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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소녀 최면물-218화 (218/299)

< 218화 > 데이트 (7)

그레이프를 배웅한 나는 옷을 벗은 뒤 곧바로 샤워실에 들어갔다.

아침부터 섹스를 한 탓에 온몸이 땀에 젖어있다.

나는 샤워를 하며 그레이프에 대해 생각했다.

요즘 계속 드는 생각이지만…그레이프가 조금 변했다.

뭔가 달라졌다고 처음 느낀 건 데이트가 끝난 밤이었다.

손만 잡고 자도 좋다던 그레이프는 정말로 나와 손만 잡고 잤고, 해보니까 자기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무척 행복하다며 좋아했다.

섹스하지 않아도 좋은 것 같다고, 확실히 좋다고 행복하다고 한 그레이프는 그날 나를 덮치는 게 아니라 섹스해달라고 부탁했고, 하고 싶은 체위가 있으면 말해달라고 하기까지 했다.

그렇게 해서 후배위를 하게 되었고, 또 하고 싶은 거 있냐고 물어봐서 자지도 빨게 시켰다.

잠들 때까지 자지를 빨아달라고 해도 빨아주고, 내가 비전폰으로 다른 짓을 하고 있어도 빨아준다.

야한 것만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게 아니라, 밥도 해준다.

먹고 싶은 게 있냐고 물어봐서 말해주면 맛있는 걸 해주고, 사 먹고 싶다고 하면 사 온다.

더 필요한 게 있는지 직접 집안을 확인해 물건을 사 오기도 하고, 내 옷을 알아서 다려주거나 세탁해주기도 한다.

다른 것보다도 대화하는 거나 평소의 행동, 태도가 변했다.

뭔가 여유가 생긴 것 같다고 해야 하나, 장난도 많아졌고 전보다 훨씬 잘 웃는다.

…왜 변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쁜 변화는 아니다.

이번 주에는 최면을 따로 건 적도 없으니 최면 때문에 변한 것도 아니다.

매일 와서 밥도 해주고, 필요한 거 없냐고 자주 물어보고, 해달라고 하면 해주고, 섹스도 순종적이다.

다시 최면을 걸어서 원래대로 되돌려 놓을 필요성도 느껴지지 않는다.

나는 더 이상 그레이프와의 섹스에 대한 고민과 압박을 느끼지 못했다.

내가 원하면 원하는 만큼만 섹스하고, 만족했다고 하면 자기도 만족했다면서 손을 잡고 잔다.

원하는 만큼 섹스하고, 원하는 만큼 해주고, 말 안 해도 알아서 해주는…정말로 완벽하다고 할 수 있는 관계다.

“후….”

샤워를 마친 나는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며 비전폰을 확인했다.

메신저에 회사에 도착한 그레이프가 잘 도착했다고 보낸 메시지가 와 있었다.

나는 그레이프에게 방금 샤워하고 나왔다고 답장한 뒤 힘내라는 이모티콘을 보냈다.

그레이프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난 뒤 래피드와의 대화창을 연 나는 얼마 전 래피드와 나눈 대화를 다시 읽어봤다.

잘 되고 있는 건 그레이프와의 관계만이 아니다.

래피드와도 잘 되고 있다.

<죄송해요! 제가 연락이 늦었죠….]

[아니에요, 래피드가 바쁜 건 저도 알고 있으니까요.>

<그런 게 아니라….]

데이트를 하고 나서 내가 보낸 안부 메시지에 래피드의 답장이 온 건 이틀 지난 후였다.

내게 보낸 첫 메시지부터 연락이 늦은 것에 대한 사과로 시작한 래피드에게 나는 개의치 않는 모습을 보이며 곧바로 답장했다.

그렇게 래피드와 대화를 시작한 나는 래피드의 연락이 늦은 게 조금 신경 쓰여 슬쩍 떠보듯이 물었다.

[혹시 제가 전에 실수한 게 있었나요?>

<그런 거 아니에요…재미있었어요.]

[너무 부담 느끼지 마시고, 연락이 힘드시면 가끔만 해 주셔도 괜찮아요.>

<아뇨, 제가 죄송해요!]

[답장해줘서 고마워요.>

내가 보낸 메시지에 래피드는 한동안 답장이 없었다.

나는 내가 말실수를 한 건가 싶어 대화 내용을 몇 번이고 다시 읽어봤지만, 문제가 될만하다고 생각되는 내용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조금이 지난 뒤, 래피드는 다시 내게 사과의 메시지를 보냈다.

<사실 남자분이랑 연락하는 게 처음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고민하다가 늦은 거예요.]

[아하….>

<그런데 이럴 때 망설이면 오해 생긴다는 말을 들어서…죄송해요….]

문제가 있다면 기억해뒀다가 만났을 때 최면을 걸어서 지워버릴 생각이지만, 다행히도 래피드의 답장이 늦은 이유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생각보다 귀여운 이유이기도 했다.

나는 별일 아니었다는 생각에 웃으며 래피드와 메시지를 나눴다.

[그러고 보니까 이번 주에는 인공강우가 많네요.>

<한동안 자주 내릴 거라고 하더라고요.]

[래피드는 비가 와도 밖에 나가야 할 때가 있을텐데 힘들거나 불편하지는 않아요?>

<아, 저는 비를 튕겨낼 수 있어서….]

[우산이 필요 없겠네요? 그건 부럽다.>

<그래도 우산 쓰는 거는 좋아해요.]

