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5화 > Day to (1)
“에, 에스더…?”
나는 갑자기 에스더가 나타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해 당황하며 뒷걸음질 쳤다.
그러자 에스더는 그런 내 반응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불만이 가득한 눈빛을 보이며 꼬리를 허공에 채찍질하듯 홱 소리를 내며 내리쳤다.
그대로 지금 기분이 나빠졌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불량하면서도 귀여운 목소리가 날카로운 이 사이로 새어 나왔다.
“너, 반응이 그게 뭐야?”
“예?”
“좀 더 기쁜 표정 안 지어?”
나는 왜 기쁜 표정을 지으라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일단 곧바로 입꼬리를 최대한 잡아당겨 활짝 웃었다.
그런데 에스더는 내 얼굴을 보고 오히려 더 짜증이 난 듯 고개를 홱 돌리더니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 그게 웃는 표정이야? 됐어, 진심이 안 느껴져.”
“음….”
내가 웃는 게 그렇게 마음에 안 들었던 걸까.
뻘쭘해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에스더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에스더는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삐져서 입술을 삐쭉 내밀고 있다.
왜 삐진 걸까.
자기가 갑자기 나타나 놓고…내가 기뻐하지 않아서 삐진다?
겨우 그런 걸로 이런 반응이라니…혹시 네거티브에게 감염당하며 뇌에 이상이 생기기라도 한 걸까…?
“반응 보니까 일부러 날 보러 온 것도 아니었던 것 같네.”
“아.”
에스더가 삐진 이유를 궁금해하던 나는 얘기를 듣자마자 에스더의 말뜻을 이해했다.
평범한 사람이 네거티브의 습격지에 찾아올 리가 없다.
래피드의 흔적을 채취하러 온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에스더의 입장에서 볼 때, 나는 위험을 무릅쓰고 에스더와 연락하기 위해 어떻게든 네거티브에게 접근을 시도한 사람으로 보인다.
“아뇨, 일부러 보러 온 건 맞긴 한데…설마 정말로 나타날 줄은 몰라서.”
“흥….”
“저, 정말로 믿기지 않아서 그래…에스더랑 둘만의 팬미팅을 이렇게 쉽게 할 수 있다니, 팬으로서 쉽게 현실감을 느끼기 어려운 일이잖아.”
“흐응….”
적당히 기분을 맞춰주자 에스더는 기분이 나아졌는지 인상을 펴줬다.
아직 조금 삐진 것으로 보여도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리는 걸 숨길 수 없다.
생각보다 쉽다.
“팬미팅…그래, 팬미팅 시간이나 조금 가져볼까 그럼?”
“응?”
에스더의 기분을 간단하게 풀어주고 몰래 안도하고 있던 내 몸에 갑자기 에스더의 꼬리가 휘감겼다.
허리를 감싸 안은 채 꽉 조여 강하게 잡는다.
그대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제대로 인식하기도 전에 에스더가 나를 붙잡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우와아아악?!”
아주 잠시동안 비행한 에스더는 건물 옥상에 날 내려놓았다.
곧바로 옥상에 두손 두발을 다 대며 쓰러진 나는 몸에 남아있는 부유감과 갑자기 늘어났던 중력의 여파에 코를 훌쩍였다.
그 사이 에스더는 지상, 옥상의 바닥, 바로 옆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세 번, 딱, 딱, 딱 하고 손을 튕겼다.
그에 맞춰 지상에서는 갑자기 촉수견의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멈췄던 괴수 경보가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옥상에는 어느새 촉수들이 얽혀 만들어진 소파가 하나 생겨있었고, 그 옆에는 뱀처럼 기다란 촉수 괴수가 몸을 세우고 서 있었다.
촉수 괴수의 외형에 놀란 나는 나도 모르게 손가락을 세워 괴수를 가리키며 외쳤다.
“촉촉이!”
“뭐야 그 이름은…걔는 111번이야.”
