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법소녀 최면물-213화 (213/299)

< 213화 > 데이트 (2)

더 생각해 봤자 시간 낭비, 감정 낭비다.

나는 약속 장소 근처의 시계탑을 보며 시간을 확인했다.

슬슬 퇴근 시간…약속시간이다.

데이트 장소는 9번 구역, 회사가 있는 10번 구역의 바로 옆이다.

전에 그레이프와 함께 칵테일을 마셨던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기도 하다.

10번 구역의 회사 사람들이 자주 회식하러 오는 곳…회사가 밀집된 구역에 연결되듯이 생성된 번화가다.

A 시에서 사람이 가장 많이 몰리는 곳이기도 하다.

나는 수많은 사람들의 눈빛을 피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초점을 잃은 눈빛을 보고 있으면 소름이 끼친다.

감시카메라도, 사람들도 전부 나를 쳐다보는 듯한 착각이 자꾸만 든다.

복장은 언제나와 같은 셔츠에 바지…하지만 데이트라는 생각에 이상하게 긴장되어 오랜만에 다림질이라는 걸 해 보고 나왔다.

향수도 조금 뿌리고, 머리도 괜히 만져보고…거울을 봤을 때는 전혀 꾸몄다는 티가 나지 않았지만, 내 나름은 신경 써봤다.

그래도 이 정도면 데이트하러 나왔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괜히 비전폰에 얼굴을 비춰보며 이상한 곳은 없나 체크했다.

그때 비전폰에서 메신저 알림음이 울렸다.

약속 시간이 가까워져서 그레이프가 메시지를 보낸 모양이다.

<끝났어요! 바로 갈게요!]

[응>

나는 그레이프에게 짧은 답장을 보낸 뒤 한숨을 내쉬며 비전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주변 사람들을 보지 않기 위해 눈을 감고 서서히 진정한다.

긴장할 필요 없다, 긴장할 필요….

“앵거?”

“응?”

잠시 호흡을 고르던 나는 그레이프의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었다.

놀랍게도 그레이프는 그 잠깐 사이에 시계탑 근처에 도착해, 내 바로 앞에 서 있었다.

평범한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이동속도다.

“어…벌써 왔어?”

“기다릴까봐…오래 기다렸어요?”

오래 기다리고 뭐고…퇴근시간이 되고 1분도 안 돼서 나타나는 게 너무 대단해서 기다렸다는 생각도 안 든다.

아무리 그래도 대체 어떻게 이렇게 빨리 온 걸까….

래피드가 10번 구역에서 9번 구역으로 공간이동을 해도 이것보다는 느리겠다.

급하게 온 그레이프는 내 앞에 서서 조금 헝클어진 묶은 머리를 손으로 빗질해 정리하고 있었다.

나는 그레이프의 목에 걸린 사원증이 뒤집힌 걸 보고 바로 잡아줬다.

그러고 보니 그레이프는 퇴근한 복장 그대로, 회사에서 일할 때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다.

“옷 갈아입는 게 좋지 않아?”

“옷요?”

“응, 여기는 회사 근처잖아.”

“그래서요…?”

“어…회사에 이상한 소문 나도 난 모른다?”

그레이프는 10번 구역에 있는 회사에 다니는 사람이라면 그레이프가 마법소녀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도 모두 알아볼 정도로 유명하다.

여기는 퇴근하고 나면 한잔 마시고 가는 직장인이 가득한 9번 구역이다.

그런 곳에 사복도 아니고 일할 때 복장 그대로라니…알아보지 못하는 게 이상하다.

“아하하…회사에 소문날 것 같아요?”

“나지 않을까? 회사 사람들도 가끔 여기에서 마시고 가잖아. 이러다가 슬쩍 스치기라도 하면….”

“괜찮아요, 앵거는 그런 거 신경 안 써도 돼요.”

“그래…?”

그레이프는 내 걱정에 묘하게 웃으며 나를 안심시켰다.

