야….
X에게서 얻을 수 있는 정보와 도움이 마진사보다도 훨씬 좋을테지만, 아쉽다.
나는 잡동사니 더미에서 드라이버를 찾아 노트북 뒷면을 열었다.
하드디스크를 꺼낸 나는 젖은 옷가지 중에서 그나마 멀쩡한 것을 찾아 조심스럽게 감쌌다.
컴퓨터는 딱히 분해할 필요가 없다.
트루비전에서 나온 모든 컴퓨터는 계정에 맞춰진 클라우드 서버를 통해 데이터를 보관하고 있어서 컴퓨터가 망가지거나 새로 사더라도 가지고 있는 데이터는 변하지 않는다.
부품은...전부 젖어서 망가져있다.
컴퓨터에서도 마찬가지로 필요한 부품만 떼내어 챙긴 나는 샴푸와 린스같은 샤워 용품들을 챙기다가 보기만 해도 아까운 물건을 발견했다.
그레이프가 사준 영양제가 전부 먹을 수 없게 되어 있다.
약통 표면이 녹고 안에 물이 들어가서 엉망이 되어있다.
...아깝긴 하지만, 이건 버려야겠다.
그래도 먹을만큼 먹고 남은 것들이어서 다행이다.
다음은 프레임이 녹슨 낡은 철제 옷장과 젖은 매트리스….
둘 다 필요 없다.
이 정도면 챙길 건 충분히 챙긴 것 같다.
남은 물건들은 현관 앞에 두기만 해도 관리인이 알아서 해줄 것이다.
원래는 컴퓨터나 철제 가구같은 특수 재활용 대상품은 비전폰으로 연락을 해 수거 드론을 부르게 되어 있지만, 그것도 관리인이 알아서 해 주겠지.
나는 물건이 가득 들어가 크게 부풀게 된 가방을 잘 잠근 뒤, 등에 멨다.
“그럼...가볼까….”
커다란 배낭을 고쳐 멘 나는 오랜만에 익숙한 출근길을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