에스더는 촉수여왕이면서도 촉촉이를 모르는 것 같다.
촉촉이같은 걸 꽤 좋아하는 그레이프의 감성이 더욱 비정상적으로 느껴진다.
에스더는 111번 촉수에게 명령하며 얼른 가라고 손짓했다.
“가서 음료수 가져와.”
그러자 111번 촉수는 뱀처럼 생긴 몸을 비틀어 꼬리를 머리 쪽에 충성하듯 대더니 곧바로 건물의 틈새로 몸을 넣어 사라졌다.
이어서 에스더는 촉수로 이루어진 소파에 몸을 던져 앉으며 바로 옆쪽을 손으로 툭툭 치며 말했다.
“옆에 앉아.”
“어….”
나는 아주 잠시동안 앉아도 될지 고민하며 주춤거렸다.
에스더의 옆에 앉는 건 괜찮은데…촉수 소파에 앉고 싶지는 않다.
앉았다가 그대로 촉수가 하나 튀어나와 나와야 하는 곳에 들어올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든다.
“앉으라고.”
“예….”
하지만 앉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가 느껴져 앉을 수밖에 없었다.
긴장한 몸을 딱딱하게 굳힌 채 조심스럽게 에스더의 옆에 무릎을 모아 앉은 나는 언제 촉수가 날 휘감을지 모른다는 상상과 생각보다 훨씬 푹신하고 부드러운 감촉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표면도 가죽처럼 어느 정도 경질화 되어 있어 최고급 가죽 소파에 앉은 것 같은 안락함이 느껴진다.
촉수 소파가 이렇게 편하다는 사실이 기분 나쁘다….
“흠….”
에스더는 굳어있는 나를 잠시 살펴보더니 에스더에게 맞춰져 팔을 올릴 수 있게 변한 소파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괴어 앉았다.
다리를 꼰 자세 그대로 한 손을 내밀어 옥상 끝을 가리킨 에스더의 손끝에서 갑자기 화염이 쏘아져 나간다.
에스더의 마법, 슈팅 스타에 맞은 옥상 난간이 그대로 녹아 사라졌다.
옥상 한쪽을 날려버린 에스더는 곧바로 촉수 소파를 손가락 끝으로 톡톡 두들겼다.
그러자 촉수 소파가 밑에서 다리를 뻗어 벌레처럼 기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분 나쁜데…흔들림이 전혀 없어 너무 편안해서 더 기분 나쁘다….
“경치 좋지?”
“아…응.”
옥상 한쪽을 날려버리고 끄트머리에 촉수 소파를 주차하듯 세운 에스더의 말에 나는 잔뜩 긴장해 얼어붙으며 대답했다.
그사이 대체 어디에서 가져온 건지 모를 음료수 캔을 꼬리로 둥글게 감싸 잡아 들고 온 111번 촉수가 소파 뒤에서 나타나 음료수를 내밀었다.
나는 콜라, 에스더에게는 체리 콜라를 서빙한 촉수는 그대로 웨이터처럼 몸을 세운 채 재주 좋게 뒤로 기어가 옥상 출입문에 붙었다.
“마셔.”
“음….”
나는 촉수의 체액으로 약간 끈적거리는 캔을 손으로 문질러 닦았다.
콜라는 촉수가 가져다줘도 여전히 콜라맛이다.
콜라를 마시며 지상을 내려다본 나는 촉수견이 가득한 풍경을 바라보며 묘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주변에 남아있던 촉수견이 모두 모이기라도 한 건지 상당한 수의 촉수견이 지상으로 나와 있다.
에스더가 촉수견을 부르고, 촉수견이 마견을 불러 모은 탓에 지상은 그 잠깐 사이에 완전히 개판이 되어 있었다.
촉수견들이 신나서 날뛰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 눈에 익은 모습들이 보인다.
아르나, 로제…지하철에서 일하는 두 마법소녀가 나타나 촉수견들에게서 도망치며 싸우고 있다.
