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9화 > 인식 (4)
“약…? 이게 뭔데…?”
나는 갑자기 내게 약부터 내미는 그레이프의 행동에 당황하며 물었다.
그러자 그레이프는 내 손에 알약 하나를 쥐여준 뒤 바로 냉장고로 걸어가 내가 마실 물을 잔에 따라 가지고 오며 대답했다.
“영양제에요!”
“영양제…?”
손에 쥐어진 알약은 영양제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오묘한 빛을 띠고 있었다.
회색과 보라색, 초록빛이 반짝이며 흔들린다.
알약 안에 무언가 액체가 들어있다.
혹시 수면제는 아닐까 싶었지만, 그건 아닌 것 같다.
이렇게 이상한 형태의 수면제가 있을 것 같지도 않고, 그레이프는 내게 수면제를 먹일 필요가 없다.
만약 수면제를 먹인다면 나를 강간하기 위해서 먹이는 걸 텐데 그레이프는 수면제가 없어도 날 강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이건 수면제가 아닌 무언가다.
“그레이프, 진짜로 이거 뭐야…?”
“앵거한테 좋은 거, 비싼 거예요.”
“아니, 그래서 뭔데….”
“그건 비밀이지만, 좋은 거예요!”
“음….”
나는 갑자기 집에 오자마자 이상한 약을 먹으라고 하는 그레이프를 가만히 노려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레이프는 내게 피해가 가는 행동을 할 수 없다.
그러니 이건 그레이프의 말대로 내게 도움이 되는 약품일 것이다.
그레이프의 손에 들린 약통에는 아무런 상표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레이프 라는 이름이 네임펜 같은 것으로 찍찍 그어져 적혀있다.
그레이프라고 적혀있다는 건 다른 사람이 그레이프에게 주려고 따로 빼뒀다는 건가…?
펜선이 거친 것이 어쩐지 급하게 약을 받아온 것처럼 보인다.
그레이프의 말대로 영양제일 수도 있지만…그렇다고 해도 평범한 영양제는 아닐 것 같다.
내게 좋은 영향을 주는 약이라고 해도 무슨 약인지는 알고 먹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에 그레이프에게 최면을 걸어 물어보려고 하던 나는 손을 움찔거리며 멈춰 섰다.
왼손이 알약에 반응하는 게 느껴진다.
지금까지 고민해 본 결과, 내 왼손은 네거티브, 괴수를 느낄 수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왼손의 이 알약은…여러 약물 중에서도 특수 약품에 속하는, 괴수의 체액을 가공한 약일 가능성이 크다.
괴수 체액을 가공하는 약물은 방위군 연구소에서 개발한 기술에 의해 철저하게 독성을 분리시켜 제작된다.
그만큼 평범한 약물에 비해 큰 효력을 보이며, 방위군 내에서도 전략물자로 취급되고 있다.
특수한 방법으로 괴수 체액을 가공한 영양제….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그레이프의 핸드폰에 걸려있는 촉촉이 키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촉촉이는 특수한 약이 베스트 셀러를 넘어서는 대성공을 거둔 제약회사에서 캐릭터 사업에 끼어들며 탄생한 캐릭터다.
그 제약회사에서 만든 약의 이름은 괴수의 힘 EX….
부작용 없이 남성기를 성장시켜주는 전설의 영양제다.
구매하고 싶어도 대기인원이 너무 많아 구매가 불가능하고 대기인원 중 사회 유명인사나 상류층들이 많아 우선순위에 끼어들기도 힘들며 재료가 되는 괴수를 수급하는 것도 어려워 제조 라인도 멈춰있다고 하는 약이다.
나같이 아무것도 없는 일반인은 가지고 있다는 게 알려지는 것만으로도 강도짓을 당할 걱정을 해야 할 정도로 위험해질 수 있는 약이기도 하다.
나도 실물로 본 적은 없지만…분명 본 적 없는데, 이 약을 본 기억이 있는 것처럼 이게 그 약이라는 확신이 든다.
설마 아니겠지 싶지만, 그레이프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재료가 되는 괴수를 잡아 올 수 있는 상위권 마법소녀다.
급하게 만들어진 듯한 약통, 재료가 부족한 전설의 영양제, 자지가 커지는 약,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괴수를 잡아 올 수 있는 마법소녀….
이 약 한 알의 가격이 내 월급과 비슷하다.
“꿀꺽….”
나는 정말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긴장한 손을 부들부들 떨며 알약을 입에 넣고 그레이프에게서 물을 받아 마셨다.
알약이 목구멍을 넘어가며 위장에 내려앉는다.
무언가 불쾌한 것이 뿌옇게 가라앉았다가, 왼손이 차가워지며 녹아 사라진다.
그 직후, 뜨거운 뭔가가 배꼽 밑으로 가라앉는 것이 몸속에서 느껴졌다.
“이거랑, 이것도 먹어요!”
“어…?”
그레이프는 내가 약을 먹는 걸 보자마자 곧바로 다른 약들을 내밀었다.
이번에는 약통도 없이 검은 봉투에 한 주먹 정도 잡아 쥔 듯한 양이 담겨져 있었다.
이건…나도 아는 약이다.
방위군 훈련병 과정을 거쳐 합격하면 지급해준다는 근육 성장 촉진제와, 근육 재생 촉진제다.
이건 조금 전의 약과는 또 다른 의미로 사고 싶다고 해서 살 수 있는 게 아니다.
이건 방위군의 전략물자다.
구매가 어려운 것과, 구매가 불가능한 것은 다르다.
이걸 왜 그레이프가 가지고 있는지는 몰라도, 일단 내가 먹으면 좋은 건 맞다.
