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8화 > 변화 (5)
“네…?”
“아니…그게….”
나는 당황하는 그레이프를 뒤로하고 짧은 고민에 빠졌다.
당연히 섹스할 거라고 생각해서 정리도 하고 준비도 해놨는데…안한다고?
뭐 별로 내가 그레이프랑 하고 싶어서 미칠 정도라거나 하는 건 아니니까 안 해도 괜찮긴 하다.
섹스할 생각에 기대하고 있던 자지가 조금 아쉬워할 뿐이다.
“그럼…그럴까?”
“어…네…! 정말로 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면 오늘은 손만 잡고 자는 거지? 아무것도 안 하는 거다?”
나는 그레이프에게 그래도 좋은지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레이프는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웃는 얼굴로 굳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것도 안 해도 괜찮다면…뭐, 딱히 내가 하고 싶어서 매달릴 필요는 없다.
“음…네!”
“그래…알았어, 그러면…아직 배고프지? 밥부터 먹을까?”
나는 편의점에서 적당히 사 온 것들을 냉장고에서 꺼냈다.
준비된 재료를 때려 넣어 가열하기만 하면 완성되는 밀키트, 탄산음료, 튀김을 본 그레이프의 눈매가 안 좋아진다.
내가 꺼낸 음식들을 본 그레이프는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앵거는 직접 요리해 먹는 거 안 좋아해요?”
“응? 어…그치? 그레이프가 해주면 먹는데, 원래는 잘 안 해 먹어.”
“제가 안 해주면 매일 이렇게 엉망으로 먹는 거예요…?”
“엉망까지야….”
그레이프에게 대답해주며 빈 냄비에 밀키트의 포장을 하나씩 뜯어 쏟아부은 나는 냄비를 가열하기 시작했다.
철저하게 맛을 연구한 사람들이 정확한 비율로 설계해 가열하기만 하면 맛있는 결과물이 나오게끔 만들어진 제품은 내게도 맛있는 요리를 할 수 있게 해준다.
나는 그런 많은 사람의 노력이 담긴 요리를 엉망이라고 말한 그레이프에게 3분 만에 완성된 요리를 대접했다.
“맛있지?”
“…음.”
“…별로야?”
“맛은 있어요.”
“맛은…?”
맛을 제외한 다른 건 없다는 건가?
나는 뭐가 부족한 걸까 하며 음식을 입에 집어넣었다.
간도 적당하고, 불맛도 느껴지고…별로 문제가 될만한 맛은 아니다.
“아…마법소녀는 그게, 마력에 예민해져서…자연육하고 인공육의 맛을 다르게 느껴서 그래요. 맛이라고 해야 할까…미세한 마력이 몸에 녹아드는 감각이 달라요.”
“어? 그래…?”
“음…네, 그래도 식당 음식에 쓰는 건 몰라도 이건…그, 방부제 성분이 들어가면서 마력의 맛이 더 오묘해지거든요…튀김도, 안 좋은 느낌이고….”
이건 생각도 해보지 못한 사실이다.
편의점에서 파는 음식이 건강하지 못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마법소녀가 볼 때는 먹는 것 자체가 꺼려질 정도로 이상한 음식이라니….
먹어서 문제 될 일이 없다는 걸 알고 있어도 찝찝해지는 얘기였다.
“…버릴까?”
“아뇨?! 못 먹는다는 얘기는 아니에요!”
나는 그레이프에게서 내가 만든 밀키트 3분 요리를 가져가려 했다.
하지만 그레이프는 내가 손을 움직이는 것보다도 빠르게 그릇을 들어 올렸고, 내가 뺏어가기라도 하는 것처럼 빠르게 먹어 치워버렸다.
순식간에 먹을 걸 전부 없애버린 그레이프는 약을 삼키는 것처럼 물을 마시고는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하아…자, 잘 먹었습니다.”
“괜찮아?”
“괜찮아요! 먹는다고 문제 되는 건 아니니까…그래도…저, 다음부터는…제가 먹을 거 사다 줘도 돼요?”
“어? 사주게…?”
“네…인공육이어도 괜찮은 게 있고 이상한 게 있거든요.”
그레이프가 나는 알아볼 수 없는 차이를 보고 골라서 직접 사 오겠다고 하는데 내가 거절할 이유는 없다.
이왕 먹는 거 그레이프도 나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걸 먹는 게 좋겠지.
그레이프가 사 온다 하면 어차피 내 돈이 나가는 것도 아니다.
“그럼 뭐, 맘대로.”
그레이프와 나는 식사를 마친 뒤 같이 설거지를 했다.
내가 비누칠을 하면 그레이프가 물로 헹궈서 식기 건조대에 정리해 올린다.
겨우 냄비 하나와 식기뿐인, 굳이 둘이서 같이 설거지를 해야 하나 싶은 양이었지만, 그레이프는 내 옆에서 자리를 비켜주지 않았다.
“…샤워할래?”
“앗, 네.”
설거지를 끝내고 딱히 할 게 없어 가만히 서 있던 나는 나처럼 서 있는 그레이프에게 샤워실로 가라고 턱짓하며 말했다.
잠시 후 샤워실로 들어간 그레이프가 샤워하며 나는 물소리가 들린다.
나는 물소리를 들으며 말없이 영양제를 먹었다.
“하아…앵거도 샤워…할래요?”
“나는 그레이프 오기 전에 씻어서 괜찮아…잠옷 있어?”
“네? 아뇨….”
“이거 입을래?”
“네!”
영양제를 먹고 뱃속이 끈적해지는 동안 그레이프는 샤워를 다 하고 속옷만 입고 나왔다.
그레이프를 본 나는 옷장에서 검은색 티셔츠를 건네줬다.
