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9화 > 비밀, 친구 (1)
집에 돌아가고 얼마 되지 않아 래피드에게서 연락이 왔다.
내일 시간 있으면 만나고 싶다는 짧은 메시지 하나.
그게 전부였다.
최면에 의해 강제된 메시지를 보낸 이후, 래피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래피드가 어디에서 만나면 좋을지도 지정해주길 바라며 기다리던 나는 어쩔 수 없이 래피드에게 답장을 보냈다.
약속 장소는 내가 살고있는 곳 바로 근처의 영화관이다.
그 후 아무런 대화 없이, 하루가 지났다.
아침 일찍 나갈 준비를 마친 나는 래피드의 위치만을 확인하다가 래피드가 약속 장소에 나타난 순간 바로 집에서 나갔다.
6번 구역의 영화관은 바로 옆 구역에 더 큰 영화관이 있는 탓에 사람이 많이 오지 않는다.
나는 영화관 앞에 도착해 주변을 둘러보다가 일그러져 보이는 사람에게 다가갔다.
입 안에서 혀를 깨물고, 손톱으로 허리를 꼬집는다.
애쉬한테 죽는 생각, 슬픈 생각, 우울한 생각도 같이 해본다.
자꾸만 올라가려 하는 입꼬리를 애써 억누른다.
“래피드....”
“앗….”
래피드에게 가까이 가 인사한 순간, 일그러진 사람이 래피드의 모습으로 변했다.
래피드는 내가 자신을 곧바로 알아보고 인사하자 당황한 듯 얼굴을 붉혔다.
나는 일부러 조금 안심하는 척 한숨을 쉬었다.
“다행이다...맞네요….”
“아, 안녕...하세요….”
그 인사를 끝으로 래피드는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조용히 래피드의 옷차림을 살펴봤다.
끝부분이 둥글둥글하게 주름진 미니스커트에 가슴골이 보이는 니트...얌전해 보이면서도 야한 옷차림이다.
래피드의 시선도 내 옷차림을 살펴보는게 느껴진다.
나는 오늘도 데이트 할때마다 입은 셔츠와 바지를 입고 나왔다.
기본은 언제나 옳다.
“래피드, 옷이….”
“가, 갈까요…? 영화...시작하겠어요.”
뭔가 대화라도 해야하지 않을까 싶었던 나는 래피드를 칭찬하려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래피드는 나랑 대화하기 힘든 듯 얼굴을 붉히며 다른 말을 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래피드와 함께 영화관으로 들어갔다.
“음료수는….”
“앵거 씨...마시고 싶은 거….”
“팝콘…?”
“네, 네에….”
어색하고 서먹서먹한 커플이 이런 기분일까.
아니면 남자한테 맞은 여자친구가 이럴지도 모르겠다.
래피드는 내가 말을 다 하기도 전에 내 목소리와 몸짓 하나하나에 깜짝깜짝 놀라며 뻣뻣하게 반응했다.
나는 내 시선을 피하는 래피드를 내려다보며 음료수에 빨대를 꽂았다.
이전이었다면 래피드의 이런 반응만 봐도 언제 도망칠 지 몰라 걱정하고 있었겠지만, 지금의 나는 다르다.
래피드에게 함부로 도망치지 못하는 최면을 걸어 둔 나는 물어볼 것들만 물어본 뒤 여유롭게 음료수를 마시며 래피드와 함께 영화 상영실 안으로 들어갔다.
[삐익!]
좌석에 앉아 잠시 기다리자 사람들이 몇 명인가 더 들어오고 상영을 시작하는 알림음이 들렸다.
어두워진 실내에 큰 음향 설비, 커다란 스크린에서 래피드가 나타난다.
대피 경로를 알려주는 방송이다.
[대피 경로를 확인해주세요!]
영상을 보며 래피드 쪽을 보자, 래피드는 부끄러워하며 얼굴을 손으로 가렸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화면을 보며 실제가 훨씬 귀엽다고 은근슬쩍 중얼거렸다.
큰 음향 때문에 내게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 상황이었지만, 마법소녀인 래피드에게는 들렸을 것이다.
영화 배급사 대신 트루 비전의 마크가 스크린에 떠오르고, 영화가 시작된다.
오늘 상영하는 영화는 네거티브가 나타나기 전보다도 훨씬 옛날에 상영되에 인기를 끌었던 고전 로맨스 영화였다.
