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4화 > Day to (10)
“조….”
그레이프를 좋아하냐, 안 좋아하냐로 질문한다면 좋아한다고 대답할 수 있다.
어렵지 않게, 가볍게 대답할 수 있는 간단한 문제다.
그런데도…어렵다.
“좋….”
내가 아는 내 좋아함의 기준은 래피드다.
나는 그레이프를 좋아하나?
래피드만큼 좋아하나…?
예전 같았으면 곧바로 그 정도는 아니라고, 별로 안 좋아한다고 대답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내가 그레이프를 좋아해도 되는 걸까…?
굉장히 이상한 기분이다.
조금 생각해보면 생각보다 좋아하는 것 같아 어? 이렇게나 좋아할 수 있네? 싶어진다.
하지만 좋아해도 괜찮은 걸까?
그래도 되나…?
좋아한다고 해도 좋은 걸까?
잘 모르겠다.
난 그레이프를 내가 아는 좋아 보다도 더 좋아하는 걸까…?
“아…음….”
정말 약간이지만, 머리가 아프다.
나는 약간의 두통을 느끼자마자 생각을 대충 넘기고 머리를 털었다.
그러자 그것을 거절로 받아들인 그레이프가 무척 불안해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시, 싫어요…?”
묘한 분위기와 압박감이 느껴진다.
나는 이런 거로 더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그냥 쉽게 대답하면 끝날 질문이다.
“그런 식으로 물어보면…좋아하는, 쪽이지….”
“정말요?”
“어, 음, 응…그치….”
그레이프는 내게서 대답을 듣고 난 뒤 점차 상태가 안정되어갔다.
얼굴을 살짝 상기시키고 멍하니 입을 우물거리며 내 말을 곱씹고 있다.
내 생각은 둘째치고, 그레이프 본인에게는 그럭저럭 만족스러운 대답이었던 모양이다.
그레이프에게서 내게 미움받지 않고 싶어 한다는 게 느껴진다.
이런 행동을 하는 건 최면 때문이다.
죄책감을 지우기 위해, 내가 좋아하는 거라고 생각하고 싶어져서…이러는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애초에 그레이프를 억제하는 데에 감도를 올리는 최면 같은 건 필요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최면을 잘못 걸어 강간당하고 말았지만, 그 덕에 확실한 해결책을 떠올렸다.
나는 가만히 무릎을 꿇고 앉아있는 그레이프에게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냈다.
“좋아하는 쪽이지만…잘 모르겠어.”
“네?”
“그도 그럴 게…그레이프는 내가 하지 말라고 해도 다 무시하고 해버리잖아….”
내 말을 들은 그레이프는 무척 당황하며 온 신경을 내게로 향했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느끼고 있는 반응이다.
최대한 속상해 보이게, 좋아하고는 있지만 이대로 가면 어딘가 잘못될 거라는 예감이 들게끔….
나는 살짝 울먹이며 말을 이었다.
“하지 말라고 했는데도 하고…자꾸 그러면 안된다 해도 하고…나 바보 될 것 같다고 했는데도 하고…그레이프는 내 생각 같은 건 신경 안 써주잖아.”
“그건, 그, 죄송해요….”
“사과하라는 게 아니잖아. 그레이프는 지금 내가 무슨 말 하는지 몰라?”
화를 내면서도 목소리를 떠는 걸 잊지 않는다.
그레이프는 조금 전에 나를 강간했을 때와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기가 죽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잘못을 저지르고 혼날 때의 꼬리 내린 강아지처럼 풀이 죽은 모습이다.
“자꾸 내가 야해서 못 참았다고만 하고…그레이프는 어차피 내가 아니라 나랑 섹스하는 게 좋은 거지?”
“네?! 아, 아니에요…!”
“그럼 나랑 섹스하는 거 싫어?”
“아뇨…좋은…데…아니, 앵거가 싫다는 게 아니에요…둘다 좋은데….”
“둘 중 하나 선택하라 하면 섹스가 더 좋잖아. 아니야?”
“그건 아닌데….”
“그럼 왜 매번 섹스하는데 못 참는 거야…?”