아마도 이후에 운행 재개될 지하철에 일하러 왔다가 촉수견 대량 발생 소식을 듣고 오게 된 모양이다.
“참 쓸데없는 걸 걱정하고 있네…걱정하지 않아도 돼, 겨우 촉수견이나 마견 정도에 마법소녀는 죽지 않으니까.”
“아, 네.”
가만히 둘을 내려다보던 나를 옆에서 본 에스더는 내가 마법소녀들을 걱정한다고 생각한 건지 황당해하며 말했다.
에스더의 말대로 촉수견과 마견은 마법소녀를 죽이기보다는 계속해서 범하는 쪽이다.
어찌 보면 죽는 것보다도 심한 짓을 하는 거지만, 최악의 상황이 되어도 죽이지는 않는다.
“이 주변 담당은 중위권 애들이지? 루이는 아직도 하나?”
“어…응.”
“루이 정도만 되어도 저 정도에 당할 일은 없으니까 밑에서 신경 꺼.”
에스더의 말과는 다르게 저 정도면 꽤 고전하거나 잘못하면 당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만, 만약의 경우 루이와 시에나까지 오게 될테니…걱정할 필요는 없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마법을 사용하는 아르나와 로제에게서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에스더는 다 마신 콜라캔을 손으로 쥐어 녹여 없애더니 꼬아 앉은 다리에 팔꿈치를 올리고 손가락 끝으로 얼굴을 받치면서, 내 쪽으로 몸을 틀어 앉았다.
허리가 숙여지며 커다란 가슴이 강조되어 보인다.
에스더는 대체 어째서인지 아무 말 없이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왜 이러는 걸까 하며 눈을 마주 보고 있자 긴 속눈썹이 위아래로 흔들리며 붉은색과 금빛으로 각각 다른 색으로 물들어 있는 눈동자가 보인다.
색이 특이하다는 걸 제외하면 네거티브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평범한 눈이다.
나는 에스더의 뾰족한 뿔과 머리모양, 외모를 살피며 나도 모르게 네거티브가 되기 전의 에스더의 모습을 떠올렸다.
마법소녀일 때의 모습이 여전히 남아있지만…뿔과 날개, 꼬리는 이미 에스더가 마법소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네거티브의 편이라고 하기에는 마법소녀일 때의 모습이 너무 많이 남아있다.
다른 것보다 가슴이…다른 네거티브 괴수들은 이런 여성스러운 곡선 같은 건 가지고 있지 않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외관뿐인 얘기다.
겉은 평범해도 속은 촉수보지인 것처럼…분명 겉은 마법소녀였던 모습을 유지하고 있어도 내부에서부터 네거티브로서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을 것이다.
“뭘 봐.”
“아니…눈이 예뻐서.”
“뭐…?”
에스더의 몸을 힐끔거리던 나는 조금 신경질적인 목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며 얼버무리듯 대답했다.
다행히 내가 가슴이나 다리 사이를 힐끔거린 걸 눈치채지 못했는지 에스더는 놀란 얼굴로 뭔가 생각하듯 눈동자를 위로 치켜뜨고만 있었다.
그리고 잠시 뒤, 아랫입술을 깨물고 다 마신 콜라 캔을 주먹으로 쥐어 녹여 없애며 말했다.
“헛소리하지 말고, 왜 날 보고 싶었던 건데?”
콜라 캔이 녹아내리는 걸 보고 화났나 싶었는데, 말투나 꼬리의 살랑거림을 봐서는 그렇게 기분 나빠 하는 것 같지는 않다.
이건 무슨 일 때문에 에스더를 보려고 네거티브가 습격하는 곳까지 찾아왔냐는 질문이다.
이번에는 일부러 만나러 온 게 아니었지만, 에스더에게 질문할 좋은 기회다.
잠시 망설인 나는 에스더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촉수가 박힌 왼손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어…이거…대체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