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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소녀 최면물-168화 (168/299)

< 168화 > 인식 (3)

나는 가지고 있던 래피드의 머리카락을 전부 정리한 뒤 오랜만에 방을 청소했다.

자는 사이 그레이프가 대충 치워줬는지 쓰레기는 별로 눈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레이프와 섹스하며 내려앉은 바닥이나 침대 프레임의 다리 부분이 바닥을 파고들어가며 생긴 홈, 섹스 도중 그레이프가 벽면을 한번 긁었을 때 생긴 손톱자국이 눈에 걸린다.

자세히 살펴보면 맹수가 날뛴 듯한 흔적이 집 안 구석구석에서 보인다.

이런데도 최근에는 내가 아파하지 않게 해주며 섹스하고 있다는 게 신기하다.

나는 청소를 계속하며 내가 해야 할 일의 우선순위를 결정했다.

일단은 래피드와 친해지고…에스더부터 어떻게든 만나본다.

에스더에게 지금 내가 왜 이렇게 된 건지 물어보고 싶은 마음도 크지만, 래피드와 친해져서 섹스하고 싶다는 욕망도 만만치 않다.

에스더는 어차피 습격 경보가 있어야만 만날 수 있을 테니, 지금은 래피드를 꼬시는 데 전념하면 된다.

래피드를….

난 어쩌다 래피드를 좋아하게 된 거였더라…?

좋아하는 이유는 얼마든지 댈 수 있다.

하지만 언제, 어떻게, 언제부터 좋아했냐고 물어본다면…잘 모르겠다.

나는 문득 든 생각에 옛날에 방위군 훈련병에서 나올 때 챙겨온 가방을 옷장 깊숙이에서부터 꺼내왔다.

방위군에서 떨어진 순간 내 목표를 잊지 않기 위해서 래피드와 관련된 물품을 전부 이 가방에 넣어뒀었다.

가방을 열자 더 이상 마모되지 않도록 곱게 포장된 물건들이 보인다.

훈련병 시절의 내 사진이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왔다.

지금보다도 더 키가 크고, 어깨도 더 넓고…완전히 다른 사람 같아 보이는 내가 사진에 찍혀있다.

프로그래머로 취직한 뒤 운동을 전혀 하지 않고 매일 허리를 굽히고 바닥을 보며 살아서 그런지 키도 작아지고, 어깨도 좁아지고, 다리도 구부러진 것 같다.

사진을 옆으로 치우자 곧바로 래피드와 관련된 물건들이 보인다.

이제는 사라진 래피드 팬클럽의 회원뱃지…애쉬가 직접 팬클럽 해체를 명령하며 사라지게 되어 지금은 점조직처럼 변해있다.

팬클럽 응원 부채, 타올, 가운, 헤어밴드…정말 처음에는 네거티브가 별것 아니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건물 옥상에서 마법소녀를 응원하기도 했었다.

나는 해본 적 없는 일이었으며, 이제는 볼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트윙클 트윈즈가 이끄는 비행 마수에게 당한 뒤로는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처음으로 주운 머리카락….

래피드 특유의 달콤한 향기는 이미 사라졌는지, 평범한 머리카락이 되어있다.

아주 초기에 판매되던 래피드의 응원사진 카드…아직 쉘터가 없던 시절에 나온 카드의 뒷면에는 긴급상황 대피요령과 도주 시 주의사항이 적혀있다.

카드를 보며 나는 래피드를 처음 알게 된 순간을 떠올렸다.

처음으로 겪어본 습격에서 살아남고, 여러 방송에 나와 대피요령과 여러 응원을 건네는 미소녀의 모습을 보고 점점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아마 다른 사람도 전부 나와 같을 것이다.

안 그래도 야한 몸에 예쁜 얼굴인데, 강하고, 사람들을 지켜주고…스크린에서 자주 보게 되니 좋아하게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래피드가 나타나기 전에 대피했다가, 래피드가 사라진 후의 현장에서 흔적을 발견한 순간부터…래피드가 가상의 인물이 아니라 현실에 존재한다는 현실감이 급격하게 부풀어 올라서….

그래서 나는 래피드를 쫓아다니게 되었다.

왜지?

왜 그게 래피드에게 집착하게 된 이유가 되는 걸까…?

