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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소녀 최면물-207화 (207/299)

< 207화 > 변화 (4)

그레이프는 내 말을 듣고 뭔가 생각에 빠진 듯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레이프의 모습을 보며 자지 상태를 확인했다.

커져 있기는 하지만 별로…엄청나게 하고 싶어서 미칠 것 같은 상태는 아니다.

바로 옆에 있어서 보이는 커다란 가슴이나, 가슴 때문에 더 가늘어 보이지만 사실은 탄탄하게 조여져 있을 뿐인 허리라던가…육체미가 가득한 몸이 내게 톡톡 부딪힐 때마다 자지가 멋대로 움찔거리긴 해도 이성을 잃을 것 같지는 않다.

기대감과 흥분은 있어도, 급하지 않다.

그레이프가 이렇게 바로 옆에 있어도 미칠 것 같다거나 억지로 하고 싶다거나 하지 않는다는 건…역시 내가 그렇게 발정나는 데에는 뭔가 다른 이유가 있다는 걸까?

아니면 단순히 내가 그레이프를 이길 수 없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어서 몸이 스스로 자제하는 걸까….

어느 쪽이든, 그레이프에게 내가 미칠 정도로 발정나지 않는 건 확실하다.

“저기, 그러면…잘…지냈어요?”

“응? 아….”

그레이프의 비전폰에 등록되어있는 회사 사람들의 연락처를 내 비전폰의 차단 목록에 전부 등록시킨 그레이프가 작게 안도의 한숨을 쉬며 인사했다.

겨우 이틀 안 본 건데, 잘 못 지낼 게 뭐 있다고 이렇게 오랜만에 만난 것처럼 말하는 걸까.

나는 그레이프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응, 뭐 주말 동안 이틀 안 본 건데.”

“그…그렇죠, 식사는? 굶지는 않았어요?”

“잘 먹었어, 갑자기 배가 엄청 고파져서 이것저것 사먹었고…저거 봐, 저거 전부 내가 먹은 거야.”

“네…?”

나는 방구석에 모아둔 쓰레기봉투를 턱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자 그레이프는 깜짝 놀라며 봉투에 다가가더니, 묶어서 잘 정리해둔 봉투를 풀었다.

내용물을 확인하는 그레이프에게서 놀란 목소리가 들려온다.

“튀김에, 튀김, 튀김을 몇 개를!”

“응? 왜?”

“앵거는 왜 예전부터 먹어도 이런 것만 먹는 거예요?”

“맛있었는데?”

“맛이야 있겠지만…어떻게 저 없을 때 골라도 전부 이런 것만…인공 합성육…화학 감미료에….하아아….”

배고파서 맛있게 먹었는데 왜 저러지?

나는 대체 뭐가 문제인가 싶어 그레이프를 멀뚱멀뚱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러자 그레이프는 내 반응을 보고 내가 정말 왜 그러는지 모른다는 걸 알아차렸는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것만 먹다가 몸에 무슨 일 일어나면 어떡하려고 그래요…먹은 양도 그렇고….”

“배고파서.”

“이러다 배탈 나면….”

“아무 일도 없었고 먹고 싶은 거 기분 좋게 먹으면서 잘 쉬었어.”

“쉬었…윽…네에….”

이틀뿐이었지만 만족스러운 휴식이었다.

나는 머리가 아픈지 이마에 손을 대는 그레이프 옆에 쪼그려 앉아 열어젖힌 쓰레기봉투를 다시 잘 묶었다.

그러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그레이프를 본 나는 그레이프가 내게 한 인사를 되돌려줬다.

“그레이프는? 잘 지냈어?”

“…못 지냈어요.”

“응?”

내가 잘못 들었나 싶어 고개를 돌리자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레이프의 얼굴이 보인다.

그레이프는 조용히 눈을 내리깔고 입술을 깨물고 있다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려 내 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그레이프는 그동안 좀 피곤한 일이라도 있었는지 눈 밑이 조금 꺼져있었다.

