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법소녀 최면물-161화 (161/299)

< 161화 > 위화감 (4)

나는 래피드의 입에서 나온 말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전화번호를 달라니…여자한테 이런 말을 들어본 건 길거리에서 사이비 종교집단에 속한 여자가 갑자기 내게 관심이 있다며 여기에 번호를 적어주세요 라고 한 적 이후 처음이다.

아니…생각해보니 그레이프가 내게 전화번호를 달라고 한 적이 있긴 있다.

분명 회식 때 술 마시고 다음 날이었나.

팀장님은 직원 연락망을 보시면 될 텐데 왜 나한테 전화를 물어보냐고 말하며 술이 덜 깬 건가 싶어 번호를 안 주긴 했지만, 어쨌든 사이비 종교가 아닌 여자가 나한테 전화번호를 물어본 적이 없는 건 아니다.

그런데도 평범한 여자가 아닌 래피드가 내게 번호를 물어봤다는 사실은 처음 이런 요구를 받아본 것처럼 흥분되고 당황스러웠다.

최면을 걸어도 좀 더 시간이 지나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던 게 래피드의 전화번호였다.

서로 연락처를 교환할 만큼 친해지고 싶어졌을 때서야 가능할 만한 일이다.

즉, 래피드는 나와 친해지고 싶어 하고 있다.

친구의 친구는 친구.

나와 친구가 되고 싶어 한다.

생각보다 훨씬 진도가 빠르지만, 나쁜 소식은 아니다.

“번호…요?”

전화번호 교환에 격렬히 찬성하는 입장인데도 긴장한 나머지 목소리가 떨린다.

래피드는 그런 내 목소리를 듣고 내가 혹시라도 거절할 거라 생각하는 건지 얼굴을 붉히고 눈치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서로…저기, 취미도 맞고…가, 가끔 연락하면 좋을 것 같아서….”

“취미요?”

“음식이라던가…책, 이라던가…? 그리고, 마법소녀인 걸 알아도 비밀 잘 지켜주시는 것 같고….”

음식이라면 달콤한 디저트 같은 음식…책은 로맨스 소설이다.

그러고 보니 애쉬나 그레이프, 에스더도 래피드처럼 로맨스 소설을 좋아할 것 같지는 않다.

같은 취미를 가진 척 연기한 게 생각보다 더 큰 효과가 있었던 듯하다.

“저기…그러면, 저희…그, 친구 하는…건가요?”

“아, 아! 아…네, 네에…! 친구….”

혹시나 하고 래피드의 생각을 확실히 알기 위해 질문하자 래피드는 깜짝 놀라며 달아오른 얼굴을 손으로 살짝 가렸다.

입가를 가리고 시선을 옆으로 돌리며 가늘게 뜬 눈을 깜빡인다.

“친구…?”

“친구….”

“친구?”

“네, 친구…!”

말하면서도 믿기지 않아 멍청하게 몇 번 더 확인해 보자 래피드도 내 말을 따라 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래피드랑 친구라니.

언젠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렇게 빠르게 될 줄은 몰랐다.

“조, 좋아요.”

나는 내가 혹시라도 거절할 거라 생각하는 건지 얼굴을 붉히며 내 눈치를 보고 있는 래피드에게 멍하니 내 비전폰을 내밀었다.

서로 연락처 공유 기능을 키고, 비전폰을 잠시 맞댄다.

이것만으로 명함을 교환하는 것처럼 빠르게 서로의 연락처가 교환된다.

래피드는 나와 번호를 교환하자마자 말없이 비전폰을 내리고는 나와 조용히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주변에 묘한 분위기가 감돈다.

번호를 서로 교환했다는 것만으로도 어쩐지 간지러운 기분이 든다.

“뭔가 조금 이상한 기분이네요….”

“그, 그러게요…저도, 남자친구는 처음이라서….”

“네?”

“아! 남자인 친구요, 남자 번호를 저장한 게 처음이라는 얘기에요!”

래피드의 말을 들은 순간 머리 뒤쪽이 당겨진 것처럼 귀에 힘이 들어간다.

처녀인 줄은 알았지만 연애 경험도 없었을 줄이야.

