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5화 > 협상 (4)
[이건 잘못된 행동입니다 신중하지 못하게 지금 파괴하시는 것은 잘못된 해서는 안되는 구역을 파괴 당신은 선택을 잘못한….]
“어?”
당황한 X의 목소리와 함께 큰 진동이 느껴진다.
쿠구구구궁 하는 낮은 소리와 함께, 뭔가가 우그러지는 소리가 들린다.
압축되고 있는 구역은 내가 있는 곳의 바로 앞방, 지도를 다시 살펴보니 약품보관실 1 이라 적혀있는 장소였다.
내가 있는 장소인 자료보관실에서 밖으로 나가 보자, 어두운 공간에서 뭔가가 터지고 우그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바로 앞의 방에서, 문 너머로 뭔가가 일어나고 있다.
소름끼치는 소리는 잠시 후 푸슉 하는 소리와 함께 완전히 정지했다.
[...조금전 당신의 선택으로 약품 30%가 소실되었습니다.]
“응? 어, 그래?”
[핵심 약품이 소실됨에 따라 리프의 육체 재생에 걸리는 시간이 1000% 이상 증가했습니다.]
“어...아, 응.”
[만족하셨습니까?]
“음….”
뭔지 모르겠지만 X의 말만 들어보면 내가 엄청난 짓을 저지른 것 같다.
그건 그렇고...진짜로 이걸 누르면 파괴되는 걸까?
약품보관실 1의 문 앞에 다가간 나는 내부의 상태가 궁금해 문을 열려고 해봤지만, 기계로 된 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폐쇄된 공간은 안전상의 이유로 한 달 이상 개방되지 않습니다. 해당 장치는 불가피한 상황에 처했을때만 사용하는, 최후의 수단입니다.]
“불가피한 상황은 뭔데?”
[실험체의 폭주, 자료 삭제...실제 작동이 되는지를 확인하고 싶으신 거라면 제게 물어보신 뒤 작동시켜주시기 바랍니다. 폐쇄해도 문제 없는 구획을….]
“오…그렇구나.”
나는 X의 말을 들으며 주변을 둘러보다가 아마도 물건을 옮길때 쓰는 것으로 보이는 끌차를 발견했다.
나는 다시 자료보관실로 들어가 리프의 시체를 조심히 들었다.
너덜너덜한 시체를 다치지 않게 든다는 건 생각보다 훨씬 힘든 작업이었다.
[거래에 응해주시는 겁니까?]
“잠깐만, 좀 보고.”
[리프를 끌차에 올리는 건 좋지 못한 선택입니다. 미약한 진동에 의한 피해가 생존 가능성을 크게 낮출 수 있습니다. 지도를 확인하시며 측면의 비상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신다면 권한을 부여해 바로 제조실로 내려가실 수 있도록….]
X의 말을 무시하고 피가 떨어지는 시체를 끌차에 올린 나는 X의 눈앞에서 태블릿을 조작해 자료보관실을 폐쇄했다.
자료보관실의 문은 이미 에스더와 애쉬에 의해 망가져 있는 상태다.
이렇게 하면 정말로 약품보관실 1의 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건지 볼 수 있을 것이다.
“오….”
망가진 문이 푸슉, 푸슉 소리를 내며 오작동하더니 천장과 바닥이 내려오고 올라오며 방 하나를 그대로 압축하기 시작한다.
물건을 뒤집어 수납하거나, 숨기는 것도 없다.
한 구획이 정말로 쓰레기가 된 것처럼 그대로 사라진다.
우득우득 하고 부서지는 책장, 태블릿, 컴퓨터...모니터….
방 안의 조명이 깜빡거리고, 깨지고, 터진다.
마지막으로 남은 건 중앙에 가로로 선이 그어진 단단한 철벽 뿐이었다.
“진짜로 폐쇄하네.”
[만족하셨습니까?]
“으으음….”
[만족하셨습니까?]
만족이라...만족...음….
지원 뿐만 아니라 기지의 제어권까지, 관리자 권한을 준 건...진짜 관리자 권한을 준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구획 두 개를 박살내게 해줬으니까….
만족할까…?