“이틀 동안 무슨 일 있었어? 습격이 잦았나…?”

“마법소녀 쪽에서는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냥…그야, 잘 지낼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그러면 왜?”

“그야, 당연히….”

잠시 내 눈치를 본 그레이프는 뭔가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작은 한숨, 아쉬움, 걱정…불안해하면서도 조심스러워하는 태도가 눈에 보이는 것만 같다.

그레이프는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화는…풀어 준 거예요?”

그러고 보니 내가 그레이프한테 주말에 오지 말라고 할 때 조금 화를 내긴 했지….

그것 때문에 못 지냈다는 얘기였나 보다.

나는 그레이프의 앞에서 보란 듯이 스트레칭을 하며 대답했다.

“이틀 정도 쉬니까 근육통도 많이 사라졌고…허리도, 괜찮은 것 같고….”

“미안해요….”

“그레이프가 나를 마음대로 쓰고 가지고 놀 수 있는 장난감 취급해서 여기저기 나쁜 소문도 내고 놀고 집에서는 자위기구 취급한 줄 알았는데….”

“그건 절대 아니에요!”

“그래, 그건 아닌 것 같으니까…뭐…일단은.”

“이, 일단은….”

그레이프를 안심시켜주면서도 혹시나 자제심이 또다시 풀려버리지 않도록 확실히 경고한다.

또 못 참고 덮치면, 또 그러면 더 큰 문제가 될지도 모른다.

그 사실을 깨달은 그레이프는 내 시선을 피하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틀간, 주말 동안 잘 생각해봤는데…제가 전부 잘못했어요….”

“뭘?”

“그냥 전부요, 그러니까…못 참은 것도 있고…아직 앵거는 오해가 많이 남았을 텐데 전부 풀려고 노력하지 않았던 것도 있고….”

“그리고?”

“…아무튼, 다 잘못했어요.”

“흐음….”

맹수에게 목줄을 채운 게 이런 느낌일까.

확실히 그레이프가 전보다 훨씬 조심스러워졌다는 게 느껴진다.

나보다 훨씬 힘이 세면서 내게 안절부절못하는 그레이프의 모습을 보자 묘한 지배감에 휩싸인다.

“앞으로 안 그럴 거야?”

“노…노력할게요.”

“내가 싫다고 하면 억지로 안 덮칠 거야?

“최선을 다해볼게요…!”

섣불리 그러겠다고 하지 않는 게 오히려 마음에 든다.

그레이프가 얼마나 성욕이 많은지는 그레이프보다도 내가 더 잘 안다.

만약 안 그러겠다. 앞으로 안 하겠다고 했다면 그건 거짓말이었을 테고, 분명 언젠가 어기고 말았겠지.

“좋아, 그러면 만약 덮치면 어떡할 거야?”

이번 기회에 앞으로 그레이프와 어찌 지내면 좋을지를 확실히 해 두는 게 좋을 것 같다.

나는 이 정도면 그레이프를 충분히 혼내준 것 같아 더 얘기하지 않고 앞으로 어찌할지에 대해 물어봤다.

그러자 그레이프는 자신을 믿어주지 않는다고 생각했는지 절박함이 묻어나오는 목소리로 살짝 울먹이며 말했다.

“그러지 않도록 노력….”

“그러니까, 노력해도 실수로 덮치면?”

“안 그럴게요!”

혹시라도 여기에서 대답을 잘못하면 내가 무슨 짓을 하기라도 할 거라고 생각했는지 그레이프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런 그레이프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혼내거나 압박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안 그러는 게 아니라…그레이프는 마법소녀니까 음액에 중독되어서 못 참게 되는 날이 있을 수도 있잖아.”

“어? 제가요…?”

“그럴 때는 덮쳐도 어쩔 수 없다는 걸 나도 이해하니까…만약에 그랬을 때 어찌할 건지에 대해서…그럴 일이 혹시 아예 없어?”

“그…렇죠? 그럴 수도 있…죠? 그러고 보니까 그러…네요…!”

