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1화 > 인식 (6)
또다시 밤이 깊어지도록 섹스하며 긴 시간을 보낸 나는 매트리스에서 몸을 일으켰다.
매트리스 주변에는 그레이프가 찢어 던진 콘돔과 속옷들이 널브러져 있다.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피자 샤워실에서 물소리와 함께 귀에 익어가는 그레이프의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으으으으윽…!”
나는 그레이프가 기분이 무척 좋은 것 같다고 생각하며 자리에 앉은 채 엉망이 된 머리를 벅벅 긁다가 인상을 쓰며 기지개를 켰다.
허리, 배, 다리에 집중되어있는 근육통이 끔찍할 정도로 강렬하다.
가만히 몸을 비틀며 스트레칭을 하고 있자 그레이프가 샤워실에서 타올을 몸에 감은 채 나왔다.
“아, 일어났어요?”
“응…출근해?”
“네~”
못 보던 타올로 몸을 감싸고 있다.
그레이프는 몸을 가리던 타올을 세탁기에 넣은 뒤 옷장 서랍에서 속옷을 꺼내 내 앞에서 보란 듯이 옷을 입었다.
나는 너무도 자연스러운 모습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하품을 하며 다시 침대에 누웠다.
“나는 좀 더 잘래…섹스 너무 해서 졸려….”
“알았어요~그래도 밥해놨으니까 이따가 꼭 일어나서 먹고, 약도 꼭 먹어야 돼요?”
“응….”
만족할 때까지 하는 정도를 넘어설 정도로 섹스를 하고 나면 신기할 정도로 잠이 많이 온다.
그레이프는 내가 다시 침대에 눕는 모습을 보고 쿡쿡 웃으며 내게 다가와 이불을 덮어준 뒤 무척 기분이 좋아 보이는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이따가 먹고 싶은 거 있어요?”
“이따가…? 음…계란?”
“계란 좋아해요?”
“아니…근데 뭔가 먹고 싶어졌어.”
“알았어요, 오늘은 그럼 계란으로 뭐 해줄게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쩐지 계란이 먹고 싶다.
그레이프는 내 말을 듣고 내게 이불을 덮어주고는 이불 안에 손을 넣어 내 몸을 주물렀다.
자고 일어나서 체온이 올라가 있는 건지 몸속에서 후끈거리던 기운이 그레이프의 손을 따라 온몸 구석구석으로 퍼진다.
잠시동안 내게 마사지를 해주던 그레이프는 시간을 확인하며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슬 출근 시간인 모양이다.
“다녀올게요~”
“응…응?”
오늘은 급하지 않게 출근하는 그레이프가 현관문을 닫는 소리를 들은 나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눈을 작게 떴다.
오늘도 또 우리 집으로 온다는 얘기인가…?
그렇게까지 섹스가 하고 싶은 걸까…?
기분 좋지만…기분 좋긴 한데….
지금 이렇게 근육통이 잔뜩 느껴져도 괜찮다 싶을 정도로 엄청 기분 좋고 만족스럽긴 한데….
오늘도 섹스하면…설마 이제 곧 주말인데 토요일 일요일에도 온종일 섹스하겠다는 건 아니겠지.
혹시 모르니 주말에는 바쁜 일이 있다고 해 둬야겠다.
나는 한동안 누워서 몸속이 이상할 정도로 뜨거워지는 걸 가만히 느끼고 있었다.
후끈거리는 열기가 배에서부터 출발해 몸을 가득 채우며 근육통이 느껴지는 부위, 자지 부근에 모인다.
그랬다가도 왼손에서부터 차가운 기운이 올라와 몸을 식혀주고, 풀어주기를 반복한다.
“으, 음….”
잠을 자려고 해도 잠이 잘 오질 않는다.
마사지하는 손이 떨어졌는데도 아직 그레이프의 손이 닿아있는 것처럼 열기가 이곳저곳으로 퍼진다.
몸 구석구석의 근육들이 멋대로 움찔거린다.
한동안 매트리스에 누워 땀을 흘리던 나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시트가 어느새 다 젖어 축축해져 있다.
찝찝해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샤워실로 들어갔다.
그레이프가 사 온 샴푸와 치약, 바디워시를 써서 몸을 깨끗하게 씻은 나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잠시 살펴봤다.
어쩐지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전보다 살이 빠진 것처럼 보인다.
나는 살짝 발기한 것처럼 평소보다 커져 있는 자지를 보며 그레이프가 너무 섹스해서 언제나 발기가 멈추지 않는 몸이 되진 않을까 하는 불안한 상상에 빠져들었다.
