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2화 > 유인 (2)
내가 그레이프한테 열쇠를...줬었나?
그레이프가 내 방 열쇠를 가지고 있어도 상관 없다...상관 없는데….
내가 주지도 않은 열쇠를 가지고 있다면...뭔가 이상한 게 아닐까.
“...요리 간 한번 봐줄래요?”
“응…?”
“앵거 입맛에 맞춰서 하려고요, 잠깐만요….”
그레이프는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작은 그릇에 조금 끈적해보이는 스튜를 떠서 가져왔다.
토마토와 고기, 약간의 카레...당근과 감자의 향이 진하게 느껴지는 붉은 스튜다.
그레이프가 주는대로 얼굴을 내밀고 받아먹어보니 맛은 꽤 괜찮았다.
“맛있어...이거 뭐야?”
“앵거 또 이상한 거 먹었을 것 같아서, 앵거가 좋아하는 느낌으로 이것저것 야채 사와서 해 봤어요.”
“자연산?”
“네, 전부 자연산이에요.”
자연산 야채에 자연산 고기면 꽤 비쌀텐데...아니, 재료는 감자, 토마토같이 키우기 쉽고 많이 나오는 야채들이다.
당근하고 고기가 좀 비싸긴 하겠지만, 이 정도면 합리적인 가격일 것이라 생각된다.
그건 그렇고, 내 방 열쇠는 어떻게 된걸까.
“해주는 건 고마운데, 내 방 열쇠는….”
“다른 것도 먹고 싶은 거 있어요?”
“응? 아니, 괜찮은데 내 방 열쇠….”
“...열쇠요?”
“아니...별건 아니고, 내가 창문 닫아놓고 잤는데, 어디로 들어온건가 해서...내가 방 열쇠 줬었어?”
“아….”
몇 번이나 되묻자 그레이프는 그제야 내 말을 이해했는지 아주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레이프는 갑자기 죄 지은 사람처럼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열, 쇠는…기, 기억...안 나요? 앵거가...열쇠 만들어 준거….”
“내가?”
“아니, 앵거가 열쇠를 만들어도 된다고...해서….”
“내가…?”
“네, 네에!”
내가…?
그레이프한테 내 방 열쇠를 만들어도 된다고 했다고…?
그랬나…?
“어쩌다가?”
“어...그냥, 앵거가 저한테 열쇠 만들어서 가져달라고 했어요!”
“내가?”
“네!”
“그래…? 음....”
그레이프 정도면 뭐...내 방에 마음대로 들어와도 괜찮긴 하다.
오히려 방 열쇠를 주면 내가 현관문까지 가서 맞이해주지 않아도 될테니 더 편하겠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그레이프에게 열쇠를 준 것 같지가 않았다.
“나 기억 안 나.”
“아! 섹스하고...였나요? 섹스 하기 전이었나…? 앵거는 가끔 섹스하면 기억 안난다고 하니까….”
“그건 그레이프가 너무 기분 좋게 하니까 기억이 섞이는 거잖아....”
“그래서 기억 안 나는 거 아닐까요?”
그런가…?
섹스하다가 그레이프가 방 열쇠 만들어주세요~했으면 너무 기분 좋아서 맘대로 하라고 했을 것 같기는 하다.
그래서 기억이 안 나는 건가….
“뭐...상관 없기는 한데….”
“네?”
기억이 안 나긴 하지만, 내가 준 거면 상관 없다.
생각해보면 오히려 주는게 맞는것 같기도 하고...그레이프한테 내 방 열쇠를 주는게 잘못된 것도 아니고….
나는 멍청한 표정이 되어있는 그레이프에게 덤덤하게 말했다.
“열쇠는 잘 들어? 내 방 문고리가 좀 많이 낡아서 가끔 안 되던데.”
“잘...들어요.”
“열쇠 구경해봐도 돼?”
“어...네에.”
그레이프가 등 뒤로 손을 돌리더니 어딘가에서 열쇠를 꺼내 내밀었다.
제법 잘 만들었다...내 낡은 열쇠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깨끗하다.
나는 그레이프에게 열쇠를 돌려줬다.
“잘 만들었네.”
“...열쇠 가지고 있어도 돼요?”
“그레이프 거잖아…?”
