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4화 > LEAP (3)
내가 보지 못했던 다른 이미지 파일에는 수도 없이 많은 글자들이 적혀있었다.
뭐라고 하기 힘든 언어, 하나로 통일되지 않은 언어들이 뒤섞여 있다.
다음 이미지도, 그 다음 이미지도 동일하다.
“394번, 42페이지...221번 2페이지, 12번 3페이지...4번 5페이지….”
리프는 그 이미지의 암호 같은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읽었다.
작게 중얼거리던 리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를 해체하는 건 이제 관심없다는 듯 새하얀 벽을 향해 걸어간 리프는 벽면에 손바닥을 댔다.
“X! 자율판단! 그 녀석은...일단 대기! 뭔가 하려 하면 대처해!”
[확인.]
치익 소리를 내며 벽이 열리고, 리프가 벽 너머로 사라진다.
X는 리프의 명령에 곧바로 온 몸에서 빛을 깜빡이고는 굳어있던 눈을 깜빡였다.
그 후, 나를 계속해서 뜯어대던 수술대 같은 곳 주변에는 침묵이 찾아왔다.
나는 조용히진 공간에서 X의 시선을 마주하며 조금 전에 있었던 일들을 떠올렸다.
리프가 얘기한 건, 반응들은 전부 이상한 것들 뿐이다.
내 왼손의 촉수 얘기도 이상하지만, 최면어플을 보며 한 얘기는 더 이상하다.
내가 최면이 안 통하는 것도, 재생이 빠르고 독이 잘 안통하는 것도 왼손의 촉수 때문, 촉수가 왜 나를 도와주는건지를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그건 아마도 에스더가 나를 도우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정액량, 정자량이 많아진 건 촉수 때문이 아니라 그레이프가 준 약 덕분에...그러니까, 리프가 내 몸에서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그레이프가 준 약이랑 에스더가 준 촉수가 원인이다.
촉수가 있으니까 4급 네거티브...여기까지는, 무슨 말인지 이해했다.
그런데 내 몸에 있다는 듯이 말한 웹셀이라는 건 대체 뭔지 모르겠다.
촉수의 안테나가 웹셀을 대신한다고 했고...내 웹셀이 활동을 안 한다고 말했으니까…뭔지 모르지만, 촉수가 박혀서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무언가가 내 몸에 흔적으로 남아있다는 얘기인가….
대체 어디에 뭐가 있다는 건지 몰라도, 찝찝하다….
최면어플을 보고 한 얘기도 이상하다.
투명한 데이터 칩을 가지고 크리스탈 칩이라고 하며 놀라는 모습은 내게 래피드의 머리카락을 모아 만들겠다고 한 크리스탈을 떠올리게 했다.
그런 소재가 아니면 최면어플이 불가능하다는 듯이 하는 말도 의문이고, 최면어플이 최면어플이 아니라는 듯이 한 것도 의문이지만, 그 후에 일어난 일이 제일 미스터리하다.
리프는 자신의 노트와 내 데이터 칩 안에 이미지로 남아있는 노트를 몇 번이고 비교해서 봤다.
노트 안을 보지는 못했지만, 같은 노트라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왜 내 최면어플 안의 이미지에 나오는 노트를 리프가 가지고 있지?
가장 앞에 있는, 알아보기 쉬운 글자인 Leap...예전에는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지금은 알겠다.
밑의 내용을 읽을 수 있는 사람, 리프가 읽으라는 의미다.
나는 드러난 정보들을 통해 현재 상황을 추리하기 시작했다.
리프는 최면 펜라이트를 가지고, 내게 최면을 걸 수 있는 마법소녀다.
사용하는 마법은 아마도 온도를 낮추는 마법...최면은 마력을 사용해서 발동시키는, 리프가 만들어낸 발명품이다.
리프는 마법소녀의 마법을 전문으로 연구하는 방위군의 연구원...최면 전문가가 아니다….
마진사에는 최면술사라는 닉네임을 사용하는, 2동 박사, 리프와 친한 유저가 한 명 있다.
리프와 최면술사는 내가 버는 포인트로도 전부 사기 힘들 정도의 긴 최면 관련 대화를 서로 나눠왔다.
즉, 리프가 사용하는 최면 펜라이트는 아마도 최면술사와 얘기해서 알게 된 정보로 만들어낸...말하자면 합작 작품이다.
이런 상황들을 볼 때 낼 수 있는 결론이 한 가지 있다.
