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5화 > 변화 (2)
[그러지 마시고 잠시 생각만이라도….]
“싫은데요.”
[정말, 정말…제가 사과드릴게요, 네?]
“사과를 왜 하시죠? 아무튼 싫은데요.”
대체 뭐 때문인지 여직원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매달리듯 말했다.
그래봤자 내 마음은 전혀 흔들리지 않는다.
목소리 나간 앵무새가 앵앵 우는 것처럼 들려서 듣기 싫기만 하다.
[아…그러지 마시고…하아…앵거 씨 오셔서 아무 일도 안 하고 쉬셔도 되니까….]
“그건 또 무슨…사이비 종교 권유하세요?”
[네…?]
“개소리 말라는 얘기였습니다. 끊습니다.”
아무 일도 안 해도 되면 복직을 왜 시키지…?
그냥 와서 욕받이나 해 주고 돈이나 받아 가라는 말이나 다름없다.
냉정하게 거절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전화기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끊어버렸다.
곧바로 번호 차단…이걸로 안심이다.
어딜 낮부터 재수없게…시간을 보니 점심시간인데 점심이나 먹을 것이지….
그런데 전화를 끊자마자 이번에는 또 다른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하…앵거 씨, 납니다.]
“납니다가 누구시죠?”
[…과장입니다.]
“허….”
나는 어이가 없어서 비전폰에 대놓고 한숨을 쉬었다.
여직원에 이어서 과장이라니…아니, 이렇게 빨리 전화가 이어서 온 걸 보면 과장이 먼저 여직원한테 말해보라고 시키고 전화가 차단되니까 직접 건 건가.
“과장요? 전 백수인데 대체 누구의 과장님이시죠?”
[하아아…앵거 씨, 정말 이렇게 나올 거야?]
회사의 노예 같은 것보다 더 서열이 높은 백수로서 당당하게 말하자 과장은 비전폰 너머로 이를 아득아득 갈며 화난 목소리를 냈다.
당연한 말을 한 건데 왜 화를 내는지 모르겠다.
백수한테 과장님 소리라도 듣고 싶었던 걸까…?
“죄송한데 왜 반말이시죠…? 전 그쪽 부하직원이 아닌데….”
[됐고, 부장님도 퇴사 안 한 걸로 해주자는 말까지 하셨으니까 앵거 씨 내일부터 다시 출근해.]
이걸 대체 뭐라고 대답해줘야 하는 걸까.
나는 상상을 뛰어넘는 개소리에 할 말을 잃어버렸다.
…누구 맘대로 누굴 복직시켜?
[앵거 씨 이 개난리를 펴놓고 지금 책임도 안 지겠다는 건 아니지?]
“예?”
[와…말하고 보니 어이가 없네, 어떻게 이런 짓을 하고 가? 너 양심 있어?]
양심이 있냐니…과장이 그런 말을 하니 굉장히 이상한 기분이 든다.
너라는 호칭과 함께 내가 무언가 난리를 피워 났다는 말을 들은 나는 잠시동안 내가 무슨 잘못을 했나 고민에 빠졌다.
내가 뭘 했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한 게 없는데….
이전에는 이런 말을 들으면 정말 내가 뭘 잘못한 줄 알고 일단 죄송하다는 사과부터 하고 봤을 것이다.
하지만…지금의 나는 그런 자신감도 자지도 작은 찐따가 아니다.
“제가 뭘 했죠?”
[몰라서 물어? 와…진짜 앵거 씨 사람 아니다…이런 인간을 내가 지금까지 부하로 뒀네…?]
“아니, 제가 뭘 했냐고요…혹시 벌써 귀가 어두우세요…?”
[뭐? 뭐라고했어? 야!]
“걱정해드린 건데 왜 화내세요…전 잘 들리니까 소리치지 마시고….”
어떻게 자기 몸을 걱정해주는 사람한테 화를 내는 걸까….
너무 몰상식하고 폭력적인 대응에 살이 떨린다.
자꾸 이렇게 날 괴롭혔다가는 실수로 그레이프에게 울면서 전화를 걸어버릴 것 같다.
[야, 니가 양심이 있으면 출근해서 팀장님한테 오해 풀어놔라…알았어?]
“예?”
실수로 전화를 끊고 그레이프에게 전화를 걸어버릴 뻔한 나는 뒤이어 들려온 얘기에 어쩔 수 없이 손을 멈췄다.
그레이프가 오해를 하고 있다니…대체 무슨 얘기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뭔 말을 할지 궁금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자 비전폰에서 과장의 꽥꽥거리는 오리 울음소리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차피 너 하는 일도 없으니까 구석에 앉아서 숨이나 쉬라고. 이렇게 말해도 못 알아먹어?]
“무슨 오해죠?”
[씨발…야! 니가 팀장님한테 우리 다 쓰레기처럼 말하고 나간 거 아냐!]
“어…제가요?”
내가…?
언제…?
내가 정말로 할 법한 얘기에 순간적으로 정말 내가 그랬었나 하고 믿어버릴 뻔한 나는 아슬아슬하게 내가 그런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직 그런 짓은 하지 않았는데 이런 누명을 씌우다니…억울함에 치가 떨린다.
[그럼 앵거 씨 말고 할 사람이 있어? 그리고 앵거씨가 한 말이 아니면 팀장님이 저러겠어?]
“뭘 하는데요?”
[그걸 몰라서 물어 지금?]
“모르는데요?”
난 회사에 나가질 않는데 회사에 무슨 일이 있는지 어떻게 알지…?