그레이프는 대화가 점점 이상한 곳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걸 느꼈는지 한층 불안한 표정이 되어 입술을 깨물었다.
욕구를 참지 못한 그레이프가 몇 번이고 날 강간한 건 사실이니,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래도 변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지 그레이프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오늘은…갑자기, 너무 기분 좋아서….”
“변명하는 거야?”
“아니, 변명이 아니라…진짜, 진짜 기분 좋았단 말이에요…갑자기, 이상하게…이성이 날아갈 것 같이….”
“나도 그레이프랑 섹스하면 이상할 정도로 기분 좋아. 이성도 날아가고, 필름도 끊기고, 기억도 잘 안 나고, 바보 되는 것 같다고 그랬잖아. 그레이프만 그런 거 아니야.”
기분 좋아서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은 통하지 않는다.
거기에 더해, 이미 나는 그런 기분을 느껴도 참고 있었다는 사실을 더한다.
나는 그레이프의 변명을 철저하게 차단했다.
“나는 그레이프를 좋아하는 쪽이니까 강간당해도 참아준 건데 그레이프는 못 참는 거야?”
“아니, 참았…참을 수 있었는데….”
“솔직하게, 못 참은 것 맞아? 그레이프는 마법소녀인데 평범한 일반인인 나보다도 인내심이 부족할 리가 없잖아? 안 참은 거 아냐?”
“아니에요!”
그레이프는 단호하게, 필사적으로 고의강간을 부인했다.
아니라는 건 당연히 알고 있다.
그레이프는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는, 당연한 대답이다.
“그럼 왜 어제 강간한다고 물어보고 덮친 거야?”
그러니 당연히, 나도 이 대답이 나올 줄 알고 있었다.
나는 기다리던 대답을 듣자마자 그레이프를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내가 해도 된다고 했어?”
“그, 그건…그건….”
“일부러 강간했지?”
“아니, 그게, 그치만….”
“안 참았지?”
결국, 그레이프는 입을 완전히 닫아버렸다.
나를 강간했다는 확고한 진실 앞에서 무슨 말을 해도 방법이 없다는 걸 깨달은 모습이다.
나는 그레이프를 바라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아….”
“읏….”
그것만으로 겁먹은 그레이프는 무릎 위에 두 손을 올리고 꾸욱 쥐어 부들부들 떨었다.
그 모습을 보자 정신적으로 그레이프에게서 완전히 우위를 점했다는 게 느껴진다.
그레이프와의 육체적인 관계에 있어서 언제나 나는 당하는 쪽이다.
그런 만큼,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 그레이프를 조금 자극하기만 하면 언제나 심적 우위에 설 수 있다.
“그레이프가 매일 나 아무 생각 못 하게 섹스해대서 몰랐는데, 요즘 매일 섹스하러 왔지?”
“섹스하러 온 게 아니라…앵거, 보려고….”
“매번 섹스했잖아.”
“네….”
“그레이프는 날 섹스중독으로 만들어서 그레이프 전용 딜도 같은 걸로 쓰고 싶은 거야?”
“아니, 그건…그….”
“그게 아니면 왜 섹스중독으로 만드는 거야.”
“…앵거 지금 섹스중독이에요?”
“중요한 건 그게 아니잖아. 그레이프…내가 무슨 말 하는지 몰라?”
나는 오직 진실만을 사용해 그레이프를 압박했다.
그럴수록 그레이프는 점점 풀이 죽으면서도 혼란스러워하는 표정이 되었다.
눈을 이리저리 흔들며 내 말의 의도가 무엇인지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있다.
나는 일부러 다시 한번 더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러자 그레이프는 몸을 움찔 떨며 조금 틀어졌던 자세를 바로 했다.
나와는 햄스터와 인간 수준의 힘 차이가 나는 그레이프를 한숨만으로 꼼짝 못 하게 만들다니….
묘한 쾌감이 가슴 밑에서부터 끓어 올라온다.
“그레이프, 이렇게 하자.”
“네?”
“일단 오늘부터 월요일까지 집에 오지 마.”
