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8화 > 잿더미 (2)
뒤늦게 찾아온 격통이 상처를 지진다.
수도 없이 많은 집게로 절단면을 잡아 찢는 고통이 타들어가는 살점을 덮친다.
그대로 이성을 잃어버리려는 순간, 왼손의 촉수가 쾌락물질을 분비했다.
몸 속에서 쾌감과 고통이 싸우며, 강제로 진정된다.
그 아슬아슬한 균형감각 속에서 나는 반밖에 남지 않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애쉬는 발작하듯이 떠는 나를 내려다보며 천천히 걸어왔다.
아주 잠깐 사이, 리프와 에스더를 죽이고 나도 죽이려 한다.
아니, 이미 나는 죽은 몸이나 다름 없다.
그런데도 검을 세우고 확실히 죽이기 위해 다가온다.
나는 내게 걸어오는 살인귀에게 공포를 느끼며 손톱으로 바닥을 긁었다.
도망치려 해봤자 소용 없다는걸 알면서도, 도망치고 싶다.
발버둥치며 긁힌 절단면에서 피가 새어 흐르며 머리가 아찔해진다.
“허억…! 허억…!”
힘이 빠진다.
얼마 움직이지 못하고 지쳐버린 나는 바닥에 이마를 대고 멈춰섰다.
갑자기 쏟아져오는 졸음이 의식을 뒤흔든다.
“허억...헉…윽!”
그 순간, 내 바로 옆까지 온 애쉬가 칼날이 세워진 힐로 내 손바닥을 찔렀다.
도망치지 못하게, 관통된 손에서 피가 새어나온다.
등에 천천히...날카로운 칼날이 닿는다.
“처음 보는 실험체네.”
“실험...체…?”
나는 흐려져가는 의식 속에서 실험체라는 단어를 꽉 붙잡았다.
왜...나를 실험체라고 부르지?
최면어플을 가진, 최면술사가 아니라...실험체?
실험체라고 했다.
앵거, 래피드에게 꼬인 벌레, 쓰레기, 개새끼가 아닌...실험체.
칼날이 천천히, 등을 파고든다.
나는 눈물을 흘리며 마지막 희망을 붙잡았다.
제발 내가 최면을 쓴다는 걸 모르기를, 나를 죽이는 것에 특별한 이유가 없기를, 애쉬가 미친 살인귀이기를 바란다.
최면어플과 함께 있던 영상 속, 세간에서 알려진 대로 래피드와 가까운 모습이 진실이기를 기도하며 말했다.
“래...피드….”
등을 파고들어 폐를 찌른 검이 멈춘다.
숨이 목이 아닌 다른 곳으로 새어나가며, 피가 끓는 소리가 난다.
나는 점점 줄어드는 목소리로 힘겹게 말을 이었다.
“래피드...약속...못 지켜서...미안….”
천천히, 등에서 칼이 뽑힌다.
나는 멀어져가는 의식 속에서 제발 애쉬가 내 말을 이상하게 생각해주기를 바랬다.
래피드에게 살려달라고 기도하는게 아닌, 약속을 못 지켜서 미안하다는 말에서 래피드와 내가 서로 아는 사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려주기를 필사적으로 소망했다.
래피드를 불러서, 아는 사이냐고 물어보기를...공간이동으로 불러서….
그렇게 되면...리와인드로, 몸을...상처를 되감아서.
살 수 있다....
의식이 사라진다.
시야가 황금빛으로 물든다.
저 멀리...먼저 죽은 에스더가 보인다.
나는 에스더에게 손을 흔들며 다가갔다.
에스더의 옆에는 내가 있었다.
지금의 나보다 근육질인...커다란 사람이...머리를 붙잡고 뭐라 하고 있다.
어느새인가 에스더도 사라져, 근육질 남자만이 남아있다.
화를 내고 있다는 건 알겠는데...뭐라고 하는건지 잘 들리지 안흔다.
나는 남자에게 좀 더 귀를 기울였다.
[...해!]
뭘 생각하라는 거지?
남자는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답답하다는 듯 아무것도 없는 바닥을 발로 차며 화를 냈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성격이 많이 나쁜 사람 같다.
[안 통한다고!]
“...아도니스 Adonis.”
그리고, 다시 의식이 돌아온다.
나는 흐릿한 생각이 다시 선명해지며 온몸에 느껴지게 된 통증에 숨을 헐떡이며 바닥에 엎드렸다.
팔이, 다리가...허리가 붙어있다.
“헉! 헉…?! 헉…!”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몸을 감싼 나는 끔찍한 감각에 온몸을 웅크렸다.
다행히, 도박이 성공했다.
몸이 돌아왔다.
타들어가며 베어졌던 옷도 멀쩡하고, 핏자국도 사라져있다.
피가 빠져나간 느낌도 전혀 들지 않는다.
이건 치료와는 다르다.
내 몸의 시간을 되돌렸다.
“래...래피드…?”
잠시 몸을 떨며 남아있는 고통과 살아났다는 쾌락에 젖어있던 나는 고개를 들었다.
내 생각대로 애쉬가 래피드를 부른게 틀림 없다.
그런 생각을 하며 주변을 둘러보던 나는 잿더미 위에 서 있는 애쉬와 눈을 마주쳤다.
“너, 뭐야.”
애쉬는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애쉬가 한 한 마디 말에서 내게 필요한 정보를 주워 담았다.
내게 누구냐고 묻는다는 건, 나를 모르고 있다는 얘기다.
