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0화 > 잿더미 (4)
[어? 오, 오늘…? 케이크...먹고 왔잖아?]
“그래…?”
래피드는 애쉬의 질문이 심상치 않다고 생각했는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누가 봐도 당황한게 느껴지는 반응이다.
애쉬는 내 목에 겨눈 검을 조금 움찔거렸다.
“그러고 보니까 말야...래피드, 로맨스 영화 좋아하지?”
[어? 으, 응...그치…?]
“지금 상영중인 영화중에 재미있어 보이는 게 있던데? 사랑할 수 없어서?”
[응?! 응...그게, 왜…?]
“혹시 본 적 있나 해서. 본 적 없으면 같이 보러 갈까?”
래피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애쉬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며 내 입 안에 넣은 발에 무게를 실었다.
앞니가 으득으득 하고 깎여나가며, 오싹한 소리가 머릿속을 긁어내린다.
[아...본 적은 없는데...괜, 찮아!]
“그래?”
[으, 응!]
부자연스럽게 거절하는 래피드의 목소리를 들은 애쉬는 발목을 꺾어 칼날로 내 턱을 조금 베었다.
나는 고통을 느끼면서도 애쉬 몰래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래피드를 추궁해 봤자, 애쉬가 얻을 수 있는 건 없다.
래피드와 나는 평범한 친구 사이가 아니다.
서로 비밀을 공유하고 서로간의 일은 타인에게 절대 말하지 않는 비밀친구다.
아무리 애쉬라고 해도, 래피드로부터 나와 있었던 일을 들을 수는 없다.
하지만, 래피드에게서 얻을 수 있는게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부자연스러운 거짓말, 비밀을 들킬까봐 불안해하는 목소리를 들은 애쉬는 점점 내 말이 사실이라는 걸 느꼈다.
애쉬는 나를 의심해 스스로 의심을 없애게 되는 행동을 해 버렸다.
“래피드…혹시 요즘 고민은 없어?”
[고민? 없...는데?]
“정말 없어? 전혀?”
[어...있기는, 하지만...아, 아냐! 별거 아니야!]
내 생각대로, 래피드는 애쉬에게 나와 있었던 일을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뭔가 있었던 사실은 어렴풋이 드러낸다.
래피드가 내 주장에 신빙성을 더해준다.
“오늘, 혼자서 케이크만 먹은거지?”
[그...그렇지? 그런데, 왜…? 다음에는 같이 갈래…?]
“그래...그렇단 말이지…후후후...아니야, 끊을게.”
[어? 애, 애쉬…? 여보세요?]
애쉬는 래피드에게서 내 말이 전부 옳다는 사실만 확인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비전폰을 허공에 집어넣은 애쉬는 차가운 눈으로 나를 내려다봤다.
나는 살벌한 눈을 마주하고도 이젠 내 말을 믿을수밖에 없을 거라는 생각에 활짝 웃었다.
“뭐하자는 표정이야?”
“커헉!”
그런 내 얼굴에 곧바로 애쉬의 발길질이 날아왔다.
금속으로 된 구두에 부딪친 이가 마저 부러져 피와 함께 튀어 오른다.
나는 내가 래피드의 친구라는 사실을 알고도 멈추지 않는 폭력에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돌렸다.
이 년은 미쳤다.
네거티브인 에스더보다 더욱 네거티브같고, 기계인 X보다 더욱 비인간적이다.
이건 마법소녀가 아니다.
“흐으윽…! 흑…!”
“믿고 싶지 않지만, 네 말이 맞나 보네.”
“아아아악!!”
애쉬는 내 어깨에 검을 꽂아 그대로 들어올렸다.
강제로 몸이 일으켜진 나는 고통에 울부짖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계까지 분노한 애쉬의 얼굴이 눈앞에 보인다.
“그래...래피드랑 친구라고?”
“네, 네에…! 친구...친구, 라고요!”
“후...후후...친구라...이런 건 처음인데….”
“쿠륵?!”
