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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소녀 최면물-256화 (256/299)

< 256화 > 비밀, 친구 (8)

나는 래피드와 거의 동시에 서로를 불렀다.

먼저 말하라고 하자 래피드도 내게 모아쥔 양손을 내밀며 말할 순서를 양보한다.

잠시 고민한 나는 래피드와의 사이가 틀어지지 않길 바라며 말했다.

“갑자기…그…이번에도…억지로….그래서…미안하다고…하려고….”

“억지로…? 아…! 아뇨…괘, 괜찮아요….”

래피드는 내 사과에 손사래를 치고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수줍어하며, 치켜뜬 눈으로 내 얼굴을 힐끔거린다.

“그, 앵거 씨가…저한테…흐, 흥분할 수 있는건…말해주셔서, 이해하고….”

“네…?”

“앵거 씨한테는…제가, 그게, 야, 야해서…그렇게, 크게, 되는 거니까…오! 오히려! 참아주셔서,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미안해하지 않으셔도…괜찮…은건데….”

…천사?

아니, 래피드의 별명은 천사가 아니다.

성녀인가…?

설마 정말로 이런 걸 해도 괜찮다고 용서할 줄이야….

래피드가 이렇게까지 남자를 잘 받아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이렇게 쉬운건데…이럴 줄 알았으면 저번 같은 위험을 감수해서 래피드한테 최면을 거는 짓은 시도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치만, 앵거 씨도 아시겠지만, 그런거…친구사이에 하면 안 되는 위험한 거니까…..”

“아…아! 그렇죠, 커플이 되기 전에는 안 되죠!”

“마, 맞아요! 그러니까….”

“그래도 래피드랑 저는 친구 이상이니까 괜찮아요! 비밀 친구잖아요!”

래피드와 나는 친구 이상의 관계, 비밀 친구니까 평범한 친구는 해선 안 되는 짓을 해도 괜찮다.

나는 당연한 말을 하며 래피드를 안심시켰다.

그런데 내 논리적인 말을 들은 래피드는 이상한 말을 들었다는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비밀, 친구?”

“비밀…친구죠…?”

“…그, 그렇죠? 비밀…친구…죠? 그쵸…그건….”

어째서인지 래피드는 갑자기 당황한 목소리를 내며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듯한 모습에 나는 래피드를 따라 당황했다.

래피드는 내게 가까이 다가와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저기…앵거 씨…? 호…혹시…여자친구…없으시죠?”

“…태어나서 한 번도 사귀어 본 적이 없는…데요….”

갑자기 왜 이런 인신공격을 하는 거지…래피드가 아니었다면 임신공격으로 돌려줬을 만큼 너무한 언어폭력이다.

래피드니까 참아준다….

래피드의 질문에 솔직하게 대답하자, 래피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상한 말을 중얼거렸다.

“하…하긴…저도 책으로만 봐서 잘 모르고….”

“네?”

“호, 혹시…비밀친구는 저뿐인가요…?”

“네.”

“그러면…!”

래피드는 갑자기 내게 안기듯이 달려들었다.

가슴이 푹신하게 내 몸에 밀착되며 예쁘게 붉어진 얼굴이 나를 올려다본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놀란 내게 래피드는 내 옷깃을 잡아 쥐며 떨리는 목소리를 냈다.

“애, 앵거 씨는 저, 저, 저를…!”

그 순간, 화장실 안에 웅장한 음악이 울려 퍼졌다.

이건…나도 알 만큼 오래되고 유명한 클래식 음악…베토벤의 운명이다.

나는 갑자기 들려온 음악 소리의 근원을 찾으며 시선을 움직였다.

소리가 들려온 곳은 래피드의 바로 옆 공간이다….

말이 이상해 보이지만, 정말로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음악 소리가 한번 끊어졌다가, 처음 위치로 돌아와 다시 재생된다.

그냥 음악이 아니라 비전폰의 벨 소리인 것 같다…그렇다면 이건 래피드의 비전폰인가?

나는 래피드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어째서인지 상기되어 있던 래피드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며, 며, 몇시죠?!”

“어….”

“잠깐…앵거 씨…! 절대 소리 내면 안 돼요?! 조용히…!”

래피드는 공중에 손을 넣어 비전폰을 꺼냈다.

비전폰의 화면에 쓰여져 있는 이름은 애쉬…이건 애쉬의 전화다.

나는 숨을 집어삼키고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뻣뻣하게 굳었다.

