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2화 > 협상 (1)
“차앗!”
나는 눈 앞에 다가온 게 X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자마자 발차기를 날렸다.
생각하고 한 것이 아닌, 동물적인 반사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철로 된 거미같이 생긴 X는 내 발에 맞아 텅! 하는 소리를 내며 날아가 벽에 부딪쳤다.
“헉…! 헉…!”
이게 기계는 거래하지 않는 듯이 말한 녀석이 할 말인가?
왜 X가, 왜 이런 모습으로 내 앞에 온건지도 모르겠는데...거래라니?
안 그래도 조금 전에 애쉬한테 그런 짓을 당했는데...이번엔 X가 와서 내게 이상한 짓을 하려 든다.
[돌발행동, 이해할 수 없습니다.]
구석에 쓰러진 X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자그마한 기계 몸을 움직여 자리에 일어섰다.
커다란 거미를 보는 것 같아 혐오감이 든다.
발차기를 했지만, X의 몸에는 아무런 상처도 없었다.
아픈 건 내 발이다.
나는 마음속으로 에스더와 그레이프를 부르며 주변을 살폈다.
지금 내 옆에는 에스더도, 그레이프도 없다.
분명 나를 속여 애쉬처럼 고문하려고 다가온게 틀림없다.
나를 공격하려 한다.
하지 않으면 당한다.
“우와아아악!”
나는 바닥에서 부서진 타일을 주워들어 X를 내리쳤다.
타일이 깨지면 노트북 만한 크기의 X를 잡아 던지고, 다시 타일을 주워 내리친다.
깡, 깡 하는 쇳소리와 함께 기계음인데도 당황했다는 게 느껴지는 X의 목소리가 들린다.
[패닉, 진정하시기 바랍니다.]
“주, 죽어! 죽어!”
죽이지 않으면 당한다.
아니, X는 로봇이다.
죽이는 것도 아니다.
전원을 끄지 않으면...전원 버튼 같은 건 보이지 않는다.
전선을 자르고 싶지만, 자를 수 있는게 없다.
나는 X를 잡아 들어 관절 사이의 전선을 양손으로 잡아당겼다.
[진정...진정하시기….]
“죽어!!”
[...진정제 투입.]
“윽?!”
왼손을 찌른 뭔가가 몸속에 지독할 정도로 어지러운 액체를 투입한다.
왼손 안의 촉수가 격렬히 움직이는게 느껴졌지만,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나는 몽롱한 정신 속에서 X가 거미같은 발끝으로 내 손을 찔렀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어….”
[향상성이 비정상적으로 높으니 얼마 가지 않을 건 알고 있습니다. 제 말 들리십니까?]
“어….”
[...반응 확인, 언어 이해 기능은 충분하다 생각하니, 설명하겠습니다.]
나는 멍하니 X를 잡고 앉아 눈을 깜빡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저는 프로토타입 오토마톤을 사용해 당신과 대화하고 있습니다. 멀쩡한 기체는 이것뿐이며, 저는 지금 당신에게도 저항할 수 없는, 무력화 상태입니다. 이해하십니까?]
“어….”
X는 무력화 상태...아무것도 못하는...그 말이 맞다.
X는 에스더한테 완전히...박살났으니까….
눈 앞에 이건 X가 조종하는 오토마톤...그게 뭐지….
[전 당신을 해치지 못합니다. 이해하십니까?]
“어…? 어….”
X는...내 손에 진정제를 놨는데…?
해치지 못하는 건 아니지 않나…?
주사바늘로 공기라도 집어넣었으면 난 그대로 죽는 게 아니었을까?
[당신은 제가 허가하지 않는 한 이 연구소에서 나갈 수 없습니다.]
“어…?”
그런가?
그럴지도 모른다.
아니, 아마도...그렇겠지?
[거래를 하고 싶습니다. 이해하셨습니까?]
“어….”
그래서...거래다.
나를 내보내주는 대신 뭔가를 요구하려 한다.
나는 강제로 진정된 정신을 가지고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리프의 시체를 지하로 가져와주시면 당신을 이 곳에서 내보내드리겠습니다.]
“어?”
[뇌, 심장, 자궁이 모두 있어야만 하며, 떨어뜨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어….”
[시간이 없습니다.]
“...흐음.”
멍한 상태가 서서히 원래대로 돌아온다.
조금 남은 약효가 애쉬에게 고문받으며 예민해져있던 신경을 잡아 누른다.
나는 침착하게 입술을 만지며 X의 말을 생각했다.
시간이 없다…?
시체를 가져가는데 시간이 중요하다고…?
자기 주인이었으니 관이라도 짜 주려는 거면...시간은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리프의 시체로 뭔가 하려고 한다?
“시체는 왜?”
[굳이 알 필요 없는 정보….]
“시체로 뭘 하려고?”
X는 카메라 렌즈를 빛내며 내 얼굴을 줌인했다.
기계지만, 카메라지만...나를 노려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나는 X와 눈을 마주치며 X의 상황을 파악했다.
내게 더 이상 약같은 걸 주입하지 않는 건...주사기로 공기를 집어넣어서 죽이거나 하지 않은 건, 내가 움직일 수 있어야만 하기 때문.
X는 나를 죽이지 못한다.
리프의 시체를 옮겨야 하기 때문이다.
리프의 시체가 필요하지만, 리프를 들고 갈 수는 없다.
거래를 하면서까지 들고 와 달라고 한다는 건 정말로 X는 지금 이 오토마톤을 제외하고는 움직일 수단이 없다는 얘기다.
무력화되어 있다는 건 진실이다.
나는 밖으로 나갈 수 없다...지금은, 나갈 수 없다.
비전폰은 없고, 최면어플이 든 칩만 남아있다.