애쉬는 힘의 가감 없이 내 턱을 주먹으로 갈겼다.
턱 밑이 날아가 바닥에 떨어지고, 머리가 어지러워지며 피가 가슴 밑을 적신다.
그 직후, 어깨와 턱의 상처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스트레스 풀이...공감대가 맞는 친구...하지만, 남자라…그래, 남자가 있을 수도 있지....”
“크흑! 헉! 하악!”
발등이 찍혀 칼날에 뚫린다.
두 팔이 악력에 그대로 뭉개져 짓이겨 끊어진다.
바닥에 내던져져 두 다리가 부러진다.
“그런데 말야...래피드가, 나한테 거짓말을 해…?”
“하악…! 학…! 카학…!”
또다시 몸이 원래대로 돌아온 나는 애쉬의 검에 어깨에서부터 다리까지 대각선으로 베였다.
상처에서 뿜여져 나온 피가 눈을 적셔 시야를 붉게 물들인다.
그리고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다.
“래피드가 내게 비밀을 만들어?”
“자...잠깐...왜, 사실...이잖아, 전부…!”
“불쾌해.”
“웁…!”
애쉬의 검이 배에 박혀, 내장을 찢는다.
배를 뚫고 관통상으로 그림을 그리듯이, 뼈를 자르고 상처를 후비며 이리저리 움직인다.
의식이 멀어지고, 원래대로 돌아온다.
“그만...그만…!”
“닥쳐.”
입술을 불의 검에 지져진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게 된 몸을 애쉬가 손으로 관통한다.
심장을 쥐어 터뜨리고, 원래대로 돌아온다.
죽고, 죽고, 또 죽는다.
머릿속이 점점 망가진다.
미칠 것 같다.
“래피드의 고민이 뭐야.”
“하악! 하악! 하악! 하악!”
“말해.”
나는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말해선 안 된다.
이건 함정이다.
애쉬에게 있어 내 가치는 래피드의 고민이라는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고민을 말한 순간, 내 가치는 사라진다.
그 고민의 내용을 알게 된 순간, 나는 죽는다.
“말해.”
“아아아악!”
눈이 터지고, 다시 돌아아온다.
귀가 찢어지고, 다시 돌아온다.
혀가 잘리고, 다시 돌아온다.
“말해.”
나는 순식간에 몇 년은 늙어버린 것 같은 몸을 잘게 떨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애쉬는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전혀 변화가 없어 보이는 덤덤한 목소리 사이로 약간의 감탄이 섞여 들려온다.
“인간 치고는 제법이네.”
“허억, 헉…! 허억…!”
“이 정도로 비밀을 잘 지켜주니 래피드가 비밀을 만들고, 말한 건가….”
애쉬의 폭력이 멈췄다.
무슨 짓을 해도 내가 래피드의 고민을 말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 애쉬는 나를 계속해서 죽이기 위해 붙잡고 있던 손을 놔 주었다.
나는 한계까지 혹사당한 몸과 정신이 뒤흔들리는걸 느끼며 자리에 쓰러졌다.
“스트레스 풀이...공감대가 맞는 친구...하지만, 남자라….”
“크아아아악?!”
애쉬의 발밑에서 콰직, 하는 소리가 난 직후, 한 박자 늦은 오싹한 공포감과 통증과 함께 몸이 원상태로 돌아왔다.
나는 지금까지 했던 것 중에서 가장 잔혹한, 믿을 수 없는 행위에 눈물을 흘리며 두 손으로 다리 사이를 감싸 잡았다.
제대로 달려있다...제대로 돌아 왔다.
“그래...남자가 생길 수 있지….”
“크윽….”
애쉬는 다시 내 머리카락을 손으로 쥐어 들어올렸다.
나는 두 손으로 다리 사이를 쥐고 힘이 풀린 몸을 힘없이 일으켜졌다.
애쉬는 나와 눈을 마주하며 섬뜩한 목소리를 냈다.
“좋아...인정해 줄게, 너...래피드랑 친구가 될 만 하네.”
