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5화 > 위화감 (8)
고기는 맛있었다.
하지만 단백질을 보충하진 못했다.
식사를 마치고 이상한 고민에 빠져있던 나는 거짓말처럼 또다시 그레이프에게 덮쳐져 정액을 갈취당하고 말았다.
어젯밤의 기억이 흐트러져있다가 서서히 조각모음 되어 흐릿하게 재생된다.
고기를 다 먹어갈 때쯤 고기 먹으니까 좀 힘이 난다고, 정액이 좀 채워지는 거 같다고 하자마자 그레이프가 맹수처럼 날 노려보며 침을 삼키더니 손등을 손가락으로 간지럽히다가 해도 되냐고 물어보며 옷을 벗기 시작했었다.
나는 강력한 색기에 묶여 차마 저항하지 못하고 자지를 세워버렸다.
그리고 그레이프에게 기분 좋으니까 섹스하지 말라고 했는데 또 덮쳤다고 너무하다고 말하며 사정한 뒤, 기절하듯 잠들었다.
“좀 더 푹 자고, 이따가 일어나면 고기 남은 거랑 야채 볶아놨으니까 밥 거르지 말고 먹어요?”
“응….”
“많이 먹어야 몸도 좋아지고…덩치도 커지고….”
“어차피 먹어도 자지는 안 커지잖아….”
“아….”
쾌감에 절여져 완전한 숙면에 취해있던 나는 그레이프에게 이상한 말을 하다가 천천히 정신을 차리고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그레이프는 어느새 출근 준비를 마치고 정장 치마에 새 스타킹을 신고 있었다.
스타킹 안으로 손을 넣어 안쪽의 몸을 쓸어올리는 모습이 야릇하다.
“…방금 나 무슨 말 했어?”
“음…아니에요, 그래도 밥 잘 먹고 있어요!”
“아, 응…아침은? 먹었어? 나 냉장고에 식빵 있을 텐데 그거 구워 먹지?”
“그거 상해서 버렸어요.”
나는 그레이프의 말을 듣고 조금 놀라는 동시에 기묘한 감각에 빠져들었다.
냉장고에 넣었는데도 상할 수 있나?
당연히 상할 수 있지…바본가?
두 가지 생각이 서로 충돌한다.
“다녀오겠습니다~”
“다녀오세요…?”
그레이프의 목소리에 다시 정신을 차리며 잘 갔다 오라고 인사하자 이번에는 또 다른 의문이 머릿속에 맴돌기 시작한다.
다녀오겠습니다…?
다녀오세요라고 나도 모르게 대답해 버리긴 했지만, 다녀오겠습니다라니…너무 당연한 듯이 말해서 이상한 걸 느끼지 못했다.
이상하다…이상하다….
그러고 보니 이상한 일이 이것 말고도 또 있었다.
그레이프에게 정액을 착취당하는 동안 쾌감에 중독되어 파업하고 있었던 뇌세포가 서서히 일어나 쾌락에 잠겨있던 의문을 끌어올린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샤워실에서 물줄기를 맞으며 잠을 씻어 보냈다.
전신에 자리한 근육통이 차가운 물에 식으며 선명하게 느껴진다.
왼손이 움찔거리며 통증이 잦아들고, 기분 좋은 통증으로 변한다.
“으으으윽….”
샤워하며 팔을 접었다가 양옆으로 쭉 벌리며 기지개를 켠 나는 어쩐지 팔이 전보다 덜 접히는 것 같다는 이상한 감각을 느끼고 팔을 몇 번이고 접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분명 나는 오른팔을 접어서 오른쪽 어깨를 오른손으로 잡는 게 가능했는데, 지금은 손끝만 닿는다.
“흠…?”
이상하다는 생각에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보니 묘하게 어색한 감각이 여기저기에서 느껴진다.
잘 설명하긴 어렵지만, 지방이 좀 사라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살이 빠졌다…아니, 살이 빠지고 근육이 생겼다고 하는 게 맞을까?
나는 샤워를 마친 뒤 거울에 내 모습을 비춰보며 이곳저곳을 살펴봤다.
골반에 선명하게 떠오른 붉은 V 자국에 따라서 살이 확실히 빠져있다.
…그레이프가 섹스하면서 생긴 자국이다.
찍어 누르면서 지방이 한곳에 있질 못하고 다른 곳으로 밀려나기라도 한 걸까….
몸이 전체적으로 깨끗해져 있다.
형태도, 피부색도, 근육의 양도…눈 깜짝할 사이에 불어나고 있다는 게 확실히 느껴진다.
다른 것보다도 내 눈빛이 내가 기억하던 눈빛과는 완전히 다르다.
눈빛…눈빛이 다르다.
나는 샤워를 마치고 그레이프가 만들어 준 이름 모를 요리를 조금 먹은 뒤 조용히 나갈 준비를 해 집을 나섰다.
딱히 밖에 볼일이 있는 건 아니지만, 나가서 확인하고 싶어졌다.
지하철역 근처의 편의점으로 가 파라솔이 있는 의자에 앉은 나는 출근하기 바쁜 사람들을 여유롭게 내려다보며 한 명씩 관찰하기 시작했다.
평소와 같은 풍경이다.
이미 출근 시간은 지나있어 한산해져 있지만, 역 근처를 지나는 사람들은 여전히 많다.
편의점을 오가는 사람들, 가게에 들어가 자신이 살 물건을 사는 사람, 패스트푸드를 사 먹는 사람….