이렇게 섹스만 하고 살아도 되는 걸까…?
그레이프랑 섹스할 때마다 다른 생각과 고민들이 휙 사라지는 것 같아 걱정이다.
나는 래피드와 섹스해야 하는데…자꾸 그레이프랑 섹스하는 것만 생각하게 된다.
.
샤워실에서 나와 시간을 확인해보니 어느새 점심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배도 고프고 슬슬 뭔가 먹어야겠다고 생각한 나는 그레이프가 해준 요리를 먹으며 습관처럼 래피드의 위치를 확인했다.
웬일로 래피드는 4번 구역에 와서 돌아다니고 있었다.
곧바로 메신저를 확인해봤지만 래피드에게서 온 메시지는 보이지 않았다.
애쉬의 위치를 확인해보니, 애쉬는 구역 바깥에 나가 움직이고 있었다.
애쉬는 한 번 구역 바깥으로 나가면 그날은 한동안 돌아오지 않는다.
즉, 오늘은 애쉬가 밖으로 나가 훈련을 쉬는 날이다.
나와 만나기로 한 날은 주말이니, 아마 지금은 혼자 나와 있을 거라고 생각된다.
본래 래피드와 함께 나와 놀던 마법소녀 중 한 명은 은퇴, 한 명은 감염, 한 명은 나와 어제 시간을 보냈으니…혼자일 것은 확실하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래피드를 보러 가야겠다는 생각에 나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래피드가 느끼기에 우연히 나와 만나는 일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그리고 나 또한, 관계도 진전시킬 수 있고 머리카락도 얻을 수 있으니 많이 만날수록 이득이다.
잠깐만 마주치고 와야겠다.
“응?”
그렇게 나갈 준비를 하며 옷장에서 옷을 꺼내 입던 나는 묘한 느낌에 손을 멈췄다.
셔츠가 아주 약간이지만 끼고, 바지가 조금 흘러내린다.
요즘 너무 많은 일이 있어서 살이 빠지기라도 한 걸까 하고 생각한 나는 벨트를 꺼내 바지를 조여 입었다.
“아, 맞다.”
이어서 그레이프가 사준 영양제를 입에 털어 넣은 나는 거울에서 옷매무새를 정리한 뒤 이번에는 잊지 않고 래피드의 머리카락을 채집할 도구들을 정리해 넣은 가방을 챙겨 들었다.
현관을 나서 밖으로 나오자 얼마 지나지 않아 점심을 먹거나 카페에 앉아있거나, 길을 걷는 사람들이 보인다.
사람들은 여전히 이상한 표정, 초점이 나간 눈을 하고 있다.
나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매일 출근할 때처럼 지하철역을 향해 걸어갔다.
그레이프와 섹스하며 잠시 잊고 있었지만…대체 이 사람들은 다들 이런 상태가 되어 있는 걸까.
아무리 봐도 모두가 이상해 보이는 광경에 이젠 오히려 이게 정상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모두가 이상한데 나만 정상이라고 느낀다면, 그건 사실 내가 이상한 것이다.
내 손에는 에스더의 촉수가 박혀있고, 주머니 안에는 마법소녀를 마음대로 조종하는 최면어플이 깔린 비전폰이 들어있다.
둘 모두 평범하다고는 할 수 없으며, 나도 정체를 모르는 이상한 것들이다.
…이상한 생각이다.
이상한 사람들을 보며 나도 이상하다는 생각에 누가 더 이상한지를 생각하는 이상한 생각과 함께 지하철에 도착한 나는 역 앞에 켜져 있는 출입 금지 등을 보고 정신을 차렸다.
네거티브와 관련된 일이 생겼던 지하철은 때때로 이렇게 출입 금지 상태가 되어버린다.
이미 몇 번인가 겪어본 일이어서 그런지 주변의 사람들도 아무 말 없이 다른 교통수단을 찾아 발걸음을 돌리고 있었다.
지하철은 모든 교통수단 중에서도 가장 서민에게 알맞은 교통수단이다.
괴수들이 차원문을 열고 나타나 습격하는 지상과는 달리 지하에 배치되어 감염체만 상대하면 되며, 소수의 감염체는 그냥 충각을 열어 밀고 지나가기 때문에 교통이 막히는 일도 적다.
하지만 큰 사건이 생겼을 때는 가끔 이렇게 잠시동안 운행 중지를 하기도 한다.
에스더가 역 하나를 완전히 파괴해 버렸으니, 운행이 잠시 멈추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파괴되었어도 언제나 빠르게 수리할 것을 염두에 둬서 블록 식으로 제작된 현재의 도시는 복구에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역 운행에 대해 알려주는 전광판에는 오늘 저녁에 공사가 완료되며 정상 운행을 시작한다는 공지가 적혀 있었다.