내용은 크게 관심 없지만, 래피드가 좋아할 것 같아 이 영화로 골랐다.
예상이 맞았는지 내 옆에서 줄곧 긴장하고 있던 래피드는 어느새 영화에 푹 빠져들었다.
멍하니 영화를 바라보며 영화 속에서 슬픈 장면이 나오면 울상이, 기쁜 장면이 나오면 웃는 표정을 짓는다.
나는 소리없이 웃으며 영화를 감상하는 래피드를 감상했다.
서로 사이가 틀어질만한 일이 있은 뒤의 데이트니까 래피드가 재미있어할만한 걸 해 줘야겠다는 생각에 영화관으로 오기로 한 건데, 생각보다 즐겁다.
영화는 뭐가 재미있는지 모르겠지만, 래피드를 보는게 재미있다.
영화에 완전히 몰입해 입을 작게 벌리고 있던 래피드는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고 천천히 손을 움직여 팝콘을 먹었다.
팝콘을 입에 넣은 뒤에도, 입안에서 씹는 소리가 날까봐 주의하며 혀로 눌러 먹는다.
씹고 삼키는 것도 영화 속에서 조용한 장면일때만 하고, 음료수도 대사가 없을 때만 마신다.
래피드가 로맨스 영화를 정말 좋아한다는게 느껴진다.
눈도 평소보다 느리게 깜빡이고, 숨도 느리게 쉰다.
왠지 최면에 걸렸을 때랑 비슷하다.
나는 멍하니 래피드의 손을 따라서 눈동자를 움직였다.
팝콘을 잡고, 손에 들고있다가 입에 넣는다.
다시 팝콘통에 손을 넣고...느리게...소리가 나지 않도록 하나 정도를 집어서...먹는다.
나는 충동적으로 팝콘통에 손을 넣어 래피드와 손을 부딪쳤다.
“햑…?!”
래피드는 내 손이 닿자마자 깜짝 놀라며 팝콘통에서 손을 빼냈다.
불에 덴 것처럼 손을 쥐고, 영화가 아닌 나를 보며 눈을 깜빡인다.
나는 래피드와 눈을 잠시 마주치다가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일부러 손을 가져다 댄 걸 들키진 않았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팝콘통에 손을 넣고 있자, 갑자기 래피드의 손이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손끝이 스치며, 팝콘을 다시 가져간다.
하나뿐인 팝콘통에 손을 넣다 보면 손가락이 스칠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고 신경쓰지 않기로 한 것 같다.
나는 일부러 팝콘통에 손을 넣고 빼지 않으며 계속해서 래피드와 손을 부딪쳤다.
“하아...으….”
내가 일부러 손을 움직이거나 가져다 대지 않아도 래피드의 손이 계속해서 내 손에 부딪친다.
계속해서 손이 닿는데도 팝콘을 먹다니, 래피드는 팝콘도 좋아하는 것 같다.
달콤한 팝콘으로 골랐으니 그럴 만도 하다.
[음...아….]
[오….]
영화에서 농밀하다고 해야할만한 수준의 키스 씬이 나온다.
나는 조금 수위 높은 키스씬을 보자마자 래피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래피드는 얼굴을 붉히고 입술에 팝콘을 가져다 댄 채 눈도 깜빡거리지 않고 화면에 집중하고 있었다.
꼼짝도 하지 않고 얼어붙은 것처럼 키스씬에 푹 빠져 있는 모습이 재미있다.
가만히 래피드를 보며 웃고있자 래피드의 눈이 깜빡거리며 눈동자를 내 쪽으로 향한다.
래피드는 내가 보고있었다는 걸 깨닫고 당황해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시선을 피했다.
그런 모습이 어쩐지 귀여워 계속해서 바라보자 래피드가 천천히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내쪽을 보고 화면을 보기를 반복하며 아주 조금씩, 시간이 지날수록 서서히 나를 바라본다.
결국 나와 마주보게 된 래피드는 아무 말 없이 나를 보며 눈을 적셨다.
“앗…하아....”
래피드와 눈이 마주친 나는 나도 모르게 래피드의 손을 잡았다.
래피드는 손을 움찔거리며 아무것도 하지 않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화면에서는 키스씬이 나오고 있다.
순간적으로 래피드에게 키스해버리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지만, 나는 애써 참으며 래피드의 손을 놓았다.
바보같이 똑같은 실수를 또 반복할 수는 없지….