래피드의 연락처에 처음으로 등록된 남자 번호가 내 번호라니.

엄청나다.

“저 혹시…주, 주말에 바쁘세요?”

“주말요?”

“혹시…다른 직업 구하시느라 바쁘시면 어렵겠지만…괜찮으시면 같이 식사, 하고 싶은데….”

“예?”

래피드의 연락처를 받고 멍하니 놀라고 있던 나는 이어진 얘기에 정신을 잃어버렸다.

래피드가 먼저 같이 먹으러 가자고 하는 식사…?

혹시 이건 데이트…?

“다른! 의미가 아니고…친구로서 조금 친해지고 싶기도 하고? 그리고, 도와주셨으니까 그 보답도 해서….”

“아.”

아쉽게도 데이트는 아니었다.

하긴, 친구 사이에 데이트는 안 하지.

오해할 뻔했다.

그레이프가 야근을 시켜놓고 같이 식사하러 가자고 했던 것처럼, 연애감정과는 거리가 먼 얘기다.

그때처럼 단순히 고생했으니까 단순히 식사 대접을 한번 해 주겠다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같이 식사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둘만의 시간을 가진다는 얘기니, 내겐 아주 좋은 기회였다.

“저는 좋죠, 팬인 마법소녀가 팬미팅을 해 주겠다는데.”

“팬미팅은 아니고…친구끼리 밥 먹는 것뿐이에요.”

“음…근데, 잘못해서 둘이 식사하는 걸 누군가한테 보이기라도 하면 큰일이겠네요.”

“아! 그건 괜찮을 거예요.”

래피드는 나와 친구로서 같이 식사하고 싶어 한다고 해도, 가장 인기 있는 마법소녀와 단둘이 식사한다는 건 큰 스캔들을 일으킬 수 있는 일이다.

그 점을 걱정하며 말하자 래피드는 안심하라는 듯 활짝 웃으며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다른 사람에게 들키지 않고 단둘이 식사할 방법이 있는 것 같다.

“그럼…주말에?”

“네! 주말에….”

최면을 걸며 우연한 만남을 유도하는 것보다 훨씬 좋은 상황이다.

결국, 나는 래피드와 주말에 만나기로 약속했다.

래피드는 나와 만날 약속을 한 뒤 무척 긴장한 모습으로 고개를 삐걱거리며 딱딱하게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서로 눈을 마주친 채 어색한 순간이 흘렀다.

“연락처로 연락드리면 될까요…?”

“아! 제가 할게요…그리고, 연락은 되도록 메신저로…메신저는 제가 추가해서 메시지 보내둘게요!”

연락은 메신저로만 해달라는 건…최상위권의 마법소녀라서 바쁘니까 그런 걸까?

전투 중에 전화를 하면 받기 힘드니까 나중에라도 확인할 수 있게 메신저로 보내달라는 걸지도 모른다.

고개를 끄덕이고 나자 래피드와 나는 또다시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게 되었다.

…래피드와 나 사이의 공통점을 하나 발견한 것 같다.

서로 이성을 대하는 경험이 부족하다는 게 느껴진다.

대화가 잘 이어지지 않는다.

“…그, 그러면 저는 이만…!”

“네…!”

“저는, 저기, 바, 바빠서! 훈련 직전에 몰래 온 거거든요!”

“아, 아~네!”

묘하게 간지럽고 부끄러운 공기에 잠겨있던 나는 빨리 돌아가야 한다는 말에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래피드의 옆으로 손을 뻗어 현관문을 열었다.

그러자 래피드는 가까워진 나를 가만히 올려다보다가 얼굴을 붉히고 기어들어 가는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저, 공간이동….”

“아!”

나는 래피드의 말을 듣고 잠시 잊고 있었던 사실을 떠올렸다.

래피드는 굳이 밖으로 나가 걸어가거나 하지 않아도 공간이동 마법을 써서 돌아갈 수 있다.

마법을 쓰려면 밖에 나가는 것보다 폐쇄된 공간이 더 좋다.

“그러면…다음에 봐요!”

문을 다시 닫아주자 래피드는 내게 인사하며 곧바로 마력을 끌어올렸다.