전에 이미 한번 무너지거나 부서진 적이 있는 건물에는 드론과 로봇들이 달라붙어 있다.
블록형으로 제작된 건물들에서 부서진 부품을 갈아 끼우고 용접하며 빠르게 수리한다.
건물 밑, 사람들이 오가는 도보 쪽에는 혹시 모를 낙하물을 받아내기 위한 임시 천장이 만들어져 있으며, 이미 수리가 끝난 곳에서는 설치되어있던 것들을 수거하는 트럭 형태의 로봇이 기계 팔을 뻗고 있다.
네거티브가 나타나기 전과 같으면서도 묘하게 다른 광경이다.
일반인들의 생활에는 전혀 변화가 없지만, 괴수 피해와 관련된 기술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발전되어있다.
이전과는 다르면서도 언제나와 같은 풍경이다.
하지만…뭔가 어색하다.
어색하다고 해야하나….
이상하다.
네거티브의 습격이 이렇게 많은데, 왜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하는 걸까.
네거티브는 교통사고나 자연재해가 아니다.
작은 규모로는 하루에도 다섯, 여섯 번씩…크게는 이틀에 한 번, 두 번 꼴로 일어나는 살육이자, 사냥이다.
출근하다가 언제든지 죽을지 모른다.
집에 돌아가다가 죽을지 모른다.
밥을 먹으러 나와 있다가 죽을지 모른다.
아무리 마법소녀가 지켜준다고 해도…상당히 안정화되어있어 일상생활이 가능해졌다고 해도…이건 좀 이상하다.
마진사에서도, 비전넷에서도 이런 얘기는 듣지 못했다.
집에 틀어박히는 사람의 수가 너무 적다.
밖에 나와 있는 사람이 너무 많다.
다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상실된 것처럼, 언제 죽어도 괜찮으니 일단 사회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처럼, 생활을 계속한다.
그것까지는…이해할 수 있다.
안정된 사회라는걸 유지해야겠다는 무의식적인 책임감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럴 수 있다.
평범한 일상이라는 걸 유지하기 위해, 무감각해질 수 있다.
이미 이런 세상에 적응해버렸으니…그럴 수 있다.
그런데 왜 다들 눈빛이 이상한 걸까?
모두가 그런 건 아니지만, 왜 대부분 사람들의 초점이 나가 있을까?
어떻게 먼 곳을 보는 듯한 눈을 하고 빠르게 달릴 수 있지?
서로 눈을 마주치면서도 마주치지 않은 채 대화하는 게 이상하지 않나?
왜 왼손을 다들 가끔씩 떠는 거지?
왜 고개가 삐걱거리지?
왜 다들 상대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모르는 거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기괴한 느낌이 계속해서 이게 이상하다는 걸 느끼게 해준다.
왜 나는 이 이상한 사람들을, 이상한 광경을 지금까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못했던 걸까?
이해되질 않는다.
다른 것보다도 그게 제일 이상하다.
왜 난 이게 이상하다는 걸 지금 느끼고 있는 거지…?
대체 왜…?
[다들! 괴수 경보가 울리면 쉘터로 들어가요! 이 주변 쉘터 위치는 이곳!]
[피난할 때는 질서를 지켜서, 제가 바로 구하러 갈 테니까 무서워하지 마세요!]
의문에 빠져있던 나는 의자에 앉은 채 빌딩 외벽에 붙어있는 대형 스크린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커다란 화면에 래피드가 나와 모두에게 주변의 쉘터 위치를 알려주고 있다.
일정 시간마다 정기적으로 보여주며, 어딜 가도 볼 수 있는 피난 안내방송이다.
커다란 가슴이 흔들리며 쉘터의 위치를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가리켜 알려주는 모습에 저절로 시선이 끌린다.
예전에도 난 이런 대형 스크린을 통해 래피드의 모습을, 마법소녀라는걸 처음 접했다.
출근 때마다 보면 기분이 좋아지는 화면에 길을 가던 모두가 주목한다.
“응…?”
모두가 주목한다.
전부 다.
모든 이들이 화면에 주목한다.
길을 걷던 사람들도, 운전하다가 신호에 걸린 사람들도, 테이크아웃 커피를 건네던 사람도….
전부 정지해서 래피드를 바라본다.
하나둘씩 고개를 돌리고 자신이 하던 일로 되돌아가고 있지만, 끝까지 시선을 놓지 않는 사람들도 상당하다.
그들 모두가, 초점이 나가 있다.
멍하니 입을 벌리고 래피드에게, 마법소녀에게…완전히 집중되어있다.
정상적인 상태로는 보이지 않는다.
[마시는 것만으로 쿨 다운, 청포도 맛 출시.]
대형 스크린의 화면에 비치는 마법소녀가 래피드에서 그레이프로 변하며 최근에 나온 스포츠 드링크의 광고가 흘러나왔다.
그러자 이번에도 사람 중 일부가 멈춰서 스크린에 완전히 집중했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묘하게 오싹한 광경에 의문이 점점 더 커진다.
이게 무슨 반응이지?
나도 저랬던 건가?
왜 난 지금은 저렇지 않지?
대체 왜…?
“아.”
전혀 풀리지 않고 커지기만 하는 의문에 빠져있던 나는 문득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에 주머니에서 비전폰을 꺼내 들었다.
혼자서 계속 고민해 봤자 답이 안 나온다.
나는 메신저를 켜 래피드에게 메시지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