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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소녀 최면물-277화 (277/299)

< 277화 > 협상 (6)

X가 휴면상태에 들어선 뒤 나는 폐쇄된 연구소 내부를 천천히 살펴봤다.

발전시설은 확실히 파괴되어 있었고, 그 외에 다른 것들도 전부...제대로 부서져 있었다.

발전시설이 파괴되며 구획을 폐쇄하는 프레스기에 무리가 갔는지, 부서지다 만 곳들도 있었던 덕에 파괴 상태를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제야 나는 조금 안심하며 복장이 이상하다는 걸 떠올린 나는 혹시 의상실같은건 없나 싶어 지도를 살펴봤지만, 이미 파괴되어 있었다.

어쩔 수 없이 흰색 가운을 허리에 두른 변태같은 옷차림으로 1층에 도착한 나는 미리 준비되어 있던 자율주행 차량에 탑승했다.

탑승 전, 차량 하부나 본넷, 트렁크...이곳저곳을 열어봤지만 폭탄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차량은 내가 탑승하자마자 알아서 움직이기 시작해, 어딘지 모를 터널로 이동했고, 계속해서 달리다가 어느 순간인가 평범한 차로에 끼어들었다.

문 손잡이를 손에 쥔 채 언제든 뛰어내릴 준비를 하고 있던 나는 창밖에 보이는 익숙한 풍경에 서서히 긴장을 늦췄다.

나는 한숨을 쉬며 눈을 감았다.

“후우….”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오고 나니 점점 마음이 놓인다.

연구소가 파괴되어 있는 것도 확인했고, 나를 제대로 밖으로 내보내주기도 했다.

3일 뒤면 휴면이 끝난다고 했으니까, 연락해보고 정 뭐하면  X가 말한 대로 에스더를 데리고 가면 되는 거고….

일단 이 정도면 X를 믿어줘도 괜찮을 것 같다.

창 밖에 보이는 아침해가 내 몸을 따스하게 졸음으로 이끈다.

끝났다.

지쳤다….

하루...하루 맞지?

며칠은 잠을 자지 못한 것처럼 피곤하다.

하루만에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났다.

리프한테 납치당하고...에스더를 불러서 빠져나오고, 애쉬한테….

나는 손목, 발, 가슴, 눈에서 흐릿한 통증을 느끼며 몸을 움찔 떨었다.

예민해져있던 신경이, 긴장감이 가라앉은 머릿속에 의문만이 남는다.

쏟아지던 잠이 팔이 잘리는 고통에 밀려난다.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상황에 잠시 머릿속에서 미뤄뒀던 의문들이 차례로 떠오른다.

나는 눈을 감은 채 생각에 잠겼다.

혼란스럽기만 한 상황을, 복잡한 머릿속을 조금 정리할 필요가 있다.

...리프가 갑자기 날 찾아온 건, 내가 너무 방심하고 다녔기 때문이다.

나름 조심하고 다닌다고 생각했지만, 흔적은 여기저기에 남았고 리프가 나를 찾아오게 만들었다.

하지만, 내가 최면어플을 사용한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가장 의문인 점은, 최면어플이 대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원래 날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던 리프는 최면어플의 정체를 파악하며 나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최면어플의 정체가 뭐길래 그렇게 되는걸까.

내 최면어플의 정체를 파악하며 날 죽여야만 한다고 생각한 건가, 아니면 최면어플의 정체를 알게 되어 나는 별로 중요하지 않게 되었으니 죽여도 되겠다고 생각한 걸까.

반응을 볼 때, 후자에 가깝다고 본다.

그렇다면...내 필요성이라는 건, 래피드의 머리카락을 지속적으로 얻을 수 있다는 것….

래피드의 머리카락으로 하려던 건 크리스탈 제작...크리스탈...그레이프의 크리스탈 웨폰, X의 본체….

래피드의 머리카락으로 크리스탈을 만들 필요성이 없어져서 나를 죽이려고 한 건가…?

크리스탈로 대체 뭘 하려던 거지….

알 수 없다.

최면어플이 뭔지, 크리스탈이 뭔지, 리프가 뭘 하려던 건지는...리프가 살아나고 나서야 알 수 있는 의문이다.

...리프가 제대로 재생되면 최면어플을 써서 심문해봐야겠다.

리프가 살아난다면 질문을 할 수 있어 좋고, 살아나지 않는다면 위험요소를 확실히 제거할 수 있어서 좋다.

어느쪽이든, 내게는 이득밖에 남지 않는다.

하지만, X도 재생 가능성이 낮다고 했고...일단, 재생하지 않는 쪽으로 생각해두는게 좋으려나.

...리프가 재생하지 못할 경우, 한달 후 X는 자동적으로 삭제된다.

웹셀 제거, 최면 지원, CCTV 기록 제거….

한달만으로 끝내기에는 아까운 서비스다.

지금 내 상황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아 더욱 아깝게 느껴진다.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해도 애쉬에게 래피드와의 관계를 조금이나마 드러내며 애쉬의 경계를 받게 되었으니, 전보다 훨씬 더 은밀해질 필요가 있다.

래피드의 친구란 이유로 죽이지 않은 걸 봐선, 말로는 래피드에게 손대면 죽인다 해도 정말 연인관계가 되면 함부로 하지 못하게 될...아마도, 그렇게...되야만 한다.

...래피드 스스로 나와 연인 관계가 되고싶어해서 사귄거라 하면 이상한 짓을 하진 않겠지.

처음 생각한대로, 래피드와 안전하게 섹스하려면 그것만이 답이다.

X가 지원해주는 한달 안에 래피드와 연인 관계가 될 수 있도록 하는게 좋을 것 같다.

그건 그렇고...애쉬….