리프도 만들지 못하는 수준의 최면을 만들어내려면 리프보다 최면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한다.
즉, 리프에게 최면을 가르쳐 준 스승인 최면술사가...어플의 개발자...또는, 개발자 중의 한명이다.
어쩌면 그 사람이 사람들 모두에게 최면을 건 장본인...아니면, 4번 구역의 그분일지도 모른다.
리프의 말대로 이런 엄청난 어플을 분실한 사람이, 단체가 있다면 나를 찾지 않을 리가 없다.
하지만, 내가 이 어플이 든 데이터 칩을 주울 때 있었던 시체가 최면술사라면...최면술사가 그때 비밀리애 발명한 최면어플을 리프에게 보내주려 하다가 습격당한 거였다면....
“아니야….”
엉망진창이다.
이건 어떻게든...마법소녀 최면어플의 존재를 모르는 리프의 이름이, 리프만 알아볼 수 있는 암호 같은 게 내 데이터 칩 안에 있었다는 현실을 강제로 이해하기 위해서 만들어내는 허술한 가정이다.
리프와 친한 사람이, 리프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리프만 알아볼 수 있는 암호를 쓴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억지로 끼워맞추기 위한 구멍 투성이 뼈대, 말이 안 되는 점이 너무 많다.
아무 마법소녀가 찾아가 최면을 걸어 부하로 만들기만 해도 습격상황에서의 안전은 보장할 수 있다.
마법소녀 최면어플을 개발한 사람이 그렇게 쉽게 죽을 리 없다.
개발자중에 한명이라고 하면, 단체에서 그런 이를 그렇게 쉽게 죽게 둘 리가 없다.
그 시체가 최면술사라면 애초에 살아있을 것으로 생각되는 4번 구역의 그분과 겹치지도 않고, 최면어플이 마법소녀가 아닌 일반인에게 통하지 않는 것도 이상하다.
마법소녀에게 통하는 최면어플도, 일반인에게 통하는 최면 펜라이트도 리프의 말대로 동일한 구조, 형식을 가졌다면...왜 구분되어 있는 걸까.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다.
“후우….”
답이 나오지 않는 의문은 일단 접어둔다.
지금은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미친 싸이코패스 과학자가 자리를 비웠으니, 어떻게든 여기에서 빠져나가야 한다.
나는 아무 말 없이 나를 감시카메라처럼 내려다보고 있는 X와 눈을 마주쳤다.
X는 리프가 사라진 순간부터 자율판단을 하고 있다….
그 자율판단이라는 건...얼마나 자유로운 걸까?
“저...저기...X라고 했지…?”
이 로봇은 인공지능 로봇, 아마도 리프가 직접 개발한 상당한 수준의 인공지능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인공지능의 수준은 어느정도일까….
인공지능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명령만 수행하는게 아니라 정말 사람처럼 행동할 수 있다면...속일 수 있지 않을까?
“미안한데...화장실 좀 갔다 오면 안될까?”
[현재 방광에 있는 소변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등이 차가워서! 그래도 가고 싶어서 그래!”
X는 내 말을 듣자마자 수술대같이 생긴 침대의 구석을 터치해 차가운 철판을 따뜻하게 만들었다.
처음부터 이런 기능이 있는데도 써 주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어서 X는 내 다리 사이로 얼굴을 들이밀며 기계음을 냈다.
[급하신 경우 요청 후 배설해주시기 바랍니다.]
“뭐…?”
[샘플 체취 후 검사, 자체 폐기하겠습니다.]
X는 무표정하고 기계적인 얼굴로 혀를 길게 내밀었다.
나는 내 소변을 받아마시겠다는 얘기를 듣고 안 그래도 생각 없던 욕구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아무리 기계라 해도 인간의 외형을 하고 있는데 입에 싸달라니...좀...그렇다….
“작은 게 아니라...큰거! 진짜 화장실!”
[확인.]
다른 방법을 사용하려하자 X는 또다시 수술대를 조작해 내 엉덩이 밑에 구멍을 만들었다.
대체 무슨 용도인지 모를 구멍에서 서늘한 바람이 느껴진다.
“뭐야...이게?”
[폐기물 보관통에 이어지는 통로입니다. 해부중 발생하는 폐기물 처리에 사용되며, 세척도 바로 가능합니다.]
“아...응….”
[현재 샘플 채취를 위한 통으로 변경되어 있으니 원하실 때 배변해주시기 바랍니다.]
