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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소녀 최면물-215화 (215/299)

< 215화 > 데이트 (4)

“그치? 나도 그렇다고 생각하는 중이었어. 우리 다른 게임 하자!”

나는 격투 게임을 그만두고 그레이프의 손을 잡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무리 게임이라고 해도 내가 팬 캐릭터는 그레이프를 모델로 해서 만들어진 캐릭터…그걸 그렇게 마구잡이로 패고 때려눕히며 농락해댔으니 기분 나쁠 만하다.

다행히 그레이프는 아직 그렇게까지 화가 나진 않았는지 순순히 손을 잡고 따라왔다.

어떤 게임을 하면 좋을까 고민하던 나는 그레이프를 바이크 레이싱 게임 앞으로 데려갔다.

이거라면 몸도 머리도 어느 정도 쓸 줄 알아야 한다.

나는 그레이프와 내 기계에 코인을 넣은 뒤, 동시에 시작시켜 대전 모드를 활성화했다.

“어? 앵거 바이크 타본 적 있어요…?”

“게임인데 실제 바이크를 꼭 타볼 필요는 없지…?”

“그렇구나…바이크 좋아해요?”

“음…좋아하나…? 딱히…뭔가 무섭고…안전하게 탈 수 있다면 타보고 싶기는 해.”

“그렇구나….”

나는 바이크에 탄 뒤 액셀과 브레이크, 좌우 균형을 잡아주는 서스펜션의 강도를 체크했다.

실제 바이크는 타본 적이 없지만, 이 게임기로는 꽤 많이 타봤다.

확인해보니 게임기의 상태는 꽤 좋은 편이었다.

“어어어? 그거 뭐예요?”

“출발할 때 타이밍 맞춰서 미리 액셀을 돌리고 있으면 시작하자마자 빠르게 출발할 수 있어.”

“그런 것 좀 알려주고 하면 안 돼요…?!”

게임이 시작되고, 출발하자마자 선두로 치고 나간 나는 그레이프를 멀리 따돌리고 앞서 달렸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레이프는 나를 아슬아슬하게 따라붙기 시작했다.

커브를 하나 돌 때마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그레이프가 따라붙는다.

“잠깐…뭐야! 잘 타잖아!”

“실제로는 많이 타봐서…앵거 너무 바깥쪽으로 도는 거 아니에요?”

서로 속도 차이는 크게 나지 않는다.

오히려 내 쪽이 게임에 익숙한 만큼 가속 타이밍과 감속 지점을 알고 있어서 더 빠른 속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도 그레이프는 커브가 나올 때마다 트랙 끝에 아슬아슬하게 달라붙어 돌았고, 마지막 바퀴가 되어서는 아예 나를 추월해버렸다.

“윽…!”

그레이프에게는 가르쳐주지 않은 커브 후의 순간 가속 기술을 아끼지 않고 사용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바이크 게임이면 공평할 거라고 생각했는데…실제로 바이크를 많이 타봤다는 사실을 숨기다니….

그레이프는 비겁한 마법소녀다….

“앗…실수했다….”

하지만 역시 게임 경험이 부족했기 때문인지 그레이프는 골인을 바로 앞에 둔 마지막 커브에서 어이없는 실수를 해 버렸다.

커브를 끝내는 타이밍에 기어 체인지 레버를 잘못 밟으며 게임 내의 바이크가 갑작스러운 급감속에 빠진다.

나는 약간의 틈을 놓치지 않고 그레이프를 추월해 아슬아슬하게 먼저 골인했다.

“이겼다!”

“와~앵거 대단해요~실수 하나 없이 잘 달리다니, 멋있어요~”

“후우…그레이프도 잘했어…정말 아슬아슬한 승부였다….”

나는 당당하게 바이크에서 내려와 바이크 위에 앉아있는 그레이프를 올려다봤다.

그레이프는 내게 졌는데도 해맑게 웃는 얼굴로 박수를 치고 있었다.