얘기하다가 정말 혹시나 싶어 물어본 나는 그렇구나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최상급 마법소녀여도 음액에 완전히 저항하지는 못하는 건가.

최상급 중에서도 가장 방어력과 저항력이 뛰어나다고 평가받는 그레이프가 그렇다고 했으니 확실하다고 생각해도 좋을 것 같다.

“그러면 만약 또 덮치면 그래도 이성 돌아오자마자 참고, 사과할 수 있어?”

“네! 그럴게요! 해도 도중에 멈출게요!”

“주말 동안 안 오고 잘 참아줬으니까…그레이프도 참으려면 참을 수 있다는 건 알겠고…믿어도 돼?”

“참을 수 있어요…! 참을게요!”

“그레이프가 너무 기분좋게 하는 바람에 내가 못 참아서 실수로 해달라고 해도 한번쯤은 참아줄 거야?”

“…네…에!”

그레이프는 빠르게 눈동자를 굴리더니 나와 눈을 마주치는 것을 피하며 말했다.

뭔가 대답이 느리긴 하지만, 일단 참아준다고 하니 참아주는 걸로 생각해도 괜찮겠지.

“그러면…그레이프가 내가 한 번 더 믿을 수 있게 해줬으니까 나도 믿어줄게.”

“네!”

“앞으로 만약 덮치고 싶거나 하면 물어보고, 내가 괜찮다고 할 때만 적당히…그 외에는 무조건 내가 위에 올라갈 거야. 알았어?”

“네! 네!”

“이제 나 섹스용 딜도로 안 보는 거지?”

“그건 처음부터 그렇게 안 봤어요!”

지금까지 순종적으로 그러지 않겠다,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하던 그레이프가 오늘 처음으로 억울해하며 화를 냈다.

중압감이 실린 마력이 내 전신을 덮어 꽉 조이듯 압박한다.

나는 그레이프의 압력에 압도되어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랬구나…섹스용 딜도로 본 적은 전혀 없었구나.

어려운 설득 없이 단순한 압박만으로 진심이라는 게 너무 선명하게 전해져 온다.

앞으로 이런 말은 하지 말아야겠다.

“으, 응…미안….”

“아니, 저야말로…미안해요…그렇게 본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게 해놓고…제 잘못이에요.”

“아, 아냐…그…음, 알았어, 앞으로 그레이프가 나를 섹스용 딜도로 본다는 생각은 안 할게….”

심장 소리가 귀를 가득 메운다.

존재감에 눌린다는 게 이런 걸까.

그레이프의 기운 자체에 패배해 힘없이 몸을 움츠린 나는 애써 심호흡하며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아, 아, 아무튼…그러면…뭐더라….”

“…앞으로 섹스할 때 앵거 강제로 덮치지 않고, 강요하지 않고, 위에 올라타고 싶을 땐 물어보고 올라타고 되도록 밑에 깔리도록 하고….”

“그래, 응, 잘 아네….”

“앵거가 싫어하지 않게 열심히 할게요…!”

포식자 앞에 노출된 피식자처럼 잠시 혼란에 빠져있던 나는 그레이프의 말을 듣고 다시 정신을 차렸다.

그레이프의 마력에 잠시 겁먹었지만, 그레이프는 내가 무서워해야 할 상대가 아니다.

목줄만 잘 잡고 있으면 나보다 강한 힘으로 나를 보호해주는, 내 말을 잘 듣는 맹견에 가깝다.

“앵거가 하기 싫으면…그, 오늘도…안하고 그냥 손만 잡고 자도 되니까….”

“응…? 어, 그래…?”

“네…! 손만 잡고 자요!”

나는 그레이프와 내가 손만 잡고 자는 모습을 상상해 보려 했다.

그레이프와 손만 잡고 자는 내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지질 않는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도중에 갑자기 그레이프가 올라타 섹스하자고 허리를 쿵쿵 찍어댈 것 같다.

"…정말 손만 잡고 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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