“아...아냐...됐어….”
나는 수술대 밑에 생긴 비데기능이 있는 변기에는 절대 싸고싶지 않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X는 다시 내 뱃속을 스캔하는 것처럼 붉은 빛을 내고는 엉덩이 밑의 구멍을 다시 없애버렸다.
이런 식으로 속이는 건 통하지 않을 것 같다....
이런 식이라면 아프니까 풀어달라고 해도 바로 수술하겠다는 식으로 나오겠지.
이 방법이 안 통한다는 건 잘 알았다.
그리고 행동하는데에 일일히 리프의 허락을 받지 않아도 될 정도의 자율성이 있다는 것과, 샘플 채취 통을 변기로 사용할 정도의 자율적인 판단 능력이 있다는 것도...아주 잘 알았다.
단순히 기계적인 응답만 가능한 수준의 저급한 인공지능은 아니다.
그렇다면...감정은, 욕구는 존재하는 건가?
작전을 변경한 나는 X에게 웃는 얼굴로 말했다.
“X...라고 했나? 이, 이름이 멋있네! 무슨 뜻이야?”
[대 마법소녀 전용병기 시험작 1호기, 제조자에게 실패작으로 판단된 순간 실패라는 의미의 X로 명칭을 정정받았습니다.]
싸늘한 기계임이 더욱 싸늘하게 들린다.
대 마법소녀 전용병기라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거지…?
리프는 누군가에게 쫓기는 듯이 말하고는 했으니까...리프를 쫓는 녀석이 마법소녀고, 그 마법소녀를 상대하기 위한 병기라는...걸까?
그보다...실패작이라는 의미의 X라니, 설마 리프가 이딴 의미로 이름을 지었을 줄은 몰랐다.
이런 말을 해 버리면 이름을 물어본 내가 쓰레기가 되어 버린다.
나는 마음속으로 이게 다 이름을 이렇게 지은 리프 탓이라고, 리프를 인성쓰레기라고 다시 한 번 욕하며 애써 웃는 얼굴을 유지했다.
“아...응…그...렇구나, 너, 너무하네! 실패작이라니! 이렇게 대단한데!”
[대단함의 범위를 좁혀 말해주시기 바랍니다.]
“그...외관도! 예쁘고? 살아있는 것처럼…?”
[외형은 제작자의 외관을 기반으로 제조되었으며, 기계는 살아있지 않습니다.]
딱딱하다….
아무래도 호감을 얻는 건 어려울 것 같다.
기계니까 당연하지만, 감성이나 감정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메마른 말투다.
“사,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말야...아! 그래...뭔가 하고싶은 건 없어?”
[저의 욕구는 현재 인공지능 형성에 필요한 정보 학습을 위해 지적 호기심 충족에 대한 욕구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그에 따라, 현재는 당신의 최면어플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 그거 잘 됐네! 어때…? 그 최면어플의 주인인 나잖아? 나를 풀어주면 좀 보게 해줄게, 어때?”
애써 칭찬한 끝에 원하는 대답을 하나 얻어낸 나는 곧바로 X에게 거래를 시도했다.
X는 나를 풀어주고, 나는 X의 지적 호기심을 채워준다.
최면어플을 잠깐 빌려주면 될 뿐인 좋은 거래다.
“어때? 거래하자고…!”
[비논리적 행위, 기계는 거래에 응하지 않습니다.]
“하고싶다면서? 풀어주기만 하면 하고싶은걸 맘대로....”
[비논리적 행위, 최면어플은 현재 제 손에 있습니다. 당신의 허가는 불필요합니다.]
“크윽…!”
맞는 말이다.
나는 너무도 당연한 말을 듣고 눈을 질끈 감았다.
X의 말대로 내 최면어플은 빼앗긴 상태이니 거래 대상이 될 수 없다.
적당히 속여넘기면 되지 않을까 했는데, 역시 안 된다.
기계 주제에...똑똑하다...아니, 기계니까 당연히 똑똑하겠지….
기계를 설득하는 건 포기한다.
대체 어떡해야 여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X, 대답해.]
[양호.]
고민에 빠져드려는 순간, 천장쪽의 타일 한 곳이 뒤집어지며 스피커가 나왔다.
리프의 목소리를 들은 X는 스피커쪽으로 시선을 돌리지도 않고 대답했다.
그리고 X의 대답을 들은 리프는 내게 좋지 못한 발언을 꺼냈다.