그레이프에게 추월당한 순간부터 불공평한 쓰레기 게임이라고 생각했는데…끝나고 보니 패자도 저렇게 활짝 웃을 정도로 상당한 명작 게임이었다.

이렇게 게임을 잘 만들다니, 이 게임사는 상을 받아야 한다.

“다음은 무슨 게임…응?”

경주를 끝내고 그레이프와 다른 게임을 하려던 나는 묘한 시선이 느껴져 뒤를 돌아봤다.

게임을 하는 동안 어느새 그레이프의 뒤쪽에 구경꾼들이 몰려 있었다.

전부 그레이프의 뒤에서 게임이 아닌 그레이프의 엉덩이를 보는 구경꾼들이다.

“…쯧.”

바이크를 타는 자세가 야해서 이렇게 몰린 건가….

하긴, 바이크에 납작 엎드려서 엉덩이는 뒤로 빼고 커다란 가슴은 위에 올려두는 게 조금 야하긴 하지…치마도 짧고….

나는 묘한 불쾌감을 느끼고 그레이프의 엉덩이를 살짝 손으로 가려주며 바이크에서 내려줬다.

“에이….”

“씹….”

그러자 바로 뒤에 서 있던 구경꾼들에게서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야 뒤에 사람들이 모여있었다는 것과 왜 모여있었는지를 깨달은 그레이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런 그레이프의 앞에 갑자기 한 사람이 가까이 다가왔다.

“아…저기요, 혹시 시간 있으세요?”

“네?”

“우리랑 같이 놀죠?”

또 인가….

나는 어이없어하는 그레이프 뒤에서 눈을 감고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이상하게 그레이프랑 같이 다니면 이런 일이 많이 일어난다.

“…죄송한데, 보시면 당연히 아시겠지만 지금 둘이서….”

“아~그러지 말고, 저런 놈보다 우리가 훨씬 더 재미있을 걸?”

“그레이프, 나가자.”

“…네.”

즐겁게 놀다가 갑자기 기분이 안 좋아진 나는 그레이프의 허리를 툭툭 치며 출구 쪽을 턱짓했다.

낮게 가라앉은 내 목소리를 들은 그레이프는 어깨를 움찔거리더니 짜증 난다는 듯 인상을 쓰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제발 좀 꺼져줬으면 하고 강렬하게 생각하며 주변 사람들을 둘러봤다.

“어….”

“으….”

다행히도 오늘은 사람들이 눈치가 아예 없지는 않았는지 순순히 길을 비켜줬다.

나는 그레이프의 앞에 앞장서서 밖을 향해 걸어갔다.

그레이프도 나가고 싶었는지 순순히 내게 이끌리는 대로 따라온다.

“저…죄송해요, 저 때문에…기분 나빠졌죠…?”

“아냐, 차라리 잘 됐어. 밥 먹으러 가자.”

“네….”

“그리고 이게 뭐가 그레이프 때문이야? 저러는 애들이 이상한거지…그레이프가 예뻐도 저러면 안 되는 거야.”

“네? 네에….”

나는 갑자기 내 눈치를 보게 된 그레이프를 달래주며 출구를 나섰다.

게임을 하는 사이 밖에는 비가 왔었는지 지면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다행히 비는 이미 그쳐 있었지만, 지면은 아직 물에 젖어있다.

“비 왔었나 보네.”

“앗…맞아…당분간 인공강우 한다고 하더라고요.”

“인공강우? 습격 때문에 생긴 미세먼지 때문인가? 아니면 또 바이러스…?”

“거기까지는 저도 정보열람권이 없어서….”

“이왕 내려주는 거 많이 내려주면 좋겠다.”

현재의 도시는 필요할 때마다 하늘에서 인공적인 비를 내려 도시를 씻어내리고 있다.

특수한 괴수가 포자를 살포했을 때, 독성 물질이 퍼졌을 때, 바이러스성 괴수 세포가 퍼지고 있을 때….

그리고 그렇지 않은 때에도 비가 필요하거나 너무 덥거나 미세먼지가 많으면 비를 내려주기도 한다.