나를 죽이려 한 녀석의 소중한 연구소를 부수는 쾌감...이 정도로 끝낼 수는 없다.
리프의 부활 시간을 늦출수록 내가 임시 관리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시간은 늘어나게 된다.
충동적으로 봐도, 이성적으로 봐도 이 연구소는 더 부수는게 이득이다.
나는 리프가 깨어났을 때 절규하는 모습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손을 풀었다.
어디부터 어디까지 부수면 좋을까.
끝을 모르는 가학심이 피어오른다.
“절대 부수면 안 되는 구획은 어디야?”
[...심층부는 전부 안됩니다.]
“심층부라….”
X가 말한 심층부에는 메인 제조실과 메인 컴퓨터실, 데이터 및 서버실, 특수물품 보관실, 특수자재 보관실, 발전기실이 있었다.
나는 심층부와 약품보관실을 제외한 모든 구획을 폐쇄시켰다.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주변이 크게 울리며, 이런저런 것들이 박살나는 소리가 난다.
[지금의 선택으로...아닙니다. 만족...하셨습니까?]
“음….”
[리프를 옮겨 주시기 바랍니다.]
이정도면 그래도 만족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관리자 권한이 제대로 작동한다는 것도 확인했고, 작동하지 않았어도 이렇게 많은 걸 파괴하게 시킨 건 나름의 복수가 된다.
나는 한층 쾌적해진 마음으로 X에게 질문했다.
“더 없어?”
구획을 부수며 관리자 권한을 확인할 겸 잠시 스트레스를 푼 건 푼 거고, 거래는 거래다.
받을 수 있는 건 전부 받는다.
내 말에 잠시 침묵하던 X는 묘하게 끊기는 기계음으로 말했다.
[D설정에서 밖으로 나가, X를 눌러주시기 바랍니다.]
“이거?”
[맞습니다. 최하단에 붉은색의 X버튼이 보이십니까?]
“응, 이거?”
[누르시면 저를 삭제하실 수 있습니다.]
“어….”
나는 갑자기 자신의 자살 버튼을 알려주는 X에게 할 말을 잃었다.
그러니까, 이건...더 줄 거 없으니까 안 들어줄거면 그냥 죽이라는 소리다.
정말로 더는 줄 게 없는 것 같다.
“에이...왜그래? 리프 죽게 내버려 두려고?”
[당신의 행동으로 리프의 생존률은 20%에서 10%이하로 내려갔으며, 현재도 계속해서 하락중입니다.]
“리프 죽는다고 너도 죽을거야?”
[리프 본체의 사망 후 24시간 내에 조치를 취하지 않을 시, 저는 자동으로 제거됩니다. 또한, 한달 내에 생체 반응이 없을 시에도 자동으로 제거됩니다. 재생에 필요한 약품과 자제는 조금 전 소실되었습니다.]
“음….”
내가 파괴하려는 구역에 그런 중요한 것들이 있으면 미리 말을 해줬어야지.
심층부만 아니라면 부숴도 된다고 한 건 X다.
아니, 심층부만큼은 절대 부수지 말라고 한 거였지만, 어쨌든 부수지 말라는 말은 안 했다.
나는 조금 당황하며 시선을 피하고, 리프를 실은 끌차의 손잡이를 잡았다.
더는 내줄 것도 없는 것 같고...나도 될 수 있으면 X가 나를 도와주는게 좋긴 하다.
CCTV 기록같은걸 지워주는 것도 좋고, 이 정도면 충분히 얻을 걸 얻은 좋은 거래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알았어, 알았어...거래 할게.”
X는 내가 거래를 하겠다는 말에도 전혀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아무 말 없는 X를 뒤로하고 태블릿에 띄워진 지도에서 비상 엘리베이터를 찾았다.
이걸로 심층부로 오면 된다고 했고, 제조실로 내려갈 수 있게 해준댔으니까...일단 엘리베이터를 타면 될 것 같다.
“뭐해? 안와?”
내가 재촉하자 X는 그제야 기계 몸을 움직이며 나를 따라왔다.
어두운 복도가 이상할 정도로 서늘하다.
나는 추위에 오싹함을 느끼며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해, 탑승했다.
