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6화 > 협상 (5)
[도망치지 않았습니다.]
고철 덩어리를 들어올린 나는 옆에서 들린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손가락 정도의 굵기로 된 전선들이 수도 없이 많이 연결되어있는 투명한 크리스탈과 사람의 안구처럼 생긴 무언가로 이루어진 덩어리가 있었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하는 걸까 싶은 기괴한 기분 나쁘게 귀를 긁어대는 기계음을 냈다.
[통신에 사용하는 전력도 아까워 접속을 끊었을 뿐입니다.]
“...X?”
[맞습니다.]
스파게티에 눈이 달린 것처럼 생긴 X는 크리스탈 덩어리를 깜빡거리며 대답했다.
에스더가 부순 몸 안에 들어있었던 크리스탈인가?
통신이라고 한 걸 봐서 아무래도 이게 X의 본체인 것 같다.
[당신의 행동은 비이성적이나, 비논리적이지는 않습니다. 이해 범주 안에 있습니다.]
“응?”
[당신에게 위험을 가한 리프가 다시 살아난다는 말을 들었으니, 애쉬에게 공격당한 직후인 당신으로서는 안전에 과민반응 할 수밖에 없습니다. 시간이 충분했다면 천천히 이해시킬 만큼의 설명과 설득을 더했겠지만, 제게는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당신의 행동은 저의 실수에 의해 발생했습니다.]
본래 모습을 드러낸 X는 내가 연구소를 파괴한 것이 자신이 말을 잘못해서 그렇다고 말하며 내게 사과했다.
[당신의 말대로 저는 리프의 명령이라고는 하나 당신의 목숨을 노렸습니다. 이 시설은 리프의 소유, 애쉬에게 공격당해 긴장된 정신, 복수심, 4급 네거티브 특유의 파괴충동, 쾌감. 충분히 가능한 행동이었습니다. 만약 리프가 깨어난다면 당신의 의도대로 상당한 분노를 느낄 것입니다.]
X의 말대로 나는 리프가 화가 났으면 해서, 복수심에 연구소를 파괴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고 할 수도 있지만, 나는 그런 일을 당하고 참고 넘어갈 정도로 착하고, 인내심이 많은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정도가 지나쳤습니다.]
“응?”
X가 말하는 것과 동시에, 리프를 내려놓으며 대충 던져놨던 태블릿의 화면이 켜졌다.
나는 바닥에서 태블릿을 주워들었다.
화면에는 연구소의 파괴 상황과 손실된 자원을 나타내는 그래프가 한 눈에 알아보기 좋게 그려져 있었다.
[당신의 무차별적인 파괴행위로 인해 전체 자원의 70%가 소실되었습니다. 당신에게 필요한 것만 말하더라도 백신 칵테일 제작시간은 800%상승, 리프의 재생 가능성은 20%에서 3%로 하락, 소모시간은 최종적으로 1200% 상승했습니다. 기지 완전 복구에 걸리는 시간은 최소 5000% 상승으로 추측되며, 파괴된 자료로 인해 열람 가능한 자료는 50%로 줄었습니다.]
“뭐?”
[메인 전력실이 전부 파괴되어 저는 앞으로 20분 뒤 강제 휴면 상태에 돌입합니다. 비상 엘리베이터의 전력 또한 낭비할 수 없어 차단해 두었습니다. 1층까지 직접, 걸어 올라가 주시기 바랍니다.]
“아니, 잠깐…?”
X는 당황한 내게 귀에 거슬리는 날카로운 기계음을 내며 말했다.
[이것은 새로운 관리자인 당신에게 드리는 충고입니다. 생각을 좀 하고 행동하시기 바랍니다.]
“이, 이게 건방지게….”
[당신에 대한 모욕이 아닙니다. 충동장애, 지능저하, 사고 단순화. 4급 네거티브이니 그럴 수 있습니다. 저를 못 믿으시는 것도 이해합니다. 신중하다는 건 장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좀 더 침착했어야 합니다.]
X는 내게 보라는 듯이 태블릿 화면의 피해 목록들을 빨갛게 빛냈다.
[결과적으로 어찌 됐습니까? 이득을 본 게 있으십니까? 자신이 요구한 거래 품목을 자기 손으로 파괴해, 자기 자신에게 피해를 주지 않았습니까?]
“큭….”
[제 말대로 X를 누르셨다면 연구소를 파괴하는것이 아니어도 저에 대한 신뢰를 얻을 수 있게 해드렸을 겁니다.]
X의 말 중에 틀린 말은 없었다.
거래 받아야 할 물건을 내가 내 손으로 부쉈다는 말은 질책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확실히, 조금 침착하거나 냉정하게, 이성적으로 생각했다면 연구소를 이렇게까지 부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할 말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나는 연구소를 부숴서 관리자 권한에 대해 신뢰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데.”
[한 곳만 부수고 그 말을 했다면 설득력이 더욱 높았을 것입니다. 이후의 파괴는 충동적 쾌락에 의한 것이 아니었습니까?]
“아니, 정말 이게 내게 관리자 권한을 준 게 맞다면 너와 리프가 절대로 허가하지 않을만한 것도 가능하겠지에 대한 확인인데?”