그렇게까지 부서졌는데 1주일도 되지 않아 모든 공사를 끝내고 정상 운행하겠다는 말은 대단하기도 하지만, 이젠 당연한 일이 되어버렸다.
퇴사하지 않고 출근 중에 이 공지를 봤다면 아직도 다 못 고쳤냐며 화를 내고 버스를 타러 갔을 것이다.
역에서 나온 나는 어차피 래피드의 머리카락을 팔면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에 돈 걱정 없이 택시를 잡았다.
“4번 구역 상가로 가주세요.”
빠른 속도로 달리는 택시 안에 앉은 나는 초점이 나간 채 고개를 끄덕이고 운전하는 운전기사를 보며 이상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초점이 저렇게 안 맞는데, 옆에서 보기만 해도 눈이 장식품인 것처럼 이상한 상태인데도 저렇게 잘 운전하다니…보고만 있어도 묘한 위화감이 든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다들 아무렇지도 않으면…정말로 사실은 다들 정상이고 나만 이상한 건 아닐까?
주변에 대한 내 인식이 바뀌게 된 건 손에 촉수가 박힌 뒤부터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비정상이라면, 사람들을 모두 비정상으로 만드는 무언가가 있으며, 촉수는 나를 정상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정상이라면, 내게 주변 사람들이 비정상으로 보이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으며, 그것은 촉수일 것이다.
마법소녀가 나 하나의 이상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과 사회 전체의 이상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 중 어느 쪽의 가능성이 더 클까.
굳이 따져보자면 나 하나의 이상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게 더 말이 된다고 생각한다.
내 팔에 촉수를 박아넣은 건 마법소녀일 때도 3위에 당당히 머무르던 최상위의 마법소녀 중 한 명이었던 에스더다.
그런 에스더라면 다른 마법소녀가 눈치채지 못하게 뭔가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도착했습니다.”
멍하니 생각에 잠겨있다가 택시기사의 사무적인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나는 곧바로 값을 치른 뒤 택시에서 내렸다.
택시 밖에서 택시기사와 눈을 마주치며 초점이 맞지 않는 눈이 내게 향한다.
창문에는 초점이 맞는 내 눈이 비쳐 보이고 있다.
택시기사는 부자연스럽게 입가에만 미소 지으며 내게 손을 흔들어 잘 가라고 인사했다.
나는 친절한 택시기사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어지럼증을 느꼈다.
분명 이상한 상태인 것 같은데, 정작 따져보면 몸에 뭔가 이상한 게 있는 건 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사람들이 이상하긴 하다.
그런데도 모두가 이상하니 사실은 내가 이상한 게 아닐까 하는 이상한 상상이 멈추질 않는다.
초점 잃는 눈빛들이 멍하니 앞을 보며 움직인다.
기괴한 감각이 사람들의 이동에 따라 흘러 지나간다.
점점 머리가 이상해질 것 같다.
최대한 주변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시선을 바닥으로 향한다.
모두가 이상하게 느껴지게 되니, 모든 것이 로봇인 장소에 나만 멀쩡한 상태로 떨어진 기분이 든다.
도시 전체가 나를 속이는 듯한 망상과 함께 감시 카메라가 나를 따라다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든다.
나는 망상처럼 떠오르는 느낌과 상상들을 최대한 무시하며 비전폰으로 래피드의 위치를 추적해 걸음을 옮겼다.
“어?”
그렇게 한동안 걸음을 옮기던 나는 주변 건물들의 간판을 읽어 내가 있는 장소를 확실히 알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들었다가 이상한 광경을 발견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곧바로 눈을 크게 뜨며 놀란 나는 꽃가게 앞에 나와 물을 주는 아주머니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꽃을 보며, 물을 주고 있다.
평범하기만 한 광경인데도 너무도 이질적이다.
꽃을 보고 있다.
꽃을 보고 있다는 게, 정확하게 보고 있다는 게 보인다.
분명 정상적인 광경인데도 이상하다.
당황하며 꽃가게 아주머니에게 말을 걸기 위해 다가가던 나는 바로 옆의 과일가게 아저씨가 매대에 과일을 채우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과일을 보고, 채우고 있다.
“어…?”
바로 옆의 아저씨도, 그 옆의 아가씨도, 전부 이상하다.
초점이 맞는다.
정상이다.
그 정상적인 광경에 주변 사람들이 이상하다는 걸 인식한 순간보다도 큰 소름이 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