그러자 그레이프는 고개를 끄덕이며 곧바로 셔츠를 받아 입었다.
분명 내가 입을 때는 그냥 조금 헐렁한 셔츠였는데, 그레이프가 입으니 굉장히 야해 보인다.
가슴 쪽이 쭈욱 당겨져서 옷이 작아 보이기까지 한다.
분명 내가 입을 때는 더 긴 옷이었는데…그레이프가 입으니 당겨져 올라가서 팬티가 다 보인다.
“그러면…뭐하지….”
식사하고, 샤워하고 난 그레이프와 내가 뭐를 하면 좋을까.
잠시동안 이어진 침묵 속에서 나는 그제야 그레이프와 내가 평소에 대화할만한 화젯거리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회사에 같이 다닐 때는 회사 얘기라도 했지만, 지금은…정말 할 게 없다.
“지금 보니까 우리 섹스 안 하면 할 게 없네.”
“어…?”
“뭐…섹스밖에 안 했으니까.”
그렇게 섹스하고, 같이 회사에 다녔는데도 막상 둘이 있으면 할 얘기가 없다는 사실에 피식 웃으며 말하자 그레이프는 갑자기 심각한 표정이 되어서 입을 꾹 다물었다.
그레이프랑 나는 섹스만 하는 사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섹스 외에는 공통된 화젯거리가 없었다.
나는 비전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한 뒤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직 이르긴 한데…잘까?”
“네? 아니, 같이…뭔가, 대화라도…아니면 뭔가…회, 회사 얘기는 어때요? 오늘 무슨 일 있었는지….”
“회사 얘기는 별로 하고 싶지 않은데….”
“아, 그러면….”
그레이프는 뭔가 할 말이 있는지 입을 벌리고 있다가 한숨을 내쉬며 다시 굳게 다물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게 된 그레이프를 뒤로하고 옷을 벗어 속옷 차림이 되었다.
그대로 매트리스로 걸어가 자리에 누운 나는 그레이프에게 옆으로 오라고 손짓했다.
“할 얘기 없으면 자자. 요즘 이상하게 잠이 많아졌거든.”
“앵거, 속옷….”
“나 원래 속옷만 입고 자. 그리고 이미 볼 거 다 봤으면서 뭐 어때.”
“아니, 그게…커졌…그….”
“커지면 안 돼?”
“앗, 네…음…네에…아뇨, 괜찮죠….”
그레이프는 말없이 내 옆에 다가와 천천히 누웠다.
바로 옆자리에 그레이프가 누우며 좁은 매트리스가 가득 찬다.
그레이프는 눈을 크게 뜨고 내가 움직이는 그대로 눈동자를 움직이고 있었다.
“손만 잡고 자는 거지?”
“마…맞아요.”
“음….”
나는 그레이프와 내 위에 얇은 이불을 덮었다.
조심스럽게 그레이프의 배 위까지 이불을 덮어주면서도 묘한 기분이 든다.
그레이프가 생각보다 훨씬 얌전하다.
그레이프는 맹견…잘 가르치고 본능이 강해 안돼, 기다려를 가르쳐줘야 하는 짐승이다.
나는 진심으로 내 말을 잘 듣도록 힘내고 있는 그레이프를 가만히 바라보며 이불을 덮어주던 손을 멈췄다.
이참에 그레이프가 정말로 참고 잠까지 잘 수 있는지, 자제심이 어느 정도인지를
확인해보는 게 좋을까?
“앗…!”
“아, 미안.”
이불을 놓은 손끝으로 그레이프의 가슴을 살짝 스쳐 지나간다.
그레이프는 깜짝 놀라 허리를 살짝 들긴 했지만,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구속구에 잡혀있는 것처럼 몸을 일으키지 않으려 애를 쓴다.
육체적인 자극이 더해져도 이렇게 잘 참다니…말로만 참을 수 있다고 한 게 아니었다.
나는 그레이프에게 솔직하게 감탄했다.
유두는 브래지어가 무색할 정도로 빳빳하게 세워지고 얼굴도 조금 상기되어 있지만, 덮치지는 않는다.
“그레이프, 대단하네.”
“네…?”
“안 덮친다고 하니까 진짜 안 덮치잖아.”
“어어어어…하아아….”
나는 개를 칭찬해 주듯 그레이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그레이프는 혼란스러워하며 점점 위에서부터 떨어져 내리는 목소리를 내다가 눈을 질끈 감고 달콤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을 보고 혹시 머리를 만져주는 것도 자극이 되려나 싶어 손을 뗀 나는 자리에 누우려다가 빳빳하게 세워져 이불을 들어 올리고 있는 내 자지를 발견했다.
“저기…앵거…그거, 계속 서 있는데….”
“아, 응…나도 그레이프랑 하고 싶었거든.”
“어? 어? 그래요?! 그, 그러면…!”
나와 마찬가지로 발기해있는 자지를 보고 있었는지, 그레이프가 계속해서 커져 있는 자지를 걱정스러워하며 말했다.
나는 그런 그레이프에게 덤덤하게 사실을 말해주며 자리에 누웠다.
그러자 그레이프는 갑자기 상체를 벌떡 일으키며 놀란 목소리를 냈다.
“근데 그레이프가 괜찮다고 했으니까….”
“네?”
“그레이프가 손만 잡고 자자면서…?”
“읏…흐으으….”
나는 그레이프에게 가만히 누워서 잘 거 아니었냐고 말하듯 잡은 손을 매트리스 쪽으로 잡아당겼다.
그러자 갑자기 울상이 된 그레이프가 몸을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레이프는 다시 천천히 내 옆에 누워 방 안이 추운 듯 이불을 끌어당기며 앓는 소리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