“…비 오는 거 좋아해요?”

“비 맞는 건 싫어하는데…비 오는 것 자체는 싫어하진 않아.”

“그렇구나….”

비가 오면 거리에 사람들이 줄어들어서 좋다.

서늘해진 공기도 좋고, 비 온 뒤에 공기가 좀 더 맑아지는 것도 좋다.

하지만…옷이 젖어 찝찝해지거나 타일로 된 지면이 미끄러워지는 건 싫어한다.

“밥은 어디서 먹어?”

“앗, 잠깐만요…저쪽이에요, 저쪽에 있는 초밥집인데…초밥 괜찮아요?“

“초밥은…응, 괜찮아.”

나는 그레이프가 가리킨 방향의 지면이 반짝이는 걸 보고 살짝 긴장하며 대답했다.

타일이 상당히 많고, 미끄러워 보이는 곳이 많다….

블럭형 조립도시는 이게 문제다…부서진 재료를 고온 재가공하며 만들어낸 타일을 바닥재로 사용하니, 비가 올 때마다 너무 미끄러워진다.

물론 모든 지면이 타일로만 이루어진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표면이 거친 바닥재만 사용해주는 것도 아니다.

반짝반짝한 타일과 거친 표면이 일부러 꾸며놓은 것처럼 섞여 있다.

거친 바닥재는 파괴 시에 먼지가 너무 많이 일어나고 고온으로 가열한 뒤 건조하는 시간이 오래 걸려서 설치하고 건조하기만 되는 재활용 타일 바닥재를 사용하기로 한 것으로 알고 있다.

물에 젖기만 하면 이렇게 반짝반짝 미끌미끌해지는 타일 바닥재를 왜 써야 하는지, 왜 쓰고 있는지는 이해가 된다.

하지만, 이해가 되는 것과 별개로…싫다.

비가 오는 날 퇴근하며 이미 몇 번인가 타일 바닥재에 발목을 삐끗한 경험이 있어서 좋아하려야 좋아할 수가 없다.

“초밥 별로 안 좋아해요?”

“아니? 괜찮아.”

“음…알았어요….”

“진짜 괜찮아. 그것보다….”

나는 그레이프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그레이프는 멍하니 눈을 깜빡거리며 내 손을 잡고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였다.

나는 왜 손을 잡는지 모르는 것 같은 그레이프에게 이유를 설명해줬다.

“바닥 미끄럽잖아. 넘어질까 봐.”

“어? 저는 이런 거 안 미끄러지는데….”

뭐지…?

자기는 마법소녀라서 이런 일로 안 미끄러지는데, 일반인인 나는 미끄러지는 거냐고 놀리는 건가?

나는 생각지도 못한 도발을 듣고 그레이프의 손을 꽉 잡아 쥐었다.

“알았으니까 잡기나 해.”

“앗, 네에….”

그레이프의 손을 잡은 나는 미끄러지면 곧바로 그레이프에게 매달릴 생각을 하며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그레이프는 내가 잡은 손을 몇 번인가 움찔거리더니 손을 살짝 폈다가 쥐기를 반복했다.

나는 왜 손을 자꾸 움직여서 내가 미끄러질 만 한 위험성을 높이는 걸까 생각하며 그레이프의 손에 깍지를 껴 버렸다.

“앗, 읏, 앗….”

“가만히 있어.”

“읏, 네엣…윽….”

나는  그레이프 손잡이에 몸을 지탱하고 안정적으로 길을 걸었다.

길을 가는 사람들이 나와 그레이프를 한 번씩 힐끔거리고 지나간다.

그레이프에게 정신이 팔린 남자들 중 몇몇이 타일을 잘못 밟고 균형을 잃는다.

타일에 미끄러지는 게 바보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밤중에 보면 생각보다 잘 안 보인다.

특히 비가 오면 젖은 땅이 전부 비슷하게 빛나서 더 안 보인다.

갑자기 넘어지지 않으려면 조심히, 느리게 걸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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