[정말 그렇습니까?]
“네가 뭔 짓을 하건, 그게 네가 연기하는건지 아닌지 어떻게 믿어? 거짓말로 따르는 척 할 수도 있잖아? 이 정도는 해야 조금 믿어줄만 하지.”
[...이해했습니다. 자존심이 강하며 타인에 대한 신뢰가 심각할 정도로 부족하군요.]
“신중하다고 해주지 그래?”
오히려 조금 전까지 날 죽이려고 한 사람이 거래하자고 하는걸 좋습니다 하고 받아들이고, 이걸 하면 제게 복수할 수 있으니 제발 누르지 말아주십쇼 하는걸 안 누르는게 이상하다.
그런 걸 좋다고 받아주고, 알겠다고 안 누르는 건 착한게 아니다.
지능 낮은 멍청이, 호구나 그러겠지.
[하지만, 그렇다 해서 당신의 행동이 과했다는 사실이 사라지는 건 아닙니다. 업보라는 말을 아십니까?]
“업보?”
[업보는 자신이 저지른 행동이 그대로 돌아온다는 뜻의 단어입니다. 타인의 집을 망가뜨리면 자신의 집이, 타인의 팔을 부러뜨리면 자신의 팔이....]
“누가 그걸 모르는 줄 알아? 먼저 날 죽이려 한게 누구였더라? 그 단어를 네가 말하는게 정말 맞다고 생각하는 거야?”
[...긍정합니다. 이 발언은 저의 실수였군요.]
나는 X에게 두번째 승리를 거뒀다.
하지만 이번 승리도 그렇게 기분 좋지는 않았다.
내가 나를 도와줄 컴퓨터를 얻은건지, 나를 귀찮게 할 잔소리 기계를 얻은건지 모르겠다.
“후...그래서, 웹셀 제거는 안된다?”
[시설을 파괴하지 않으셨다면, 지금 즉시 당신의 몸에 축적된 웹셀을 정확하게 측정해 약품 제조에 들어갔을 것입니다. 웹셀 파괴란 당신에 체내에 생긴 장기 하나를 파괴하는 것으로, 신체 특징과 웹셀 크기, 종류, 형태에 따라 약의 성분, 용량을 다르게 합니다. 즉각 제조하는건 불가능합니다.]
“...얼마나 걸리는데.”
[소모기간은 최대 2일 이었으며, 현재는 16일이 걸릴 것으로 추정됩니다.]
2일이 16일이 되어버렸다.
나는 누구를 탓할 수 없는 상황에 내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나는 이게 다 나 때문이라고 말하는 듯한 X의 날카로운 말투에 괜히 시선을 피했다.
“...지금 나한테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그 말은 틀렸습니다. 이미 저는 당신에게 관리자 권한을 부여했으며, 최상층에 자율주행 차를 대기 시켜놓았습니다. 당신의 거처로 향하는 네비게이션 설정을 마쳐뒀으니, 탑승 즉시 비밀통로를 거쳐 안전하게 데려다 줄 것입니다.]
“나한테 볼일 다 봤으니까 나가라?”
[피해망상입니다.]
아무리 봐도 나랑 더 대화하기 싫으니 꺼지라는 걸로밖에는 안 보인다.
이게 정말 내 피해망상일까?
나가면 들여보내주지 않으려고 이러는 건 아닐까?
[나가신다고 해서 안 들여보내거나, 연락을 무시하거나 하지 않습니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예측한 의문을 미리 말씀드리는 겁니다.]
X가 한 말과 완전히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연락처는 태블릿에 적어뒀으며, 최면과 그 외의 자료 열람은 태블릿으로 언제든 가능합니다. 조언과 설명이 필요하실 경우 연락해주신다면 언제든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또한, 만약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언제든 에스더를 호출해 기지를 파괴하시면 됩니다. 기지 위치는 에스더가 파악하고 있을 것입니다. 도구 또한, 완성 즉시 연락드려 넘겨드리도록 하겠습니다.]
X는 이어서 내가 가질만한 의문들도 미리 파악해둔 것처럼 자기가 스스로 꺼내고, 대답을 끝내버렸다.
유능해 보이기도 하지만 기분나쁘기도 한 대화방식이다.
[또한, 이 모든 도움은 지금부터 72시간 뒤부터 가능합니다.]
“잠깐만, 그건 왜?”
[발전시설이 파괴됨에 따라, 필요 전력을 당분간 최소화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제 가동에는 많은 전력이 들어갑니다.]
“아.”
[현재, 휴면까지 30초 남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런 말을 했었지.
나랑 더 대화할 시간같은거 없으니 얼른 나가라는 태도로밖에 안 보인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정말로 대화할 시간이 없는 거였다.
나는 조금 갑작스럽다고 생각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상황에 고개를 끄덕였다.
[전력이 부족해 휴면상태에 들어갑니다.]
잠시 후, 크리스탈에서 빛을 꺼뜨린 X는 완전히 침묵했다.
...지금 여기에서 할 수 있는 건 없다.
조용해진 X를 바라보던 나는 X가 말한대로 움직이지 않는 에스컬레이터를 걸어 올라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