나는 말도 안 되는 걸 대체 어떻게 가져왔는지 모를 그레이프를 힐끔거리다가 알약을 받아 삼켰다.
이번에는 뭔가가 목구멍을 타고 올라와 머리로 향하려 하다가 머릿속에 무언가에 부딪친 것처럼 떨어져 가라앉는다.
평범한 약이 아니어서 그런지 먹을 때마다 이상한 느낌이 든다.
나는 물을 좀 더 마신 뒤 차가워진 왼손을 주무르며 그레이프에게 물었다.
“하아…그레이프, 이거 근데 나 줘도 되는 약 맞아…?”
“다, 다 먹었죠? 그럼 빨리…!”
“어?”
그런데 그레이프는 질문에 대답하지도 않고 갑자기 내 팔을 잡아끌어 매트리스에 넘어뜨려 버렸다.
발을 걸어 넘어뜨리고 다리에 발목을, 목 뒤에 팔을 감아 부드럽게 착지시키는 너무도 능숙한 움직임에 감탄이 나온다.
나는 정말 태연하게 내 위에 올라타 옷을 벗기 시작하는 그레이프를 보고 뒤늦게 깜짝 놀라며 말했다.
“어?! 할 거야? 지금?! 바로?!”
오자마자 당당하게 섹스부터 하려 하는 태도가 멋질 정도로 당황스럽다.
그레이프는 곧바로 내 옷과 바지를 잡아당기며 내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이미 몇 번이나 해 봐서 그런지 익숙한 손놀림에 나는 순식간에 알몸이 되어갔다.
“잠깐만! 허락, 허락은?! 아직 나 허락 안 해줬는데?!”
“문자로 해도 된다고 했잖아요?”
“했는데…하긴 했는데! 아니, 너무 많이 하잖아…! 지금 며칠째 계속…!”
“기분 좋다면서요?”
“기분은…기분은 좋지만! 그래도 이건…방금 왔는데?!
필사적으로 바지를 잡아 사수하던 나는 그레이프가 손가락을 하나하나 잡아떼어내 버려 결국 바지를 놓치고 말았다.
완전히 발기해 있는 자지를 보게 된 그레이프는 내게 커다란 가슴을 터억 하고 올린 뒤 꾸욱 깔아뭉개며 말했다.
“앵거도 좋아할 거에요!”
“바, 방금 왔는데? 저기, 밥은? 샤워는? 뭔가 먼저 해야 하는 거 아냐?”
“…샤워했어요?”
샤워 얘기를 들은 그레이프가 코를 움찔거린다.
나는 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어서 그레이프도 샤워하고 의미를 품은 대답을 돌려줬다.
“어차피 오면 섹스할 테니까 씻어뒀는데…그레이프도 씻어야 하지 않아? 땀 냄새가 싫은 건 아닌데 이러면 내 방에 그레이프 냄새가 더….”
“섹스부터 할게요!”
“네?! 어?!”
나는 내 배를 한 손으로 누르며 다른 한 손으로 짧은 반바지를 벗는 그레이프의 모습에 저절로 자지를 발기시키며 당황했다.
땀 냄새가 난다는 말에도 전혀 멈추지 않다니, 정말로 부끄러움이라고는 전혀 모르는 것 같다.
지금 당장 섹스하게 될 거라는 확신을 가진 나는 더 이상 그레이프를 말리는 걸 포기하고 침대 위로 손을 뻗었다.
“자, 잠깐만…콘돔, 콘돔 껴줘….”
“네…?”
미리 준비해둔 콘돔을 찾은 나는 그레이프에게 양손으로 공손하게 잡은 콘돔을 내밀며 부탁했다.
갑자기 덮쳐지는 상황에 놀란 얼굴이 뜨거워지고 팔이 저절로 부들부들 떨린다.
다행히도 아직 일말의 이성은 남아있었는지 그레이프는 콘돔을 내미는 내 모습을 보고 옷을 벗던 손을 멈춰줬다.
“콘돔…?”
아무것도 입지 않게 된 내 위에 올라탄 그레이프는 어느새 바지와 속옷을 한쪽 다리에 둘둘 말아 걸치고, 뜨겁게 젖은 보지를 드러내며 상의를 벗어 던지는 중이었다.
그레이프는 그 상태로 대체 왜 콘돔을 껴달라고 하는 건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가빠져 온 숨을 고르며 그레이프에게 콘돔의 필요성을 열심히 설명했다.
“코, 콘돔 끼면 정액 흡수 못할 테니까 마법도 못 쓸 테고! 그러니까 나도 막 너무 기분 좋아서 바보 될 것 같아지지 않고! 그레이프 보지는 너무 기분 좋으니까 위험하잖아! 끼면 조금은 덜 느끼게 될 테고! 이, 임신 걱정도 없어!”
그레이프는 내 설명을 듣고 콘돔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해해준 건지 천천히 내가 내민 콘돔을 받아줬다.
나는 그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가,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하고 점점 눈을 크게 떴다.
“콘돔이 있으면 활성화 마법을 잔뜩 걸 수가 없잖아요.”
양손으로 한 쪽씩 콘돔을 쥔 그레이프의 손이 얇은 종잇조각을 찢듯 서로 반대로 비틀어져 콘돔을 찢는다.
포장지와 함께 투두둑, 부욱 하고 찢겨나간 콘돔이 두 조각이 나 침대 옆에 떨어진다.
“아, 아앗….”
“앵거는 얌전히, 기분 좋아지는 것만 생각하고 있으면 돼요.”
“아아아아앗…!”
그레이프는 곧바로 내 자지를 콘돔 없이 그대로 삽입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