나는 래피드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아….”
그 후부터 본 영화는 별로 재미 없었다.
앞부분을 안 보고 래피드만 보고있었으니 재미있기도 어려울테지만, 이후 내용이 너무 이상했다.
갑자기 당신 같은 건 정말 싫다고 말하며 안기는 여자나, 당신한테 나는 안 어울린다면서 끌어안는 남자나...분명 영화 포스터에는 감동적인 엔딩이라고 적혀있었는데 왜 이게 감동적인건지 모르겠다….
싫으면 안기지 말지, 안 어울리면 그냥 두고 떠나지...왜 서로 그런 말을 하는 거지?
분명 고전 명작 로맨스라고 들었는데 대체 어떻게 이게 명작 소리를 듣는 걸까?
로맨스는 참 어렵다.
영화가 끝나고, 어두워졌던 상영관에 다시 불이 들어온다.
래피드는 엔딩 크레딧을 보고 있는지 자리에서 멍한 얼굴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는 래피드를 따라 가만히 앉아있었다.
“...재미있었어요?”
“앗, 네, 네….”
나한텐 별로 재미 없었는데, 래피드한테는 역시 재미있었나보다.
나도 영화는 별로였지만, 영화를 좋아하는 래피드를 보는 건 재미있었다.
나는 억지로 즐겁게 본 척을 하려고 웃으며 결말 얘기를 꺼냈다.
“결말 부분이 감동적이었죠?”
“네?! 아, 네…! 어...어떤 점이요?”
“음...남자가 자기한테는 안 어울린다면서 끌어안고, 여자가 당신이 정말 싫다고 하는 점이…?”
“아…! 그렇구나...그러네요, 감동적인 결말이네요….”
...뭐지?
모르는 얘기를 처음 들은 사람 같은 반응이다.
나는 래피드의 미묘한 반응을 느끼고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가 눈을 감으며 다시 웃는 표정을 지었다.
대화가 다시 끊어진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래피드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친해지는 것 같았던 관계가 완전히 처음으로 되돌아 간 것 같다.
싸운 커플처럼...아니, 싸운건 맞다고 생각해야 되려나.
래피드에게는 그때의 내 행동이 억지로 덮치려 한 거나 다름없을지도 모른다.
어찌 됐든, 나는 오늘 래피드에게 사과할 생각이었다.
싸운 뒤의 첫 데이트, 만난 뒤 말 없이 적당히 진정하는 시간을 보낸 타이밍, 공공장소이지만 아무도 없는 장소다.
그럭저럭...개인적인 대화를 꺼내기에는 괜찮은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조금 이른 것 같기도 하지만, 이쯤에서 슬슬 사과할까.
그 전에...래피드에게 최면을 걸어 다시 데이트 하게 된 것만으로 자꾸 올라가는 입꼬리를 제어하기 힘들다.
나는 한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눈을 작게 떴다.
표정을 최대한 들키지 않게, 미안해 하고 속상해하는게 보이게끔...작게 헛기침을 하며 목소리의 높낮이를 조절한다.
래피드는 내가 너무 갑자기 가까이 다가가서 거부감을 느낀 게 틀림 없다.
그렇다면, 원하는 대로...거리를 조금 벌려준다.
나는 일부러 목소리를 살짝 떨며 래피드를 보지 않고 말했다.
“오늘은...이제 못 만날 줄 알았는데, 만나줘서 고마워요...뭐, 오늘은 영화 약속 때문에 온거겠지만….”
“네?”
“...미안해요.”
갑작스러운 사과에 래피드가 당황한 목소리를 낸다.
하지만 그것도 아주 잠깐이다.
래피드는 내가 어떤 걸 사과하는지 깨달았는지 금방 조용해져 아무 말도 하지 않게 됐다,
“앞으로 만나기 싫으면...말해요.”
“...네?”
나는 생각에도 없는 말을 입 밖으로 꺼냈다.
말로만 하는 가벼운 사과는 의미가 없다.
진지하게,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미안하게 여긴다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어차피 최면을 걸어 둬서, 이런 말을 해도 내가 말을 바꿔 만나자고 하면 만나 줘야만 한다.
하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래피드에게는 내가 정말 진심으로, 진지하게 사과하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래피드에게 이어서 말했다.
“래피드는 지금 저랑 있는 것도 싫을테니까….”
“자, 자, 자, 잠깐만요! 왜, 왜요?!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