[당장 그 녀석 기억 전부 지워, 전부, 최면어플 주운 순간부터 잊으라고 해. 당장.]
X는 리프의 말을 듣자마자 손끝에서 검은 빛을 번쩍였다.
리프가 들고다니는 최면 펜라이트의 기능이 X에게도 들어있는 것 같다.
하지만, 리프와 X가 사용하는 최면은 내게 통하지 않았다.
[최면 면역.]
[아! 그럼...그래! 그레이프나 다른 마법소녀들은 최면 기능으로 해결하면 되겠지….]
나는 리프의 목소리에서 리프의 관심이 내게서 완전히 멀어졌다는 걸 느꼈다.
귀찮은 걸 대하는 태도, 회사에서 쓰레기통좀 비워달라고 말하던 여직원 같은 말투다.
이어서 잠깐의 침묵 후, 너무도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면 죽여. 사인은...그래, 익사로 하자. 시체는 5번 구역 인공호수, 실수로 산책하다가 발을 헛디뎌서 강에 빠진 걸로.]
[...사살.]
“뭐? 잠...까학…!”
리프의 명령을 들은 X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갑작스럽게 내 입을 막았다.
바닥에서 호스가 올라오고, 물이 내 얼굴에 쏟아진다.
호스의 각도가 변하며 물이 점점 코로 들어와 안쪽을 고통스럽게 한다.
나는 어떻게든 입으로 숨을 쉬려 노력하며 머리를 비틀었다.
곧바로 수술대에서 기계팔이 튀어나와 내 머리를 붙잡는다.
더는 저항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코가 맵다.
아니, 콧속이 아프다.
목으로 물이 역류해, 기침이 나온다.
나는 수술대에 온몸을 부딪치며 버둥거렸다.
왼손의 괴력도, 핏줄이 터지는 감각이 느껴져도 팔이, 다리가 고리에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는다.
진짜로, 죽는다.
“쿡! 훕! 후윽!”
최면어플을 주운 뒤에 있었던 일들이 머릿속에 빠르게 스쳐지나간다.
래피드, 그레이프, 아르나, 로제, 시에나, 루이….
아무도...도와주지 못한다.
물 때문에 숨이 막힌다는 건 생각보다 훨씬 괴로웠다.
결국, 래피드랑 아무것도 못 해보고 이렇게 고문당하다가 죽는구나.
신이 있다면 제발...리프를 죽여줬으면 좋겠다….
숨을 참는 것도 한계에 도달한 순간 물이 안쪽을 찢어내는 것처럼 고통스럽게 들어오며 에스더의 모습이 그려진다.
목 안이 불에 타는 것 같다.
전에도 에스더때문에 이렇게 목이 타는 것 같았던 적이 있었는데...불은 에스더, 에스더는 촉수….
에스더의, 촉수는 도움이 되긴 했지만….
그래도...죽는다.
죽는다….
에스더가 촉수가 아니라...아니, 더 좋은 촉수를 줬더라면….
좀더 전투적인, 치료만 해 주지 말고 뭔가 힘을...마법소녀를 짓이길 힘을….
리프가 말해준 촉수의 기능은 치료, 독액 흡수, 그리고...최면 면역…안테나....
...안테나?
안테나는...상위 네거티브한테 통신…?
내 상위 네거티브는...에스더…?
“쿠헤엑!”
나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희망을 품으며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촉수에 집중하며, 에스더를 떠올린다.
촉수가 에스더에게 연락을 전해주길 바라며, 온 힘을 다해 기원한다.
에스더, 에스더…!
에스더! 나 죽는다고!
에스더의 1번 팬이 죽어요!
[...마력 반응, 위험.]
그 순간, 허공이 검은색으로 찢어졌다.
“...뭐야?”
길고 날카로운 손톱이 찢어진 틈 사이로 뻗어져 나와 금속의 팔을 우그러트리고, 뭉개 찢어낸다.
물에 젖어 망가진 시야가 뜨거운 열기에 말라 정상으로 돌아오며, 흰 실내에 대비되는 검은 공간에서부터 박쥐 날개가 나와 펼쳐진다.
뱀의 눈처럼 날카로운 눈빛, 늠름하게 세워진 뿔 밑으로 불타는 것처럼 흔들리는 붉은 머리가 서서히 드러난다.
“이 새끼가...어딜, 손 대고 있는 거야!”
분노한 에스더가 불의 검을 휘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