“윽...으윽….”
“앞으로도 친구로 남길 바래.”
나는 더 이상 대답할 힘도 남지 않아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일 힘도 남아있지 않다.
그런 내게 애쉬는 눈을 마주치며 또다시 마력을 끌어올렸다.
“단델리온 Dandelion.”
애쉬의 머리색처럼 새하얀 마력이 눈송이처럼 변해 내 몸을 감싼다.
성스럽다고 해야 할 광경을 마주한 나는 압도적인 힘에 공포를 느끼며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내 머리에 손을 올린 채 천천히 나를 무릎꿇린 애쉬는 내 머리에 마력을 쏟아부으며 말했다.
[래피드의 몸에 손댄 순간, 손목이 잘리는 고통을 느낀다.]
마력이 문장이 되어 몸 속에 새겨진다.
애쉬의 새하얀 마력이 날카로운 칼날로 변해 손목에 스며든다.
시야가 황금색으로 물든다.
[래피드에게 흥분한 순간, 성기가 으깨지는 고통을 느낀다.]
마력이 몸 속에 가라앉아, 한 곳에 자리잡는다.
작은 폭탄의 파편처럼 날카로운 마력이 아래쪽에 뭉친다.
머릿속에 빛이 번쩍인다.
[래피드에게 두근거린 순간, 심장이 터지는 고통을 느낀다.]
마력이 스며들어, 심장에 고리를 만든다.
애쉬는 계속해서 머리에 올린 손을 통해 커다란 목소리를 내 몸속에 울려 퍼뜨렸다.
얇은 막 같은게 씌워지는 느낌이 든다.
[래피드를 음흉하게 본 순간, 두 눈이 파이는 고통을 느낀다.]
두 눈 안쪽에 예리한 칼날과도 같은 마력이 숨어든다.
나는 애쉬의 얘기를 들을수록 점점 커지는 불안감에 몸을 떨었다.
갑자기 눈 밑이 차갑게 식었다.
[래피드와 친구 이상의 관계가 된 순간, 뱃속을 찢기는 고통을 느낀다.]
뱃속에 자리잡은 마력이 와이어처럼 길게 늘어져 내장을 덮는다.
이대로 비틀린다면 애쉬의 말대로 내장이 전부 찢기는 고통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뱃속이 불에 타는 것처럼 달아오르며, 뱃속에서 얇은 무언가가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 한 순간에 한해, 모든 고통을 한번에 느낀다.]
“윽…!”
나는 찾아올 고통을 예감하고 부들부들 떨리는 온몸을 감싸 안았다.
무슨 마법인지 모르겠지만, 이건 최면과 비슷한 무언가인게 틀림없다.
최면과는 다르지만, 그 과정이 비슷하다.
지금까지 나를 고문하고 고통을 준 이유는 분명 이 마법으로 내 고통을 확실하게 일깨우기 위해서다.
모든 명령이 내게 준 고통을 말하는 것을 볼 때 분명 마법과 연관이 있는 행동이었던 것이 틀림없다.
그런 마법이 맞다면 애쉬의 명령대로...지금 이 순간 내가 겪고 있던 고통이 한번에 찾아올 것이다.
“윽...윽…? 윽…?”
하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왜 하나도 안 아프지…?
뭔가 이상하다.
나는 아무리 몸을 감싸고 있어도 찾아오지 않는 고통에 애쉬를 힐끔거렸다.
아무리 봐도 내가 고통스러워 하는게 당연하다고 믿고 있는 얼굴이다.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던 애쉬의 눈에 의혹의 빛이 감돈다.
“으아아아아악! 아아아악!!”
나는 분명 뭔가 잘못됐다고 생각하면서도 온몸을 비틀며 통증 없는 비명을 질렀다.
뭔지 모르겠지만, 분명 이런 반응을 보이는게 정상이다.
작게 뜬 눈 사이로 그제야 만족스러운 눈빛을 보이는 애쉬의 얼굴을 확인한 나는 온 힘을 다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연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