어차피 소문이 나서 귀찮아지는 건 퇴사한 내가 아니라 그레이프니까…그레이프가 괜찮다면 딱히 내가 더 뭐라고 할 말은 없다.

나는 그레이프의 옷을 손으로 툭툭 털어 모양을 잡아준 뒤 허리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이렇게 입고 만나니까 뭔가 데이트가 아닌 것 같네….”

“어? 데이트가 아닌 것 같다뇨?”

“아니, 회사에서 보던 모습이 너무 익숙해져서…그냥 회사 끝나고 같이 술 마시러 나온 기분이야.”

덕분에 그레이프와 데이트한다는 긴장감이 사라져서 좋다.

“그, 이…이건 다른 거 아닐까요? 그, 사내 연애 하는 커플…이라던가?”

“난 퇴사했잖아?”

“그러니까, 그렇게 보이지 않을…까요?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셔츠에 검은 바지라 뭐, 쿨비즈를 입은 회사원이라고 못할만한 차림은 아닌데…그렇게 보이려면 나도 사원증 같은 걸 달고 있어야 하지 않아?”

그레이프는 곧바로 사원증을 목에서 벗겨내 주머니에 넣어버렸다.

이어서 자켓도 벗어서 팔에 걸고, 나와 맞춘 것처럼 하얀 셔츠에 검은 바지를 입은 옷차림이 된다.

“앵거가 없으면 제가 벗으면 되죠!”

“응? 어, 음…안 추워? 밤이라 조금….”

“제가 추울 리가 없잖아요?”

“아….”

하긴, 최상위급의 마법소녀가 추위 같은 걸 느낄 리가 없다.

그레이프와 짝을 맞춘 듯한 옷차림이 된 나는 왠지 모르게 가슴 안쪽이 간질간질해져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주변 사람들의 옷차림이 시선에 들어온다.

다들 나와 그레이프와 같은 셔츠에 검은 바지 차림이다.

하긴…여긴 회사 근처의 번화가니까…이런 건 누구나 하는 평범한 옷차림이겠지.

다시 아무렇지도 않게 된 나는 조금 얼굴을 붉히고 있는 그레이프에게 태연하게 물었다.

“근데 어디 갈 거야…?”

“벌써 술 마시기에는…조금 그렇죠? 놀다 갈래요?

“놀아?”

“아, 미리 알아봤는데…오락실 어때요?”

오락실이라니…간다면 가고 싶기야 하지만 그건 데이트가 맞을까…?

내 기억에 있는 오락실은 격투 게임 하다가 잘못되면 바로 현실에서 격투를 하는 격투장이다.

담배 냄새와 시끄러운 게임소리…별로 데이트하면서 갈만한 곳이 아니다.

“…오락실은 데이트일까?”

“데이트…맞지 않을까요?”

“커플은 그러면 다들 오락실에 가서 데이트하는 거야?”

“어? 그, 그런…걸까요?”

“그레이프도 몰라?”

“경험이 없어서….”

질문의 상대가 잘못되었다.

그레이프는 남자를 사귄 경험은 한 번도 없는 연애 초보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야 좋은데….”

“그럼 갈까요? 여기에서 안 멀어요!”

“음…그래.”

나는 그레이프와 나란히 서서 오락실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회사에서 자주 본 옷차림에 회사 가까운 장소, 거기에 오락실이라는 조합이라니…데이트라기보다는 그냥 회사 끝나고 친구랑 놀러 나온 느낌이다.

회사 끝나고 친구랑 놀러 나와본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아무튼 그랬다.

잠시 후, 사람이 가득한 오락실에 도착한 나는 오랜만에 보는 풍경에 넋을 잃어버렸다.

바깥과는 완전히 차단된 느낌, 어린 시절에 봤던 그대로….

네거티브 같은 건 잊어버리고 옛날로 돌아간 듯한 사람들이 깔깔거리며 놀고 있다.

