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8화 > Dayte (4)
“으으음…! 하아아아~”
안락한 침대에 누워 5번 구역에 도착한 나는 지하철에서 내리자마자 일단 기지개부터 켰다.
로제가 제대로 마사지해준 덕에 온몸이 개운하다.
근육통이 없는 건 아니지만, 훨씬 줄어들었다.
로제의 마력 때문인지 근육통이 사라진 것뿐만 아니라 몸에 힘이 넘치기까지 한다.
어쩐지 몸이 빵빵해진 것 같다고 해야하나, 피가 너무 잘 통해서 근육이 부풀어 오른 느낌이다.
허리의 상태도 나쁘지 않고…팔다리도 가볍다.
몸을 대충 푼 나는 래피드가 아직 0번 구역에 있는 걸 확인한 뒤 먼저 수족관에 가 있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넓고 큰 역에서, 더 큰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사람은 건물 크기에 비해 그렇게 많지 않다.
5번 구역은 쇼핑몰을 중심으로 기획된 구역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다른 구역에 더 큰 쇼핑몰이 들어선 뒤 반쯤 망해버린 쇼핑몰이 있는 곳이었다.
반쯤 망했다고 하는 이유는, 쇼핑몰은 죽었지만, 쇼핑몰 근처의 여러 구경거리가 있는 곳들은 멀쩡하기 때문이다.
실내 놀이공원, 아쿠아리움, 공중을 날아다니는 괴수가 나타난 뒤로도 지금까지 쓰러지지 않고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 고층 전망대….
5번 구역에 있는 수많은 빌딩들을 4번 구역 안쪽과 다른 구역을 구분하는 성벽같다고 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5번구역은 넓고, 거대했다.
쇼핑센터는 상당히 볼 것 없게 변해버렸지만, 구경거리는 많다.
오히려 쇼핑몰 때문에 언제나 북적거렸던 거리가 손님을 빼앗겨 한산해지면서 다른 구경거리들을 찾아오는 사람들의 만족도는 늘어나기만 했다.
나는 손님이 얼마 없는 쇼핑몰을 지나 지하 통로를 통해 아쿠아리움으로 향했다.
약속 시간 까지는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아있다.
미리 자리를 봐 두고, 좋은 자리에 앉을 수 있도록 해 봐야겠다.
레스토랑은 아쿠아리움의 바로 옆에 자리했다.
아쿠아리움 출구의 바로 옆쪽, 기념품 가게에 이어진 입구가 보인다.
그 앞에서 나는 예상하지 못한 문제에 맞닥뜨렸다.
“이런….”
손님이 없어 보여, 바로 들어갈 수 있을 줄 알았더니…웨이팅이 있다.
가게 바로 앞에 설치된 작은 화면에는 앞으로 50분은 더 기다려야 한다는 글자가 적혀 있다.
이건…실수다.
예약해 둘 걸 그랬다.
“아…기다려야 하는 거예요?”
“우왓?!”
나는 갑자기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깜짝 놀라며 뒤돌아보니, 어느새 다가온 래피드가 놀란 나를 따라 하듯 놀라서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나는 갑자기 나타난 래피드에게 놀라며 시간을 확인해봤다.
아직 약속 시간이 되기 전이다.
“앗, 죄송해요…저기, 일반인한테 말 거는 게 너무 오랜만이라서…온 줄 아시는 줄 알고….”
“아…아뇨, 괜찮아요.”
나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상황을 파악했다.
래피드가 친한 상대는 다들 마법소녀였을테고…마법소녀는 예민한 감각을 지녀 등에도 눈이 달린 것처럼 주변을 인지할 수 있다.
아마도 공간이동으로 나타나, 래피드가 온 것을 내가 당연히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해 뒤에서 다가와서 말을 건 모양이다.
“어…조금 일찍 오셨네요?”
“앗, 네…음…그게, 성격이라….”
공간이동을 하는 래피드에게 있어 약속 시간에 늦을까 봐 조금 일찍 출발해 약속 장소에 일찍 도착하는 건 불필요한 일이다.