“으, 으음….”
그레이프는 열쇠를 받으며 이상한 질문을 했다.
열쇠는 그레이프 건데 왜 나한테 가지고 있어도 되냐고 묻는거지.
나는 그레이프의 열쇠를 보고 내 낡은 열쇠를 생각하며 말했다.
“열쇠 깨끗해서 부럽다...내 거랑 바꾸고 싶어.”
“어? 바, 바꿀래요?”
“응…? 어...그럴까? 저기에, 싱크대 옆에 벽걸이에 있어.”
그냥 해본 말에 그레이프가 내게 새로 만든 열쇠를 내밀었다.
잘 안 드는 낡은 열쇠와 잘 드는 새 열쇠를 바꾸자 하면 나야 당연히 좋다.
나는 이걸 받아도 괜찮을까를 고민하며 그레이프와 열쇠를 바꿨다.
“진짜 바꿔요?”
“나야 좋은데…그레이프는 내가 계속 쓴 낡은 열쇠로 괜찮아?”
“네!!”
그레이프는 싱크대 쪽으로 달려가 곧바로 내 열쇠를 짧은 반바지의 주머니에 넣었다.
요리에 올려뒀던 불을 끄고 나무주걱으로 저으며 기분이 좋아진 듯 몸을 살살 흔든다.
낡은 열쇠를 받고 기분 좋아하다니...역시 그레이프의 취향은 이해하기 힘들다.
“앵거한테 열쇠 받았다~아, 졸리면 좀 더 자고 있을래요? 점심 되기 전에 깨울게요!”
“응...좀 더 잘게….”
나는 새 열쇠를 머리맡에 내려놓으며 자리에 다시 누웠다.
다시 잠이나 자려고 했는데...그레이프와 대화하며 잠이 깨 버렸는지 잠이 오질 않는다.
...근데 점심 되기 전에 깨워준다니?
오늘은 월요일...그레이프가 회사에 가는 시간은 아침이다...점심에 나를 어떻게 깨우겠다는 거지…?
점심도 아니고 점심이 되기 전이면 한창 일할 시간 아닌가…?
나는 새롭게 떠오른 의문에 다시 몸을 일으켜 그레이프에게 말했다.
“회사 안 가?”
“아~일주일 휴가 냈어요.”
“어? 왜...?”
“조금 일이 있어서...하아아...안 그래도 그 일 때문에 얘기도 할 겸 해서 일찍 온 건데...마법소녀 일 때문에...당분간 다른 시에 가 있어야 할 것 같거든요….”
일 주일 동안 나랑 섹스하려고 휴가를 낸 건 아닌 건가.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그레이프가 다른 시로 가야 한다니, 이건 이것대로 신경 쓰인다.
다른 지역에 파견이라….
래피드도 이런 말을 하긴 했었다.
나는 래피드의 메시지를 떠올리며 씁쓸한 표정으로 그레이프에게 질문했다.
“...혼자 가?”
“네? 네...혼자...가죠? 가, 같이 가려고요? 저도 그러고 싶긴 하지만 앵거한테는 위험한 일일지도 모르고, 앵거가 숙소에만 있을 거면 괜찮긴 한데…다른 곳은 위험해서....”
“다른 마법소녀는?”
“최상위권이니까요, 추가 지원은...없을 거에요 아마도...그렇게 걱정 안 해도 돼요! 저도 세니까...그리고 정말 만약에 무슨 일이 있으면 래피드가 지원 올테니까요!”
내 표정이 어두워진 걸 본 그레이프가 어쩐지 기뻐 보이는 모습으로 말했다.
나는 그레이프에 입에서 나온 래피드라는 이름을 듣고 입 안에서 입술을 깨물며 그레이프를 바라봤다.
래피드가 지원을 온다면...래피드는 어디에 있는 거지?
“래피드도 같이 가는 거야?”
“음...아뇨, 같이 오면 더 안전하기야 하겠지만, 그랬다가는 A시가 비게 되니까요...래피드는 A시에서 대기할 거에요.”
“안 가는 거야…?”
“래피드는 언제든 제 쪽으로 올 수 있으니까...아, 전에...그, 에스더 때 마법 알죠? 이리저리 들어가고 나오는...그런 식으로 팟 하고 옆에 나타날 수 있어요!”