“…여보세요?”

[어디야.]

비전폰에서 새어 나오는 기계음으로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날카롭게 날이 선 목소리에 래피드는 허리를 쭉 펴고 바로 서며 침을 꿀꺽 삼켰다.

애쉬의 목소리…듣기만 해도 귀 뒤가 서늘해진다.

혹시 내가 래피드랑 있는 걸 알고 전화한 건 아니겠지….

래피드랑 내가 한 건 섹스가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섹스 직전까지 갔다고는 할 수 있으니 섹스 맛보기…아니, 간접 섹스…아니, 아무튼 섹스가 아니다.

그러니까 애쉬가 나를 죽이러 오지는 않을 텐데, 오지 않아야 한다.

“응?! 바로 가려고! 왜?”

[…그렇게 먹고 싶다던 한정 크림 케이크는 다 먹었어?]

“으, 응! 먹었…어…꿀꺽….”

[그래, 그럼 돌아와.]

“어? 어…지, 지금?”

다행히도 내가 래피드와 한 걸 알게 되어 전화한 건 아닌 모양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게 그리 좋은 전화는 아니었다.

애쉬는 래피드에게 명령하듯 말하고는 한숨을 쉬었다.

[하아…그래, 뭐 좀 봐야 할 게 있으니까 당장 와.]

“봐야 할 거…?”

[나, 자리 비워야 할 것 같으니까 오라고.]

“아! 응! 갈게!”

[급한 일이니까 끊지 말고 지금 당장 공간이동 해.]

애쉬의 말을 들은 래피드는 입술을 깨물며 내게 시선을 향했다.

아쉬움 섞인 시선과 함께 느껴지는 곤란한 표정을 본 나는 래피드가 왜 이러는 건지를 곧바로 알아차렸다.

내게 허락을 받지 않으면 돌아갈 수 없는 최면 때문에 돌아가지 못한다….

전화를 끊지 않고 바로 오라니…공간이동해서 순식간에 나타날 수 있으니까 이런 말도 할 수 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래피드를 조심히 끌어안았다.

반대쪽 귀에 대고 작게 속삭이면 애쉬한테 들리지는 않겠지….

“잘…가요…다음에 봐요….”

“하…하아아….”

갑자기 이렇게 된 게 당황스럽긴 해도 래피드는 내 최면 때문에 오늘 억지로 시간을 낸 거니까…어쩔 수 없다.

돌아가도 좋다고 허락을 받은 래피드는 내 등을 꼭 끌어안았다.

고개를 끄덕이며 하고 싶은 말이 남았다는 듯한 아쉬운 시선으로 내 눈을 바라본다.

[…무슨 소리야?]

“응? 아…아냐, 바로 가려고 집중하느라….”

[흠….]

“갈게!”

래피드는 내게 비전폰의 타자를 치는 시늉을, 손가락과 손가락이 맞부딪치는 움직임을 해 보였다.

돌아가서 문자로 다음에 만날 약속을 잡자는 얘기겠지…?

고개를 끄덕이자 래피드는 곧바로 빛으로 변해 사라졌다.

“하아….”

갑자기 래피드가 0번 구역으로 돌아가며 몸에 기대오던 무게감이 사라진 나는 잠시 비틀거렸다가 바로 섰다.

지금 이 상황이 당황스럽지만…이해는 된다.

나는 화장실 벽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후우우우….”

래피드가 돌아가자마자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한다.

흥분감과 성취감, 안도감이 한꺼번에 찾아와 온몸의 힘이 풀린다.

하루 동안 있었던 일들이 빠르게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래피드는 나한테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나를 싫어하게 되지 않았다….

섹스 직전까지 가도 괜찮다 하고, 정액도 손에 받아줬다.

조심해야 한다…조심해야 하지만, 이건 흥분할 수밖에 없다.

최면에 빠져있지 않은 래피드의 가슴을 만지고, 래피드에게 허리를 흔들고, 래피드의 속옷 위에 자지를 대고, 섹스하는 것처럼 손에 대고 정액을 잔뜩, 가득…!

래피드에게…래피드한테…!

“큿…!”

나는 이를 악물고 소리 없는 환호성을 질렀다.

당장 자리에서 뛰쳐나가 현관을 달리며 래피드랑 섹스 직전까지 갔다고 소리치고 싶지만, 그래선 안 된다.

하지만 역시 이 기쁨을 누리고 싶다!