[저도 우산에 비 떨어지는 소리 좋아하는데…비오는 냄새도 좋고요.>

<어? 저도….]

비를 맞는 걸 좋아한다면 비를 튕겨내는 마법 같은 건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우산을 쓰는 걸 좋아한다는 건 비가 오는 날 우산을 드는 행위 자체를 좋아한다는 뜻이다.

우산을 드는 무게감을 좋아하지는 않을 테고, 비가 내리는 걸 보는 걸 좋아한다면 우산을 들고 나가지는 않을 것이다.

남는 건 소리와 향기뿐이다.

[비는 맞아서 감기만 안 걸리면 좋은 것 같아요. 소리도 좋고, 뭔가 씻겨나가는 것도 있고…특히 지금은 비 온 뒤에 공기가 좋아지니까요.>

<그쵸…아, 저는 다른 것보다도 무지개가 생기는 걸 좋아해서 일부러 무지개 보려고 밖으로 나가기도 해요.]

[A 시에서도 무지개가 보이나요?>

<낮은 데서는 안 보이는데 높이 올라가면….]

래피드는 그렇게 말한 뒤 내게 무지개 사진을 보내줬다.

땅에서부터 반원 모양으로 그려진 무지개가 아닌, 원형으로 이루어진 무지개다.

배경이 아무것도 없는 하늘인 걸로 봐서는, 보통 높은 곳이 아니라 아주 높이까지 비행해서 사진을 찍은 것 같았다.

<이렇게 떠 있어요.]

[오…원형인 무지개는 처음 봐요. 사진 저장해도 돼요?>

<네!]

조금은 어색했던 대화의 분위기는 자연스럽게 얘기하며 조금씩 풀어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래피드와 새 데이트 약속을 잡을 수 있었다.

<아무튼, 메시지 늦어서 정말 죄송해요.]

[음…정말로 미안하면 또 밥 사주는 건 어때요?>

<네…?]

[그냥 또 만나고 싶어서 한 말이에요. 아니면 제가 래피드한테 밥을 사도 괜찮고요.>

<아….]

[이번 주말에 시간 괜찮아요?>

<혹시 모르니까 알아보고 금요일에 다시 답장해 드릴게요!]

그렇게 래피드와의 대화를 끝내고 금요일이, 오늘이 되었다.

<저 내일 시간 괜찮아요!]

[다행이네요, 어디서 만날지는 제가 정해도 될까요?>

<네! 정해지면 얘기해주세요!]

이미 아침에 화장실에 갈 때 래피드에게 답장을 보내둔 나는 래피드와 내일 데이트를 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하며 기대감을 끌어올렸다.

어디서 만날지는 이미 정해뒀다.

하지만 혹시 모르니, 좀 더 생각해 보겠다고 메시지를 보내두고 내일의 일정을 다시 한번 체크한다.

계획을 짜며 느끼게 된 거지만, 그레이프와 데이트는 래피드와의 데이트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레이프는 사람이 많은 곳에서 데이트를 하고, 술도 마시고, 회사 때문에 밤에 시간이 난다.

반대로 래피드는 사람이 적은 곳에서 만나야만 하고, 술도 안 마시고, 주말이라고 해도 낮에만 만날 수 있다.

만나서 섹스를 하고, 안 하는 것도 상당히 큰 차이다.

래피드와 만나는 장소는 더 건전해야 하고, 더욱 조용하고 비밀스러운 곳이어야만 한다.

나는 래피드에게 맞춘, 래피드가 좋아할 만한 데이트 코스를 확인한 뒤 래피드에게 어디서 만날지에 대한 메시지를 보냈다.

래피드는 메시지를 확인하고 알겠습니다 라고 말하는 이모티콘을 보내왔다.

래피드의 답장을 확인하고 비전폰을 내려놓은 나는 머릿속으로 내일 데이트에 대한 상상을 하며 그레이프가 해주고 간 요리를 냄비에서 덜어 먹기 시작했다.

영양제도 안 먹었고 아침에 그레이프와 섹스해서 정액도 빼 뒀다.

오늘은 이대로 맛있는 식사와 함께 푹 휴식한 뒤 내일 데이트에 집중한다.

혹시 모르니까 내일도 조금 일찍 나가서 지하철에서 섹스해둬야겠다.

완벽한 계획에 만족한 나는 비전폰으로 지도를 켜 내일 갈 곳에 대한 사전 조사를 시작했다.

어디에서 만나 어떤 길로 가면 좋을지, 화장실은 어디에 있는지…혹시 최면을 걸어야 할만한 상황이 온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뭐 하고 있어요?]

그때, 비전폰 위에 메신저 알림창이 작게 떠올랐다.

메시지 내용을 읽은 나는 래피드가 보낸 거겠지 하며 답장하려다가 뒤늦게 그레이프가 보낸 메시지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묘한 기분을 느끼며 그레이프에게 답장했다.

[밥 먹는 중.>

<맛있어요?]

[응, 이거 다음에 또 해줘.>

이상할 정도로 심장이 두근거린다.

래피드와 대화하다가 그레이프에게 답장한 것뿐인데…뭔가 나쁜 짓을 하는 느낌이 든다.

나는 그냥 그레이프와 데이트하고 래피드와 데이트를 하려는 것뿐인데….

이런 기분을 길게 느끼고 있을 필요는 없다.

내일에 집중하자…내일은 두 번째 데이트를 하는 날이다.

나는 그레이프와의 대화창을 닫고 비전폰을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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