그런데도 일찍 온 건, 래피드의 말 대로 그냥 성격인 것 같다.
래피드와 나는 그 말을 끝으로 잠시 할 말을 잃고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래피드의 옷차림을 살펴볼 수 있었다.
코르셋처럼 장식된 허리가 꽉 조여진 원피스 형태의 큰 셔츠, 단추가 두 개 쯤 풀어져 드러난 가슴골, 손에 든 작은 가방, 평소보다 단정하게 묶은 머리…굽이 높지 않아 편하게 걷기 좋아 보이는 귀여운 구두.
전투 시에 입는 레오타드 같은 옷도 몸매가 다 드러나 야하지만…이것도 상당하다.
코르셋과 셔츠가 합쳐진 듯한 원피스라니…코르셋 셔츠라고 부르면 되는 걸까?
허리를 꽉 조여 야한 몸매가 훤히 드러난다.
귀엽다면 귀엽다 할 수 있지만, 섹시함이 더 크게 느껴지는 복장에…래피드에게는 필요 없을 가방까지.
4번 구역에서 볼 때보다 훨씬 더 꾸몄다는 게 느껴지는 옷차림이다.
“…옷이 예쁘네요.”
“아, 네?! 앗, 그래요? 아, 이거…이번에 산 건데, 조, 조금 노출이 좀 있죠…? 단추가 안 잠겨서….”
“아.”
일부러 열어둔 게 아니라, 가슴이 너무 커서 잠그지 못한 건가.
순진하게,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말한 것 치고 너무 자극적인 말이다.
래피드 또한 자신이 한 말이 조금 야하다고 생각했는지 말하자마자 얼굴을 붉혔다.
“지금 한 말은 잊어주세요…아니, 그래도 정말 안 잠겨서…으…아무튼…저, 앵거…씨? 앵거 씨도…그게…옷이….”
래피드는 내 몸을 훑어보다가 말을 멈췄다.
나는 그냥 깔끔하게 입었다고 할만한 셔츠에 검은 바지를 입고 있다.
별로 잘 입었다고 할만한 옷차림은 아니다.
“음…무난…하죠?”
“아! 아뇨, 그게 아니라….”
칭찬하기에는 애매한 옷이다.
그 사실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있는 나는 쑥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래피드는 손을 앞으로 내밀어 고개를 젓더니, 생각지도 못한 말을 꺼냈다.
“옷이 아니라…몸이 그게, 전보다 좋아지신 것 같아서…뭔가, 신기해서요.”
“몸요…?”
“아! 저기, 투시했다거나 그런 게 아니고…투시는…비슷한 걸 못 하는 건 아니지만, 안 했어요!”
투시도 할 수 있는 건가.
나는 부끄러워 하는 래피드의 말을 듣고 내 몸을 살펴봤다.
그러고 보니…래피드의 말대로 몸이 조금 좋아진 것 같기도 하다.
말랑한 뱃살도 조금 단단하게 변한 것도 같고, 팔도 팽팽하고…옷이 살짝 조일 정도다.
바지도 여유 공간이 전보다 적어졌다.
…몸이 좋아진 건가?
하긴, 몸이 좋아질 만도 하다.
영양제를 그렇게 먹고…그레이프와 매일같이 격렬한 섹스를 했으니…근육통이 이렇게 많은 걸 보면 근육이 그만큼 혹사하고 있다는 거겠지.
먹는 양도 많아졌고, 그레이프가 마력으로 계속해서 신진대사를 올려주고 있고, 로제가 마력으로 근육들 사이사이의 흐름을 풀어준 것도 같으니…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다.
“음…요즘 매일 운동을 해서 그런 것 같기도 하네요.”
“매일…남자분은 이렇게 빠르게 몸이 바뀌는구나….”
래피드는 신기하다는 듯 눈동자를 움직여 내 몸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천천히 쓸어내리듯 살펴봤다.
그러다가 한순간 허리춤에 눈이 머무르고, 얼굴이 빠른 속도로 빠르게 달아오른다.