어떡하면 이 벅차오르는 감정을 바깥으로 표출하며 즐길 수 있을까.

친구라도 있었으면 나도 다른 사람처럼 친구한테 전화해 자랑하거나 할 테지만, 나는 친구가 없다.

그레이프는…이런 걸로 전화하면 안 될 것 같다.

나는 현관문을 박차고 나가 편의점으로 향했다.

이렇게 좋은 일이 있을 때는 역시 튀김에 맥주다.

둘 다 그레이프가 먹지 말라고 한 거지만, 오늘은 먹어야겠다.

사람이 가득한 편의점에 들어간 나는 판매 중인 튀김들을 대충 쓸어 담았다.

오징어튀김, 닭튀김, 새우튀김, 돈까스…맥주도 한가득 바구니에 담아 계산대로 들고 간다.

튀김을 잔뜩 사 온 나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밥상을 펼쳐 큰 접시에 튀김을 늘어놓았다.

“흐흐흐…다 뒤졌다!”

맥주부터 마시고, 닭튀김을 하나 먹는다.

닭튀김과 맥주는 섹스라는 말을 비전넷을 뒤지다가 어딘가에서 들어본 적이 있다.

섹스라고 할 정도는 아니긴 해도 확실히 이건 상당한 쾌감이다….

[똑똑똑]

“응…?”

래피드와의 간접 섹스에 이어 입으로 하는 튀김 섹스를 즐기던 나는 갑자기 들려온 노크 소리에 상체를 쭉 빼 현관 쪽을 바라봤다.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그레이프가 떠오른다.

요즘 내 방에 찾아오는 사람은 그레이프밖에 없다….

하지만 그레이프는 지금 파견 중…일요일까지 파견이니까…아직 D 시에 있을 텐데….

…설마 일요일까지 파견이라는 게, 일요일에 일이 끝난다는 얘기였나?

나는 깜짝 놀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튀김 냄새로 어느 정도 지워지긴 했어도 아직 방 안에는 래피드의 달콤한 냄새가 가득하다.

그레이프의 변태적인 후각이라면 래피드와 섹스 직전까지 갔다는 사실을 알아차릴지도 모른다.

빨리 환기해서 증거를 없애야 한다.

올 거면 연락 좀 하고 오지 왜 이렇게 갑자기…설마, 래피드랑 내가 뭔가 한다는 걸 알아차린 건가?

그레이프니까 어쩌면 내가 모르는 사이 집에 몰래카메라를 설치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제발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섹스하고 싶어서 빨리 달려온 것이기를 빌며 방 안을 이불로 부채질했다.

“그, 그레이프?! 잠깐만! 나 옷 갈아입는 중!”

아주 잠깐만, 냄새를 전부 없애 버릴 동안이면 되니 들어오지 말라고 소리치자 갑자기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고 보니 그레이프는 내 방 열쇠를 가지고 있었지?

이럴 줄 알았으면 주지 말 걸 그랬다.

나는 이렇게 된 이상 일단 창문을 열고 그레이프랑 밖으로 나갔다 와야겠다고 생각하며 현관으로 향했다.

현관문이 느리게, 끼이익 소리와 함께 열려 달빛에 비친 그림자를 드러낸다.

양 갈래 머리와 롤 머리, 흰색과 갈색이 섞인 이상한 머리모양에 마른 몸…흰색 가운…선글라스…?

“어…?”

그레이프가 아니다.

누구지…?

나는 처음 보는 사람이 문 앞에 있는 모습을 보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안녕?”

처음 보는, 처음 듣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나는 멍하니 서 있다가 뒤늦게 이상한 점을 떠올렸다.

…이 사람, 내 방문은 어떻게 연 거지?

“뭐지? 사진 자료랑 좀 다른데…?”

흰 가운을 입은 이상한 여자는 가슴께의 주머니에서 펜을 만지작거리며 꺼내 들었다.

뭔가 필기할 것처럼 펜을 만지며 중얼거린 말에 나는 깜짝 놀라 눈살을 찌푸렸다.

사진 자료라니…나한테 한 말인가?

“모르겠다, 일단 최면부터 걸리세요~”

“뭐?”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여자가 손에 든 펜에서 붉은 플래시가 터져 나왔다.

나는 뭔가 하기도 전에 머릿속이 펑 터지는 걸 느끼며 인상을 썼다.

고통과 함께 여자가 한 말이 귓가에 맴돈다.

최면…?

최면이라고?

나한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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