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1화 > 유인 (1)
처음에는,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려 했다.
일단 래피드가 돌아가기는 했지만, 스킨십은 꽤 많이 했다.
부끄러워서 도망간걸수도 있고 그냥 귀엽게 보면 되지 않을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최대한 진정하려고 노력했다.
불안해하고 짜증내기보다는 일을 해결하는게 먼저다.
메신저를 열어 래피드에게 메시지부터 보낸다.
[내일 일요일에 혹시 잠깐 대화좀 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든 만나야 한다는, 만나면 해결할 수 있다는 절박함이 담겨있는 소심한 문장이다.
래피드에게 보여준 지금까지의 나 답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최대한 빨리...상황이 더 이상해지기 전에 빨리 해결해야 한다.
만나기만 하면 해결할 수 있다.
최면을 걸어서 기억을 날려버려도 되고, 최면을 해제해도 되고, 다른 방식으로 최면을 더 걸어도 된다.
만나기만 하면...만나면...최면만 걸면 어떻게든….
하지만, 일은 그렇게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
래피드는 내 메시지를 읽지도 않았고, 답장도 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 내가 가지고 있으려 했던 침착함과 긍정적인 시선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위치는 0번 구역,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다.
그런데도 메시지를 안 읽는다는 건 일부러 무시하는 거다.
래피드가 내 연락을 안 받아준다.
혹시 날 차단한 건 아닐까?
돌아가고 나서 최면에서 풀리기라도 했나?
불안하다….
[잘 돌아갔나요…?}
[영화 티켓...상영중인 것 중에 다음주 까지 하는 영화가 재미있다네요…}
[다음주에 시간 괜찮으신가요….}
답장이 없다.
읽지도 않는다.
무시당한다….
“하아아아….”
갑갑하다….
나는 아무런 대답도 없고, 읽히지도 않는 래피드와의 메신저 창을 보며 울음 섞인 신음을 냈다.
점점 상황을 긍정적이게, 여유있게 보기 힘들어진다.
더는 메시지를 보내기도 힘들다.
눈 앞에 있다면 말실수를 해도 최면을 걸어서 어떻게든 할 수 있지만, 메신저로 대화를 했다가 또 실수하기라도 하면 돌이킬 수 없게 되어버릴것만 같아 불안하다.
나는 힘겹게 메신저 창을 닫고, 비전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조금만 더 하면 어쩌면 섹스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르는데…급하게 해선 안 된다고 그렇게 몇 번이나 마음먹어놓고, 래피드가 조금 잘 받아준다 싶으니까 바로 폭주하듯 날뛰어 버리다니.
멍청하다….
나 자신의 한심함에 두통이 사라지질 않는다.
존재 가치를 잃어버린듯한 상실감에 가라앉는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빠르게 원상태로 되돌려 놔야 한다….
문제가 생겼을 때 방치하는 시간이 길어지게 되면 그만큼 내게는 나쁜 영향만이 남는다.
어떻게든...무슨 수를 써서라도….
어려운 일은 아니다….
오늘은 토요일, 내일은 일요일.
일요일은 래피드가 4번 구역에 가서 스트레스를 풀고 쉬는 날이다.
4번 구역에 가서, 래피드랑 우연히 마주치면 된다.
우연히 마주쳐서 곧바로 최면을 걸고, 전날의 기억을 일부 없애버리면 원상복구된다.
컴퓨터에서 심각한 버그가 일어났을 때 예전 상태로 되돌리는 것처럼 쉬운 일이다.
침착하자...아직 일이 완전히 틀어진 건 아니다.
되돌릴 수 있다.
복구할 수 있다.
나는 긍정적인 사고를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지하철은...주말에는 평일보다 더 일찍 운행종료한다.
택시를 타고 집에 돌아간 나는 스트레스를 이불에 묻으며 곧바로 잠들었다.
{어제 식사 전에 자리 비워서 죄송해요, 영화는 제가 당분간 다른 지역 파견을 가야 해서...어려울 것 같아요….]
그리고 다음날 아침, 일요일.
비전폰에 도착한 메신저를 본 나는 아침부터 두통에 시달리게 되었다.
래피드의 위치는 0번 구역, 점심시간이 되어도 변함이 없다.
다른 지역으로 파견 같은건 가지 않았다.
“으으윽….”
래피드가 나를 일부러 피하고 있다….
끔찍할 정도의 스트레스가 머릿속을 엉망으로 뒤섞어놓는다.
점점 여유가 사라진다.
나는 씻지도 않은 채 손톱을 물어뜯으며 불안한 생각을 이어갔다.
래피드가 나를 피한다면 4번 구역에 가서 우연히 마주치는 것도 힘들지도 모른다.
래피드는 마법소녀...아무리 쫓아가도 먼 거리에서 나라는 걸 눈치채고 공간이동으로 도망쳐 버리면 최면을 걸 방법이 없다.
유일한 해결책은 래피드에게 최면을 거는 것….
하지만 래피드는 나를 피하고 있다….
최면을 걸 수 없다….
이러는 사이에도 래피드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게 될 지 모른다는 사실이 불안하다.
지금쯤이면 뭔가 이상했다는 걸 알아차리고 점점 날 의심하고 있지는 않을까?