난 왜 이렇게까지 래피드를 좋아하는 거지…?

잘은 모르겠지만, 지금의 내가 래피드를 좋아하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보기만 해도 두근거리고, 보지 않아도 생각만으로 두근거린다.

래피드가 옆에 있으면 큰 성욕을 느끼게 된다.

지금도 래피드와 잠깐 얘기했던 것만으로 그레이프와 섹스한 적이 없는 것처럼 자지가 멀쩡해져 있다.

언제든 섹스할 수 있게…회복되어있다.

이건 분명 사랑의 힘이다.

나는 이 문제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마음먹으며 가방을 다시 정리해 넣었다.

머릿속이 복잡해 잠시 의문이 들긴 했지만, 래피드를 언제부터 좋아하게 되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지금 내가 래피드와 사귀고 섹스하고 싶다는 것이다.

청소를 마친 나는 많지 않은 쓰레기를 버리러 다시 밖으로 나갔다.

쓰레기봉투를 버리고 나니 가까운 곳에 열려있는 편의점이 시야에 들어온다.

해가 져가고 있는 하늘을 보고 비전폰을 꺼내 보니, 어느새 퇴근 시간이 가까워져 있었다.

나는 편의점에 들러 콘돔을 구매했다.

마법소녀는 자궁에서 정액을 흡수해 마력으로 바꿔버린다고 하니 콘돔 같은 건 필요 없을 것 같지만, 그 얘기는 그레이프가 내 정액을 계속 마력으로 흡수해 버려서 계속 섹스하게 된다는 얘기기도 하다.

지금 내가 그레이프와 섹스할 때마다 너무 기분 좋아서 머릿속이 텅 비어버리는 건, 그레이프가 내게 마법을 걸어 계속해서 섹스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레이프가 내 정액을 흡수하고, 마력으로 내게 정액을 만들게 하고, 다시 정액을 흡수해 마력을 채운다.

절정한 뒤에도 또 절정하고, 사정했는데 또 싸고 싶어지게 만드는 무한 절정 천국…지옥? 천국…?

아무튼…그 엄청난 순환은 내가 콘돔을 끼는 것으로 멈출 수 있다.

이걸로 그레이프랑 섹스해도 너무 기분 좋아지지 않을 수 있다.

콘돔을 끼면 정액도 흡수하지 못하고, 나도 콘돔 한 장 차이로 그레이프의 보지 주름과 열기를 덜 느끼게 될 게 분명하다.

콘돔 한 상자를 구매한 나는 편의점에서 나와 초점이 나가 있는 주변 사람들을 살피며 다시 방으로 돌아갔다.

주변 사람들이 전부 이상하다고 생각하니, 나 혼자만 어딘가의 실험장 같은 곳에 던져진 기분이다.

사실은 이 사람들은 전부 로봇이고 무언가가 감시라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말도 안 되는 생각이지만, 그런 생각을 한 것만으로 묘하게 감시카메라들이 나를 따라오는 느낌이 든다.

도망치듯 방으로 돌아온 나는 콘돔 상자를 침대 매트리스 옆에 잘 놓아둔 뒤 포장을 뜯어 하나를 꺼내 놓았다.

그레이프가 덮치게 되면 내가 너무 느끼지 않도록 콘돔을 껴달라고 할 생각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문득 뭔가 이상한 점이 느껴진다.

섹스를 하지 못하게 하는 게 아니라, 콘돔을 껴달라고 부탁하려고 콘돔을 사 오다니….

이건 뭔가 이상한 거 아닐까….

그레이프가 오늘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 섹스하는 게 당연하다는 듯이 행동하고 있다.

하지만 당연하기는…당연한 것 같은데….

다녀오겠다고 했고…왜 다녀오겠다고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다녀오겠다고 분명히 말했고….

오면 또 섹스하겠지…?

“음….”

뭔가 이상한 것 같지만…그래도 잘못된 행동은 아니다.

아닐…거다.

아니겠지.

콘돔을 준비하며 오늘도 그레이프와 섹스하게 될 거라는 사실을 떠올린 나는 몸에 밴 땀 냄새를 씻기 위해 샤워실로 들어갔다.

샤워를 하면서도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든다.

섹스하기 전에 샤워하는 건 매너니까, 샤워하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그레이프랑 섹스하는 게 당연…한가?