그레이프의 위에 확실히 올라섰다는 확신을 가진 나는 본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단호하게 얘기하기 시작했다.
일단 주말에는 래피드와 데이트해야 하니, 혹시라도 그레이프가 집에 찾아오지 못하게 만든다.
이미 내가 무슨 말을 해도 거절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있는 그레이프는 큰 충격을 받은 반응을 보이면서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어차피 주말에 오면 하루 종일 섹스할 생각이었지?”
말을 꺼내고 보니 상당히 불길한 얘기다.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그레이프의 모습을 본 나는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하루 종일 섹스라니…그런 짓을 했다간 골반뼈가 말랑말랑하게 다져질 게 분명하다.
“내, 내가 이럴 줄 알았어…그러면 안 돼! 그레이프는 짐승이 아니잖아? 그치?”
“네….”
“오늘 회사 갔다가 퇴근하면 집에 가서 조용히 자. 알았어?”
“으….”
“참을 수 있지?”
대답이 없다.
나는 불안함에 침을 삼키며 다시 한번 강하게 말했다.
“참을 수 있지?!”
“…네.”
“휴우….”
힘겹게 대답을 받아낸 나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레이프의 복잡한 표정 속에서 내가 기다리고 참으라 하니 힘들지만 참아주겠다는 게 눈에 보일 정도로 강하게 느껴진다.
힘이 넘치는 개를 길들이는 게 이런 기분일까.
“좋아…그리고 앞으로는 섹스할 때 위에 올라타는 거 금지야.”
“네?! 그치만…그건…!”
“자꾸 올라타니까 강제로 하게 되는 거잖아. 앞으로는 내가 올라탈 거야!”
나는 그레이프에게 엄격하게 선을 그었다.
내가 위로 가고 그레이프가 밑에 깔린다면 내가 일방적으로 사정을 조절하며 섹스할 수 있게 된다.
더 이상 그레이프의 밑에 깔려 섹스 당하고 있지만은 않는다.
“그레이프는 얌전히 다리나 벌리고 있어. 내가 박을 거야.”
“어….”
“그레이프가 지금까지 날 진용 딜도 취급하듯이 섹스했으니까 나도 자위기구처럼 섹스할 거야.”
“…앵거 전용 오나홀인 거에요?”
그레이프가 내 전용 오나홀이라니…굉장히 야한 말이다.
완전히 내게 굴복한 듯한 야릇하고 천박한 단어 선정이다.
나는 밑바닥에서 혁명을 일으켜 올라온 영웅이 이런 기분이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며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레이프는 은근히 끌리는 눈빛을 하고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았어요. 앞으로 앵거가 시키면 얌전히 누워서 다리 벌릴게요….”
“좋은 생각이야.”
“그럼 오늘 덮친 건 용서해주는 거죠…?”
“그래, 그래.”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그레이프를 안정적이게 내 마음대로 유도해냈다는 사실에 만족하며 팔짱을 끼고 앉았다.
이제 그레이프는 더 이상 내 위에 올라타지 않을 것이다.
엉덩이 밑에 깔려서 헥헥대기만 하는 나는 끝났다.
앞으로는 그레이프의 위에 올라타는 나의 시대다.
나는 팔짱을 끼고 있다가 두 손을 위로 쭉 올려 기지개를 켰다.
근육통에 시달리는 팔이 팽팽하게 당겨지며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른다.
그레이프는 스트레칭을 하는 내 앞에 얌전히 앉아있었다.
“섹스 안 할 테니까 그냥 밥해주러 오면….”
“안돼, 그래놓고 섹스할 거잖아. 출근이나 해.”
“아….”
그레이프는 내가 단호하게 말하자 풀 죽은 모습으로 일어서 머뭇거리며 치마를 입었다.
옷매무새를 바로 하고, 내 눈치를 보며 터덜터덜 걸어간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까지 따라 나가 그레이프를 배웅했다.
“다녀오겠습니다….”
"응! 주말 지나고 봐!"
나는 힘 빠진 목소리로 말하는 그레이프에게 웃는 얼굴로 인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