조금씩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지금껏 쌓은 호감이 한번에 날아간 건 아닐까?
혼자서 무슨 생각을 할 지 모르지만, 이런 식으로 거리를 둔다는 건 좋은 생각은 아니겠지.
지금 이 순간에도 래피드가 점점 나를 안 좋게 생각하고 있다.
래피드와의 거리가 실시간으로 멀어지고 있다.
반응이 이상해 지자 마자 설득을 하는게 아니라 최면부터 다시 걸었어야 했을까.
자연스럽게, 래피드와 연인 관계가 되어 섹스한다는게 헛된 망상이었던 걸까.
처음부터...최면을 걸어서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되더라도 섹스하는게 맞았을까….
아니...그렇게 했다면 래피드와 섹스는 했어도 얼마 지나지 않아 죽게 되었을 것이다.
언제부턴가 내 뇌리에 새겨진 이 불안한 생각은 예감이라기보다는 확신에 가까웠다.
래피드와 억지로 섹스하면 나는 죽는다.
지금은 이딴 걸 생각할 때가 아니다….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않는 후회보다는 해결책을 생각해야 한다.
이 상황을...래피드를 만나려면 어떡해야 하지….
“후우….”
나는 마진사에 있는 2동박사의 글들을 마구잡이로 읽어보며 머리를 싸맸다.
어떻게든 상황을 수습할 방법을 찾아보려 했지만, 2동 박사의 글을 뒤져봐도 답이 나오질 않는다.
답이 나올 리가 없다.
2동 박사의 글은 결국 최면을 걸고 난 뒤에 도움이 되는 글들 뿐이다.
나는 지금 래피드에게 최면을 걸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오히려 앞으로 래피드가 나를 아예 안 만나주지는 않을지를 걱정해야 한다.
우연히 만나려 해도, 래피드가 나를 피하고 있는 이 상황에서는 나를 감지한 순간 먼저 도망쳐버릴 가능성이 높다….
래피드가 도망치지 못하게 하려면 어떡해야 하지?
래피드를 붙잡으려면...최면을 걸려면….
그레이프와 래피드는 친구니까...그레이프한테 래피드를 소개시켜 달라고 하면?
그레이프가 소개시켜 줄지도 모르겠고, 나를 피하는 래피드가 나와줄 리가 없다.
경계심만 키워주게 될 것이다.
다른 마법소녀들에게 최면을 걸어서 래피드를 붙잡게 하는 건…?
래피드는 애쉬 다음 가는 최상급의 마법소녀다...다른 마법소녀들은 상대도 되지 않는다.
다른 마법소녀들이 내 명령을 듣는다는 걸 알게 된다면 래피드에게 적대감만 쌓게 된다….
상황이 더 안 좋아지기 전에 해결해야 하는데…생각을 거듭할수록 시간만 지나간다.
나 자신의 실수에 대한 자책 이후에는 어찌해야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그 후에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게 없다는 현실에서 고통만이 남는다.
비정상적일 정도로 괴롭다.
“하아….”
나는 배고픔도 잊고 매트리스에 누워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겨우 하루 생각해봤을 뿐이지만, 답이 안 나온다.
하루 종일 생각해봤는데도 이건 정말 방법이 없다.
뭐 생각해서 조금이라도 그럴싸한 발상이 나와야 고민이라도 하지, 이건 그냥 나 자신에게 방법이 없다는 걸 계속해서 강조시켜서 자학하는 행위의 반복이다.
래피드와 섹스해야하니 지금 이렇게 된 관계를 어떻게든 해야 한다는 생각이 질리도록 머릿속에 울린다.
해결책이고 고민이고 뭐고, 스트레스만 쌓인다.
지친다….
힘들다….
졸리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고민 끝에 나는 또다시 현실에서 도피하듯 잠이 들었다.
# # #
부글부글 하고 뭔가 끓는 소리가 들린다….
물...냄새...요리….
내가 어제 뭔가 해먹고 잤었나…?
...아무것도 안 먹었다.
불을 건드리지도 않았고...요리도 안 했다….
그럼 이 소리는 대체 뭘까….
“으으으….”
나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두통에 이마에 손을 대며 상체를 일으켰다.
찌푸린 눈을 작게 떠서 주변을 살펴보니 방 안은 아직 어두웠다.
시간은...아직 새벽, 월요일이다….
나는 손으로 눈을 비비며 소리가 들리는 곳을 지그시 바라봤다.
흐릿했던 시야가 천천히 선명해지며, 익숙한 곡선이 서서히 눈에 들어온다.
가벼운 반바지에 나시, 앞치마를 입고 요리를 하는 깔끔하게 머리를 묶은 미녀….
하긴...지금 내 방에 올 사람은 한 명 밖에 없다.
“그레이프…?”
“아, 깼어요…?”
“어...아, 월요일이구나….”
“미안해요, 아침밥 만들고 있으니까...좀 더 자요!”
“응…하아암....”
자는 도중에 들려온 소리는 그레이프가 새벽부터 내 방에 와서 요리를 해주며 나는 소리였다.
소리의 정체를 알게 된 나는 안심하며 다시 매트리스에 누웠다.
그러가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닫고 다시 상체를 일으켜 멍하니 그레이프를 바라보며 질문했다.
“어...그레이프, 내가 방 열쇠 줬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