…뭔가 이상한데.

그치만 그레이프랑 섹스하는 게 싫은 건 아니고….

기대하는 건 아니지만, 섹스할 거면 땀에 젖어서 하고 싶지도 않고…콘돔은 껴야 할 것 같고….

좋아, 난 잘못되지 않았다.

생각을 마친 나는 그레이프에게 언제 오는지 물어보기 위해 메시지를 보냈다.

아직 시간이 걸린다고 하면 야한 땀 냄새가 나는 침대 시트를 좀 갈아둘 생각이다.

[그레이프, 퇴근했어?}

{가는 중이에요!]

나는 그레이프의 메시지를 보자마자 어리둥절하며 시간을 확인했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 퇴근 시간은 아니다.

[벌써 퇴근했어?}

{그냥 일찍 퇴근했어요.]

[뭐? 왜?}

{어차피 회사에 더 있을 필요도 없는 것 같고, 밖에서 쇼핑 좀 하고 싶어서요!]

그레이프가 보낸 문장이 눈에 보이는데도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는다.

내가 알던 언제나 가장 늦게 퇴근하는 말단 직원이었던 나와 같은 시간에 퇴근할 정도로 성실한 팀장님이 하는 말이 아닌 것 같다.

이게 내가 알던 그레이프가 할 수 있는 말인가…?

[또 반차 쓴 거야? 휴가 그렇게 막 써도 돼…?}

{어제 생각해보니까 해도 될 것 같더라고요.]

[그래…?}

나는 적지 않게 당황하면서도 그레이프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하며 답장을 보냈다.

그레이프는 팀장이니까…마음대로 퇴근해도 뭐라고 할 사람이 없기는 하다.

그래도 그레이프가 이렇게 막 퇴근하다니….

혹시 나랑 섹스하는 게 그렇게 기분 좋은 걸까….

나를 덮치고 나니 지금까지 참던 성욕이 터져 나오며 섹스하고 싶어서 일하지 못할 정도가 된 건 아닐까….

나는 머릿속에 든 의문을 그대로 문장으로 옮겨적어 그레이프에게 보냈다.

[혹시 빨리 섹스하고 싶어서 일찍 퇴근한 거야?}

{해도 되죠…?]

[안 되는 건 아니지만…음….}

당연히 섹스할 거라고 생각하긴 했어도 막상 본인에게서 이런 얘기를 듣는 건 역시 당황스럽다.

나는 그래도 한 번 정도는 그레이프를 말려보고자 하며 타자를 쳤다.

[너무 해서 방이랑 내 침대에서 그레이프 냄새나는 것 같은데…진짜 또 하려고?}

여자들은 냄새난다는 말에 민감하다는 말을 어디에선가 들어본 적이 있다.

분명 이렇게 말하면 그레이프도 부끄러워서 한 번쯤 고민해볼 게 분명하다.

{ㄴ네!]

하지만 그레이프는 마법소녀여서 평범한 여자와는 다른 건지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부끄러움 없이 섹스하겠다고 말해버렸다.

나는 그레이프와 섹스할 생각에 몸이 멋대로 반응해 자지가 발기하는 것을 느끼며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어…천천히 와}

“으악!”

메시지를 보낸 나는 갑자기 창문이 드르륵 하고 열리는 소리에 놀라 비전폰을 놓쳐 떨어뜨렸다.

창가에는 역시나 이번에도 그레이프가 마법소녀로 변신해서 문틀을 밟고 내 방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으, 응….”

대체 얼마나 빨리 오고 싶어서 변신까지 한 거야….

이번에도 마법소녀로 변해 건물을 밟고 차며 날아왔을 게 분명하다.

그레이프는 방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변신을 풀며 맨발에 짧은 반바지, 끈나시 차림의 편한 옷차림으로 변하더니 손에 들고 있던 봉투를 바닥에 내리고 내용물을 꺼냈다.

나는 뭘 가져온 건지, 그리고 오자마자 뭘 급하게 꺼내는 건가 싶어 그레이프에게 다가갔다가 그레이프가 눈앞에 내민 손에 흠칫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

“빨리 이거 먹어봐요!”

“어?”

그레이프가 내게 내민 것은 뭔지 알 수 없는 하얀 약통과, 그 내용물로 보이는 알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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