네거티브가 없을 때는 다들 이렇게 놀았지…아니, 네거티브가 있어도 똑같다.

나는 오락실의 분위기에 사로잡혀 그레이프와 함께 비전폰으로 오락실용 코인부터 결제했다.

어떤 게임부터 해 볼까, 게임기들을 살피며 돌아다니자 주변 사람들이 그레이프를 힐끔거린다.

“사람이 많아서 그런지 다들 한 번씩 쳐다보네.”

“신경 쓰지 마요, 무슨 게임부터 할까요?”

“음…이거 할 줄 알아?”

가장 먼저 한 게임은 테트리스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빠르게 위에서부터 떨어져 내리는 블록을 맞춰 가로로 한 줄을 채울 때마다 상대에게 방해 블록이 보내지는 대전 구조를 가진 게임기였다.

그레이프와 한자리에 앉아 게임을 시작한 나는 조용히 그레이프를 순살 시켰다.

“잠깐, 앵거 왜 이렇게 잘해요?!”

“그레이프야말로 왜 이렇게 못해…?”

학창 시절 청춘의 3년을 전부 교실 구석에서 테트리스에 바친 내게는 최상급 마법소녀도 상대가 되지 않는 걸까….

마법소녀의 반사신경이나 운동능력으로 무지막지한 실력을 보여주지 않을까 싶었는데, 조금 실망스럽다.

그레이프가 테트리스로 내게 버틸 수 있는 시간은 30초…상상 이상으로 허접하다.

“그만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그레이프는 나한테 안돼.”

“조, 좀 가르쳐주면서 해주세요…너무 빨리 끝나잖아요.”

“원래 이런 건 지면서 배우는 거야.”

나는 그레이프의 재도전을 5번 정도 받아준 뒤 의기양양하게 고개를 저으며 패배자인 그레이프를 달래주었다.

그레이프는 학창 시절에 체조와 발레를 하다가 마법소녀로 각성했다고 했었나?

그렇게 빛나는 인생을 성실하게 산 사람에게 내 테트리스는 지지 않는다.

“그레이프…테트리스는 몸으로 하는 게 아니야, 머리로 하는 거라고….”

“…앵거 뭔가 평소랑 성격이 다르지 않아요?”

“내가? 음…그레이프가 나한테 진 패배감에 나를 이상하게 보고 있는 건 아니고?”

“재미있어요…?”

“음….”

“다행이다, 역시 게임 좋아하는구나.”

의기양양하게 승리감을 만끽하던 나는 게임기에 팔을 올리고 흐뭇하게 웃는 그레이프의 모습을 보고 나 자신이 바보 같아져 평소대로 돌아왔다.

나는 싱글 플레이 상태가 된 테트리스 게임기를 일부러 벽돌을 쭉 쌓아 게임오버 시킨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앗, 구경하고 있었는데….”

“다른 게임 할까?”

“어? 네….”

나는 적당히 그레이프도 같이 즐길 수 있을 만한 게임을 찾아 앉았다.

이번 게임은 농구 게임…게임이라기보다는 진짜 농구공을 골대에 넣어야 하는, 몸을 쓰는 게임기다.

당연하게도, 이 게임은 그레이프가 나보다 압도적으로 잘했다.

그레이프는 농구 골대를 보지도 않고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린 채 계속해서 한 손으로 공을 골인시켰다.

골대가 좌우로 흔들려도, 불규칙하게 멈추며 움직여도 농구공은 실로 이어진 것처럼 계속해서 골대에 들어갔다.

순식간에 오락실 최고 기록을 달성시킨 그레이프는 게임이 끝나고 나서야 그레이프의 반의반의 반도 안 되는 점수에서 끝난 내 게임기의 점수판을 보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이건…저기, 앵거가 저보다 못하는 게 당연한 거니까….”

“뭐, 그렇지? 역시 잘하네.”

“가, 가르쳐 줄까요?”

“가르쳐줘도 그렇게는 못 할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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