대체 뭐였을까.

애쉬는 왜 리프를 죽이러 온 걸까….

리프는 애쉬가 원하는 게 뭔지 알고 있다는 듯이, 자신이 이뤄줄 수 있다는 것처럼 대화를 하려 하고 있었다.

그걸 애쉬는 제대로 들어주지도 않고 죽여버렸다.

들을 가치도 없는, 확실하게 적대한다는게 느껴지는 무자비하고 냉정한 공격이었다.

리프한테 뭔가 당한적이 있나?

그 후, 래피드와의 관계도, 최면어플에 대해서도 모르는데...날 죽이려 했다.

내 왼손의 촉수를 보고 실험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내 촉수를 크게 신경쓰는 것 같지는 않았다.

실험체라는 건 리프가 사람에게 촉수를 심는 실험을 했다는 거겠지…?

리프를 죽인 건 그러면 그런 실험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인가?

만약 그렇다면, 나를 실험체라고 생각해서 죽이려고 한 게 된다.

실험체가 뭔지 모르지만...애쉬는 네거티브를 끔찍하게 싫어한다고 하니까...사람의 몸에 괴수가 심어져 있으면, 죽일수도 있나….

애쉬는 마법소녀, 네거티브와 싸우고 있으니까...괴수교 사람들이나 좋아할만한 인간과 네거티브의 합성 실험을 하는 과학자는...죽이는게...당연한가….

하지만, 그러면 왜 다른 마법소녀들도 죽이고 다닌걸까?

에스더...애쉬는 리프 뿐만이 아닌 다른 마법소녀도 자신이 죽였다고 대답했다.

러스티, 마리아...파라웰과 키린은 몰라도, 러스티는 최상위권, 마리아는 최상위권이 될지도 모른다고 평가받던 유명한 마법소녀들이다.

러스티는 금속을 다루는 철의 마법소녀, 마리아는 부식...둘 사이에 접점은 딱히 없다.

둘 다 인기도 있었고, 실적도 좋은 마법소녀였다.

애쉬가 뭔가 의도를 가지고 마법소녀들을 몰래 죽이고 있다면, 나를 죽이려고 한 이유는 마법소녀를 죽이는 모습을 들켰기 때문인 것이 된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대체 뭘까.

...모르겠다.

애쉬랑 가까이 있었을 에스더도 모르는 걸 내가 이렇게 혼자 생각하는 걸로 알 수 있을 리 없지.

래피드도 애쉬가 뭘 하고 다니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괜히 알아보려 하다가 애쉬를 자극하지 말고, 필요한 것만 생각하자.

내 목표는 애쉬가 뒤에서 뭘 하는지를 알아보는게 아니라, 래피드와 섹스하는 것이다.

애쉬 몰래 래피드의 남자친구가 된다.

이걸로 충분하다.

애쉬의 입장에서 보면 래피드의 성장을 늦출 걸 알면서도 섹스하려는 나는 네거티브와 다를 게 없다.

아니, 4급 네거티브라고 하니 네거티브가 맞다.

리프가 날 죽이려 들면 에스더가 어떻게든 해줄 수 있지만, 애쉬는 그레이프와 에스더를 같이 데려와도 안된다.

들키지 않게 조심하는 수밖에 없다.

X의 지원을 받아서 빠르게, 조심히 최면을 걸자.

래피드와 섹스하는 것만 생각하자.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생각을 마친 순간, 자율주행 차가 내가 사는 원룸 아파트 근처에 정지했다.

혼란스럽기만 했던 머릿속을 정리한 나는 한층 가벼워진 마음으로 차에서 내렸다.

자율주행 차는 내가 내리자마자 마치 더는 보고싶지 않다는 것처럼 빠르게 사라져 버렸다.

나는 출근길을 걷는 사람들 사이에서 혼자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며 집으로 돌아갔다.

상체를 노출하고, 허리에 가운을 두르고 있어서 그런지 주변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진다.

시선을 무시하고 당당하게 걸어가자 주변 사람들로부터 짜증 섞인 말소리가 들려왔다.

“하아아...하필 출근 전에 이게 뭐야…어우, 졸려.”

“화재 경보 진짜 시끄럽네….”

“어, 여보...응, 알았어, 합선 안 되는 멀티탭 오늘 사갈게...응, 오늘 집 가면 같이 청소해...그래, 알았으니까 마저 자….”

아무래도 아파트 어딘가에서 화재가 일어난 것 같았다.

새벽동안 생긴 화재로 경보가 울리며 주민 전체가 잠에서 일찍 깼는지, 불만스러운 목소리가 여기저기에서 새어 나오고 있었다.

요즘 시대에 화재...심지어 새벽에 화재라니.

인덕션을 키고 잔 멍청이일까, 아니...합선 화재, 멀티탭 얘기가 나온 걸 보면 멀티탭에 먼지가 쌓일 정도로 청소를 안 한 게으름뱅이인가.

누군지 몰라도 이웃한테 민폐를 많이 끼치는 사람이다.

분명 옷도 제대로 입지 않을 정도로 게으른 사람이겠지.

“…허?”

그런 생각을 하며 현관 앞에 도착한 나는 눈 앞에 드러난 광경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안락한 공간이어야 할 내 집 앞에는 물에 젖은 내 물건들이 내놓아져 있었고, 현관문에는 집주인이 적어놓고 간 것으로 보이는 퇴거조치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안내문에 추가로 붙어있는 쪽지엔 화재발생, 건물 내부의 파손, 밀린 월세에 대한 문제들과 계약서상에 강제 퇴거 및 보증금 환불 불가에 규정에 관한 내용이 인쇄되어 있었다.

“엥?”

다른 집을 부수고 왔더니, 내 집이 없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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