# # #
X와 함께 아무 말 없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간 나는 심층부, 제조실에 도착해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제조실은 내 생각보다도 훨씬 깊은 곳에 있었으며, 내가 리프와 X에게 붙잡혀 있었던 실험실과는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수술실 같았던 곳과 달리 이곳은 주변에 커다란 파이프와 전선들이 너저분하게 널브러져있었고, 컨베이어 벨트와 여러 기계팔들이 이리저리 비틀려 움직이고 있었다.
[...캡슐에 넣어 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X의 지시에 따라 리프의 시체를 안아들어 한쪽 벽 구석에 설치되어있는 원통형의 침대 같은 것에 리프를 눕혔다.
그러자 곧바로 강화유리같은 것이 옆에서부터 올라와 침대를 감쌌고, 캡슐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형태가 되었다.
이어서 캡슐에 이어져 있던 여러 관들이 진동하며 캡슐 안을 연한 녹색의 액체로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이걸로 몸이 재생되는거야?”
[원래는 그렇습니다.]
“원래는?”
[마법소녀의 생명력을 자극, 자체적인 재생능력을 한계로 끌어올리는 장치이기 때문에, 정신적, 육체적, 마법적으로 완전히 죽었다면 반응하지 않습니다.]
캡슐은 빠른 속도로 연녹색의 액체를 채우고, 부르르 떨며 진동해 리프의 몸에서 지저분한 것들을 떼어냈다.
이후 액체를 빼낸 뒤, 다시 푸른색의 액체를 채우고, 다시 빼내지고, 마지막으로 붉은 액체를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식기세척기의 내부를 보고 있는 것 같다.
붉은 액체가 가득 채워지자 리프의 상처가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머리, 심장, 배 아래쪽이 거품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나는 누가 봐도 뭔가 반응하고 있다고 밖에는 할 수 없는 모습에 캡슐을 가리키며 X에게 말했다.
“안 늦었나 보네! 잘 재생하잖아!”
[현재 진행되고 있는 것은 재생이 아닌 소독, 자극입니다. 재생이 완료된다면 거품이 사라집니다.]
“아, 그래.”
어쨌든 재생이 되고 있다는 거 아닌가?
일단 해줄 걸 다 해준 나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벽면에서 망치를 찾아 들고왔다.
그대로 캡슐 위에 앉은 나는 언제든 망치로 캡슐을 내리쳐 망가뜨릴 준비를 했다.
“뭐, 일단 나는 해줄 걸 다 해줬으니까 말야...너도 이제 해줄 걸 해 줘야지?”
X가 리프를 완전히 포기하기 전에 시체를 들고 내려온 나는 어쩔 수 없이 X가 원하는 걸 해 줘버렸다.
나는 값을 치르고, X는 내게 물건을 주지 않은 상태다.
리프를 재생 캡슐에 넣어준다는 거래조건은 이미 달성되었고, 남은 건 X가 내게 해줄 것들 뿐이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해야 하는 건 X를 협박하는 것이었다.
리프가 재생 도중에 죽는걸 보고싶지 않다면 X는 내 요구를 들어줘야만 한다.
X는 그런 내 모습에 힘없이 끊기는 기계음으로 말했다.
[강화...유리입니다.]
“유리가 아니어도 전선같은거 내리치면 망가질 거 아냐? 당장 웹셀인지 뭔지 제거해 주기나 해.”
[그건 불가능합니다.]
“뭐?”
강화유리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망치로 캡슐을 텅, 텅 하고 내리치던 나는 캡슐에 금이 갔는지 살펴보다가 X의 무책임한 말에 시선을 돌렸다.
그때, 카메라와 거미 다리같은 것으로 이루어진 X의 몸이 갑자기 무너져 내렸다.
갑자기 왜 이러나 싶어 캡슐에서 내려온 나는 X에게 다가가 발끝으로 X를 툭툭 쳤다.
“야...야? 야?”
완전히 텅 비어버린 고철덩이가 되어버린 듯 X는 대답하지 않았다.
영혼이 빠져나간 것처럼...접속을 종료한 듯이,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
나는 카메라를 잡아 X였던 것을 한 손으로 잡아 들어올렸다.
“설마...튄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