래피드의 이름을 부른 나를 살려줬다는 건, 내 생각대로 래피드를 각별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뜻이다.
나를 죽인 이유는...실험체라고 생각했기 때문…?
그렇다면 내가 해야 할 행동은 하나뿐이다.
“저...저는 실험체가 아닙니다. 애쉬 님, 저는…래피드의, 친구인데....”
래피드와의 친분을 강조하고, 실험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리고, 무해한 모습을 보여준다.
나는 공포감에 떨리는 몸을 전혀 숨기지 않고 드러내며 애쉬 앞에 엎드렸다.
애쉬는 내 말을 듣고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하며 내 턱에 검날을 가져다 댔다.
“...친구?”
“읏….”
검으로 내 고개를 들게 한 애쉬가 아무 말 없이 내 얼굴을 내려다본다.
애쉬는 점점 인상을 쓰더니, 내 목에 댄 검의 날을 서서히 없앴다.
목을 베지 않았다.
“너 같이 생긴 애는 처음 보는데.”
“그, 그게! 친해진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이름은?”
“애...앵거입니다.”
마음같아서는 가명이라도 지어내 말하고 싶지만, 몸이 둘로 나뉘어졌던 공포감이 애쉬의 질문에 솔직하게 대답하게 만든다.
애쉬는 내 이름을 듣고 잠시 눈을 감고 있더니, 인상을 쓰며 나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나는 등에서 식은땀을 흘리며 눈동자를 움직여 애쉬의 시선을 피했다.
“처음 듣는 이름인데…?”
“아악?!”
애쉬는 갑자기 바닥에 엎드린 내 팔을 발로 걷어찼다.
칼날에 잘려나간 손목이 순식간에 피를 흘려 손 밑에 웅덩이를 만든다.
하지만 손목이 잘려나간 것보다 심각한 건, 왼손의 촉수가 내 몸에서 떨어졌다는 것이었다.
잘려나간 왼손에서 엄청난 상실감이 느껴진다.
고통을 마비시켜주던 쾌락물질의 공급이 끊겨, 조금 덜해졌던 통증이 빠르게 부풀어 오른다.
애쉬는 내 손목을 자른 뒤 내 머리채를 잡아 끌어올리며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나는 시간낭비를 싫어해.”
“허억…! 허억…! 허억!”
“수작을 부린 거라면 지금 솔직하게 말해, 목을 베어서 죽여줄테니까.”
거짓으로 래피드와 친구가 아니라고 하면 죽고, 친구가 맞다고 솔직하게 말해도 죽는다.
나는 답이 없는 말을 듣고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애쉬는 내게 눈을 마주치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미르라 Myrrha.”
“허억?!”
마력이 보이지 않는 창날처럼 변해 뇌를 뚫고 들어온다.
리프의 최면 펜라이트와는 또 다른 느낌이다.
나는 뇌를 헤집는 고통에 침을 흘리며 발작하듯이 몸을 비틀었다.
“친구라고 다시 말해봐.”
“래피드랑...친구…!”
“다시.”
“친구...입니다…!”
“실험체가 아니라고 말해봐.”
“실험체가...아닙니다…!”
“흠….”
머릿속에 예리한 검을 겨눠진 기분이다.
뾰족한 바늘을 눈 속에 넣어 뇌를 찌르려 하는 듯한 묘한 통증이 머리 안쪽에서 느껴진다.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를 긴장감이 이어진다.
“괴수 융합 시험에 대해서 아는 건?”
“그게...뭐, 뭐죠…?”
“X에 대해서 아는 건?”
“아, 압니다! 리프 박사가 만든, 로봇...입니다!”
나는 애쉬의 질문에 솔직하게 대답했다.
괴수 융합 시험이 뭔지 모르겠지만, X는 잘 안다.
애쉬는 내 대답을 듣고 생각에 잠긴 듯 입술을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렸다.
“두 가지를 한 번에 하는 건 처음인데...왜지?”
“네?”
“...실험체가 아니라고?”
“아, 아닙니다!”
“흐으음….”
애쉬는 내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듯이 아무런 추궁 없이 질문을 계속했다.
긴장감과 함께 머릿속이 점점 차갑게 식는다.
손목에서 피가 멈추지 않고 흘러 나오고 있다.
“...최면에 대해서 아는 건?”
나는 애쉬가 입밖으로꺼낸 단어에 아무 반응 없이 신경을 곤두세웠다.
피가 너무 많이 빠져나간 덕분에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반응하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귀 뒤가 아파올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애쉬가 최면을 알고 있다.
나는 오싹한 감각에 휩싸이면서도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했다.
최면에 대해서 아는 걸 물어봤다.
최면어플을 물어본 게 아니다.
최면을 쓰는 건 나 뿐이 아니다.
리프도 최면을 사용했다.
멍하니 애쉬와 눈을 마주치자, 귀찮고 짜증나는 벌레를 보는 듯한 눈빛이 보인다.
적대감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나를 전혀 경계하지 않는다.
내가 최면어플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안다면, 래피드에게 뭔가를 했다는 사실을 안다면 이럴 리가 없다.
애쉬는, 내가 최면어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나를 모른다.
“...그게, 뭔가...요?”
답을 내린 나는 태연하게 거짓말을 했다.
모른다가 아닌, 뭔지도 모른다는 태도에 애쉬의 눈이 살벌하게 반짝인다.
그와 동시에, 내 머릿속을 수많은 바늘이 찔러 헤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