그레이프도, 래피드도 부를 수 없다.
에스더도 죽었다.
하지만, 에스더는 부활한다.
부활할 때까지 며칠이 걸릴 지 모르지만, 그때까지만 버티면...나는 나갈 수 있다.
내 도움이 필요한 건 X다.
급한 건 X다.
아무 말 없이 나를 노려보던 X는 한숨소리같은 노이즈 소리를 내며 말했다.
[진정제 투약은 실수였던 것 같습니다.]
“시체로 뭘 하려고?”
[그것까지 아실 필요는 없….]
“시체로 뭘 하려고? 말 안해주면 안해.”
[...대답해주지 않으면 고민도 하지 않을 것이라 판단됩니다. 맞습니까?]
“응.”
X는 드득, 드드득 하고 낡은 컴퓨터가 연산할 때 내는 소리를 작게 내더니 리프의 시체쪽으로 카메라를 향하며 대답했다.
[...리프는 마력 고정 마법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지속시간은 1시간, 마력의 소모량을 1시간동안 0으로 만들어, 이후에 몰아서 소비하는 마법입니다. 만약 생명 고정, 정신 고정과 함께 사용했다면, 아직 살아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뭐?”
[그러니, 재생을 위해서 리프를....]
나는 X의 말을 듣고 리프의 시체로 시선을 향했다.
눈, 뇌, 머리는 뻥 뚫려서 아직도 타는 냄새를 내고있고, 지져진 자궁은 구멍이 나 피를 주륵주륵 흘러내고 있다.
심장도, 허리도 마찬가지...너덜너덜하기만 하다.
그런데 저게...살아있는 거라고?
시체를 가져와 달라는 건...회복시키려고?
나는 망설임 없이 바닥의 깨진 타일을 집어 들었다.
[좋지 않은 선택입니다. 지금 그런 행동을 하는 건 지능이 너무 낮습니다. 잘못된 행동을 경고합니다. 당신은 지금 침착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에 심각한 패닉 상태로 판단….]
“이, 이거 놔!”
[멍청한 행동입니다. 당장 정지하시기 바랍니다. 잘못된 선택입니다.]
에스더가 살아있으면 리프를 겁 낼 필요가 없지만, 지금 내 옆에는 아무도 없다.
지금 상황에서 리프가 살아난다는 건 내가 죽는다는 걸 뜻한다.
어쩔 수 없이, 확실히 처리해야 한다.
내 행동의 의미를 알아차린 X는 기계의 몸으로 내게 매달려 다리를 붙잡았다.
거미 같은 다리 관절을 바닥에 박고, 다른 관절로 내 발목을 잡는다.
나는 X를 떨쳐내려 하며 리프의 시체에 타일 조각을 던졌다.
[침착하게 생각해주시기 바랍니다. 당신은 애쉬에게 공격받았습니다. 리프는 애쉬에게 공격받았습니다. 적의 적은 친구란 말도 있습니다. 리프와 당신은 친구입니다.]
“무슨 개소리야!”
[당신은 최면을 사용합니다. 리프도 최면을 사용합니다. 둘은 친구입니다.]
“내가 왜 이 년하고 친구야!”
[현명하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당신은 지금 친구를 죽이려 하고 있습니다.]
“집어쳐! 적의 적이라 해서 반드시 친구인 것도 아니고, 둘 다 날 죽이려 들었잖아! 놔! 저거 죽여버리게!”
X는 프로그래밍을 잘못 한 것처럼 이상한 조건을 계속해서 반복해 말했다.
나는 바닥을 살펴 더 뾰족한 타일이 없나 찾아보다가, X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부서진 타일 같은 것보다 더 단단하고 뾰족한 게 눈 앞에 있었다.
내가 뭘 하려는지 알아차린 X는 다급하게 기계발을 전부 바닥에 박아넣어 버텼다.
나는 X를 잡아 끌어당겼다.
뽑아내면 곧바로 리프의 머리, 가슴, 배에 던져 확실한 시체로 만들어 줄 생각이다.
지금이 최고의 기회다.
지금, 리프를 죽여야 한다.
나는 온 힘을 다해 X를 지면에서 뽑아들었다.
비정상적인 힘이 새어나와 X를 단번에 들어올린 나는 바닥 밑의 전선을 잡아 매달리고 있는 X를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전선이 끊어지고, 머리 위에서 X의 기계음이 들린다.
[미친행동입니다. 당신은 정신이상자입니다.]
“크윽! 누가 정신이상자야!”
[감염율이 높습니다. 네거티브 인자로 인한 가해, 통증마비, 공감능력 상실, 정상적이지 않은 행동입니다. 진정제 앰플이 부족합니다. 자발적으로 진정해주시기 바랍니다.]
“뭐?”
X를 머리 위로 들어올린 나는 X가 기계음으로 말한 단어를 듣고 움직임을 멈췄다.
감염율이라니?
마비...상실?
"그러고 보니 아까도 그런 말을...."
리프가 내 비전폰을 해체할 때에도 비슷한 말을 했었다.
4급 네거티브, 촉수에 기생당한건 정상인이 아니다.
그런데, 4급 네거티브가 뭐지?
[정상적인 사고가 가능하다면 이런 짓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인간적이지 않은 행동입니다. 당신은 아직 완전히 네거티브화 된 것이 아닙니다. 인간성을...당신의 공격성은 정상적인 행동이 아닙니다. 이성적이지 않습니다. 당신은 네거티브입니다.]
"...자세히 말해봐."
가슴께에 들어올려 X를 노려보자, X는 카메라 렌즈를 움직여 내게 초점을 맞췄다.
X는 잠시 연산음을 내더니, 내게 단호하게 말했다.
[당신은 이미 네거티브에게 침식당한 상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