래피드는 안 가는 건가…?
그러면 역시...래피드가 나한테 한 건 거짓말이었나….
래피드가 나를 일부러 피하는게 점점 더 확실하게 느껴진다.
“하아….”
“앵거? 기분 안 좋아요...?”
“응...조금, 좀...그러네….”
“정말 걱정 안 해도 괜찮은데...저 안 약해요...아무 일 없이 돌아올 거라니까요…?”
“응….”
그레이프야 아무 일 없이 돌아오겠지….
그레이프는 내 태도가 나아지지 않는 걸 보고 복잡한 표정으로 내 옆에 다가와 앉았다.
“진짜...최상위권 마법소녀 걱정해주는 건 앵거밖에 없을 거예요.”
“아, 응….”
“저도 안 가고 싶은데 어쩔 수 없으니까...일 끝나면 바로 올게요...네?”
“응? 아, 알았어, 잘 갔다와….”
다른 고민에 빠져있던 나는 그제야 그레이프가 뭔가 착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래피드 생각하느라 기분이 안 좋아진 건데, 내가 그레이프를 걱정해서 기분이 안 좋아진 줄 알고 있다.
하지만 굳이 그레이프의 착각을 수정해주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
“그래서...수요일 때부터는 다음주까지 못올 것 같아요….”
“수요일부터 다음주까지면...5일 동안?”
“네...저도 가기 싫은데, 가게 되서 어쩔 수 없어요…지금은 최상위권의 수가 부족하니까....”
“음…다른 시면...어디? 왜?”
“D시에요, 저도 뭔지 잘 모르겠는데...중위권 마법소녀들이 촉수뱀 무리한테 당했다고 해서...지금 거의 모든 전력이 둥지로 끌려갔나 봐요.”
“D시? 상위권은? 그보다 촉수뱀한테 다 당했다고...? 하이브리드 변이종이야?”
“...그것 때문에 가야 해요.”
나는 조금 놀란 목소리를 내며 되물었다.
A시를 제외한 다른 시들은 현재 최상위권 마법소녀 없이 상위권과 중위권 만으로 방어하고 있다.
그 중위권과 상위권이 전부 둥지로 끌려갔다 하면...확실히 이건 최상위권의 누군가가 갈 수밖에 없는 문제다.
애쉬는 방위군보다도 위에 있어서 애초에 이런 파견 명령 자체를 듣지 않을테고...A시의 방어보다는 외부 구역에서의 네거티브 박멸에 더욱 힘쓴다.
래피드는 사실상 혼자 남게 되어 A시의 방어에 전력…공간이동 마법이 있으니 그게 훨씬 안전하다.
남는 건 자연스럽게 그레이프...그레이프가 갈 수밖에 없다.
“D시 가기 싫어요...거기는 앵거도 없고, 숙소도 엉망이고….”
“음...D시에서 나이 먹은 시장이 관광도시 계획을 억지로 추진하다가 망해서 그래. 네거티브가 계속해서 나타나는데 대체 무슨 관광을 하겠다는 건지….”
“예전에 한번 가 봤는데, 침대도 엉망이라….”
“공장제 매트리스가 초기에 잘못 만든게 많아서, 어떻게든 숙소로 소비시키고 있어서 그럴 걸...근데 마법소녀가 머물만한 숙소도 그런 매트리스를 쓰는거야? 그건 몰랐네....”
“식사도….”
“D시에서 자연식은 통조림밖에 없긴 하지…?”
그럭저럭 먹을만 하긴 해도, 결국 짭짤하기만 한 통조림...자연식 위주로 식사를 하던 그레이프가 좋아할만한 식단은 아니다.
매트리스도...내 방의 망가진 매트리스보다도 훨씬 질이 안 좋은 소재의 스펀지 매트리스를 쓸 테고, A시에서 사용하고 나서 남은 정크 파츠로 건물을 조립하는 만큼 건물 자체의 내구성이나 질도 안 좋다.
나는 내 기억속에 있는 D시를 떠올리며 그레이프의 불만의 원인을 하나하나 설명해줬다.
“...D시를 엄청 잘 아네요?”
“거기에서 살았으니까.”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