곧바로 래피드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대화의 화제도 함께 돌려버렸다.
“아…! 그, 일단, 그게…시, 식사는…저, 기다려야 하는 거죠?”
“아, 네. 음…그러네요.”
래피드의 말대로, 식사는 바로 할 수 없게 되었다.
지금 예약을 해도 50분…어디까지나 이건 예상 시간이니, 먼저 들어간 손님들이 식사를 오래 한다면 한 시간 이상을 기다려야 할 수도 있다.
시간이 남는다….
“아, 혹시 괜찮으시면…기다리는 동안 같이 아쿠아리움 구경하고 있으실래요?”
차라리 잘 됐다.
예약을 하지 못해 생긴 실수지만, 오히려 실수가 기회가 된 상황이다.
나는 자연스럽게 래피드에게 좀 더 같이 있자는 말을 꺼냈고, 래피드는 놀란 얼굴로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그러더니 비전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하는 듯 하고는…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음…네에, 괜찮을…거에요.”
좋아.
자연스럽게 래피드를 아쿠아리움으로 꼬드긴 나는 래피드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래피드는 머뭇거리더니, 손을 흠칫거리며 조심스럽게 내 셔츠 소매를 잡았다.
손을 만지면 쾌감을 느낀다는 걸 인식하고 있는 움직임이다.
나는 래피드를 끌고 아쿠아리움 입구로 걸어갔다.
무인 매표소 앞에 선 나는 당당하게 입장권을 구매하기 위해 카드를 꺼냈다.
래피드와 애쉬의 머리카락을 판매한 포인트가 돈으로 변해 입금될 예정인 카드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래피드가 내 앞에 끼어들며 자신의 카드를 내밀었다.
“아, 제가 계산할게요.”
“네? 아뇨, 제가….”
“앗…아뇨, 제가 식사 사 드리기로 한 거니까…그리고 저…그게….”
래피드는 주변의 눈치를 보더니 내 옆으로 다가와, 귀를 대 달라고 손짓했다.
그 모습을 보고 기대감에 얼굴을 붉히며 살짝 고개를 숙인 내게 래피드는 다른 사람이 들을까 봐 걱정하는 듯 귓가에 두 손을 대고 작은 목소리로 귓속을 간지럽히며 속삭였다.
“저…제 카드로 결제하면 이런 곳은 전부 무료에요.”
마법소녀들이 가지는 혜택인 걸까….
나는 래피드의 말을 듣고 어쩔 수 없이 결제를 양보했다.
래피드의 카드를 쓰면 무료로 입장할 수 있는 걸 쓸데없이 결제할 필요는 없다.
입장권을 구매한 뒤 래피드와 나는 서로 아주 약간 거리를 벌리고, 너무 붙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너무 멀지도 않게 서서 함께 아쿠아리움으로 들어갔다.
입장권을 체크하는 차단기도 매표소처럼 무인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표의 코드를 찍고, 차단기를 몸으로 살짝 밀며 안으로 들어간다.
“와아…읏?!”
그 차단기 옆에 설치된 원통형의 긴 수조를 본 래피드는 신기한 듯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걸어오다 차단기에 걸려버렸다.
수조에 정신이 팔려 입장권을 스캔하는 걸 잊은 모양이다.
나는 마치 아쿠아리움을 처음 온 어린아이 같은 모습을 보고 작게 웃으며 말했다.
“옆에, 스캔하고 들어오셔야 해요.”
“앗, 아, 네!”
래피드는 무척 부끄러워하며 곧바로 두 번, 세 번씩 스캔한 뒤 차단기를 밀고 들어왔다.
지하철만 써 봐도 어떻게 쓰는지, 뭔지 알 텐데…이런 걸 한 번도 안 써본 듯한 모습이다.
아니, 래피드는 공간이동 마법을 사용하니 지하철을 써 본 적이 별로 없어서 이런 걸지도 모르겠다.
“그럼…갈까요?”
나는 래피드에게 다시 손을 내밀었다.
아쿠아리움을 구경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