너무도 당연한 논리를 깨부수는 발언이 충격적이다.
다행히 더 설명할 필요 없이 과장도 자신의 말이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는지 말을 멈췄다.
그러자 이번에는 바로 옆에 서 있던 것 같은 여직원이 전화에 끼어들며 말했다.
[앵거 씨…팀장님이 요즘 화도 많이 내시고, 엄청 날카로워지셨어요….]
“그래요…?”
[일하실 때 기분도 점점 안 좋아지시고 웃지도 않으시고…오늘은 특히 심하셔서….]
나는 기분 좋게 내 위에서 허리를 흔들어대던 그레이프의 모습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그레이프가 요즘 기분이 안 좋고 화도 많이 냈다고…?
맨날 섹스하면서 헤헤거리기만 했는데….
아침에도 웃으면서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나갔고, 집에 올 때도 웃으면서 다녀왔습니다 하고 왔고….
내가 본 그레이프는 언제나 기분 좋게 섹스하기만 했다.
그레이프가 회사에서 기분이 나빴다면 내 잘못이 아니라 회사에 있는 사람들 잘못이다.
[자기가 팀장이고 팀워크 좋은 팀을 만들려고 그렇게 노력했는데 앵거 씨 나가는 거 보고 느낀 거 없냐고….]
“…그리고요?”
[나중에도 뭐 이번에도 자기 생각 들어주는 척하고 앵거 씨 내보내듯 일 망치실 거죠 이러시고…어차피 자기가 잘 해줘도 이런데 잘해주려고 노력해봐야 뭐하냐고…그러셔요…앵거 씨가 그렇게 갑자기 나가서….]
“제 잘못이라고요?”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 비전폰을 멍하니 내려다봤다.
그게 대체 왜 내 잘못이지…?
애초에 자기들이 잘못한 걸 그대로 받고 있는 거 아닌가…?
[하…앵거 씨, 그래 그냥 그럼 복직하지 말고 팀장님한테 전화라도 해.]
“어…왜요?”
[오해라도 풀어 놓으라고…그정도는 해줄 수 있잖아.]
전화를 다시 뺏은 과장은 내가 복직할 생각도, 잘못했다는 생각도 없다는 걸 알아줬는지 힘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마치 당연히 내가 복직할 줄 알았다는 태도가 황당하다.
하지만…하긴, 평범한 A 시 주민이었다면…복직했을지도 모르겠다.
A 시에는 다른 곳보다도 안전한 이곳에 머물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하는 사람들이 가득하다.
나는 래피드의 머리카락을 팔아서 돈을 마련할 수 있으니까 복직을 하지 않아도 되지만, 그게 없었다면 지금쯤 어디든 상관없으니 취직하려고 혈안이 되어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일할 곳을 찾지 못해 이 회사의 취업하기 전의 나처럼 고생하고 있었겠지….
“어떤 오해를 풀면 되죠?”
[하아…내가 이런 것까지 가르쳐 줘야 돼? 정말로 몰라?]
“모르는데요…?”
[진짜 퇴사해도 달라진 게 없네…팀장님한테 우리가 괴롭혀서 나간 게 아니라 앵거씨가 그냥 나가고 싶어서 나간 거라고 얘기하라고.]
과장의 말을 들은 나는 내가 들은 말이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싶어 잠시 말을 잊고 고개를 기울였다.
…괴롭혀서 나간 게 아니라고?
내가 나가고 싶어서 나간 건 맞긴 한데, 괴롭힌 적이 없다 이 말인가 지금…?
“어…그렇게 말하면 된다고요?”
[그래, 당장 해.]
과장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전화가 끊겼다.
나는 자기들이 잘못해놓고 아무런 상관도 없는 나에게 사과하라고 시키는 사람들의 태도에 황당해 잠시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서 있었다.
이런 거로 나더러 잘못했다고 하라며 전화까지 하다니 정말 이상한 사람들이다….
점심 식사도 하기 전인데 이렇게 속을 역겨워지게 만들다니…기분 나쁘다.
그래도 그레이프가 요즘 기분이 안 좋다는 말은 신경 쓰인다.
오늘 특히 기분이 안 좋아 보인다는 건 혹시 주말에 섹스를 하지 못해서 그런 걸까….
그레이프한테 전화해달라고 했으니, 전화해주긴 해야겠지.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레이프한테 전화를 걸었다.
그러자 그레이프는 기다린 것처럼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여, 여보세요?]
그레이프의 떨리는 목소리를 들은 나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사과해달라니…어떻게 말하면 좋을까.
그레이프한테 대체 뭘 사과하면 좋을까….
[앵거…? 여보세요? 드, 들려요…? 전화 하고 있어요…?]
아무리 예전 상사였다고 해도, 이렇게 예의 없고 난폭하게 전화했다고 해도 상사는 상사다.
그런 상사가 나 때문에 팀장님의 기분이 나빠졌다고 하니 사과하긴 해야겠지….
뭘 사과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그게 맞는 것 같다.
“팀장님….”
[…네?]
오랜만에 내게 팀장으로 불려진 그레이프는 전화기 너머로 당황한 목소리를 냈다.
말하자마자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지 목소리가 심하게 떨린다.
그레이프는 불안한 목소리로 내게 다급하게 말했다.
[애, 앵거…화, 화 아직 안 풀렸어요? 제, 제가 잘못했으니까…오늘, 오늘 만나서….]
“아, 아닙니다…팀장님…과장님한테 다 들었습니다….”
[…예?]
“죄송합니다…흑!”
나는 과장이 시킨 대로 그레이프에게 사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