래피드의 몸이 빛에 감싸이며, 피부 주변이 일그러지는 게 느껴진다.

곧바로 래피드의 몸이 사라지고 래피드가 사라진 공간으로 공기가 밀고 들어가 밀폐된 방 안에 바람이 불었다.

“아….”

나는 래피드가 사라지자마자 곧바로 최면어플을 실행히 추적기능을 열었다.

순식간에 0번 구역으로 돌아간 래피드의 위치가 보인다.

래피드가 돌아간 뒤에도 나는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아 멍하니 서서 0번 구역으로 돌아간 래피드의 좌표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아.”

그렇게 멍하니 있다가 뒤늦게 래피드의 머리카락을 채취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하지만 주말에 다시 만나기로 했으니 아쉬워할 필요는 없다.

화면을 바꿔서 연락처를 열어보니 래피드의 전화번호가 떠오른다.

그렇게 가만히 서 있자 갑자기 메신저가 울렸다.

{저 잘 도착했어요!]

“어, 어…!”

정말로 래피드한테서 메시지가 왔다.

메신저를 키자 그레이프와 회사 사람밖에 등록되어있지 않은 내 메신저 최근 대화창에 래피드의 이름과 프로필 사진이 떠오른 게 보인다.

클릭하자마자 친구추가를 한 뒤,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빠르게 래피드에게 답장을 보냈다.

[주말에 봐요! 훈련 힘내세요!}

{네!]

메시지와 함께 힘내는 고양이 이모티콘이 날아왔다.

래피드에게 어울리는 귀여운 그림이다.

래피드는 훈련에 들어갔는지 이후 더는 메시지를 보내지 않았지만, 나는 대화창을 킨 채 가만히 래피드가 보내준 메시지를 반복해서 읽었다.

진짜로 래피드가 나한테 메시지를 보내줬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그래도 계속해서 놀라고 있지만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서서히 상황에 적응해가며, 두근거리는 심장이 조용히 가라앉는다.

한층 진정한 뒤 나는 래피드의 프로필 사진을 클릭했다.

아마도 마법소녀들만이 봐 왔을 래피드의 메신저 프로필 사진이다.

클릭해보자 사진이 확대되고, 이전에 찍었던 사진들을 볼 수 있는 작은 창이 떠올랐다.

현재 등록되어 있는 사진은 무슨 상황인지 조금 이해하기 힘든 사진이었다.

가만히 앉아있는 애쉬, 그레이프를 쫓아가며 웃는 에스더, 진흙 범벅이 되어서 도망치는 그레이프, 뒤에서 수건을 들고 쫓아가는 래피드가 찍혀있는 사진이다.

지금이 아닌, 예전에 찍힌 것으로 보이는 사진이다.

그 다음 사진은 에스더랑 그레이프, 래피드가 같이 요리를 하고 있는 사진이다.

이건 나도 에스더가 방송할 때 본 적 있는 광경이다.

에스더는 신경질을 내며 엉망진창으로 칼질을 하고 있고, 래피드는 접시에 음식을 담고, 그레이프가 냄비를 젓는 모습이 찍혀있다.

“오어어….”

마지막은…놀랍게도 어디에도 공개되지 않았을 법한, 못할만한 사진이었다.

래피드와 에스더, 그레이프가 비키니만 입고 줄지어서 누워 일광욕하는 광경이 찍혀있다.

각자 분위기는 다르지만, 비키니가 작아 보일 정도로 셋 다 몸매가 좋은데다 사진을 다른 사람이 볼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지…조금 위험해 보이는 사진이다.

햇빛에 태우기 위해 피부를 최대한 드러내려고 끌어당겨 천 면적을 줄인 비키니로 아슬아슬한 곳만 가리고 있는 광경에 저절로 침이 꿀꺽 삼켜진다.

이런 사진을 찍으면서도 정말 아무한테도 보여줄 생각이 없었는지, 셋 모두가 당당하게 카메라를 보고 있다.

그건 그렇고…프로필 사진 전부가 예전에 모두가 사이좋았을 때의 사진들 뿐이다.

어쩐지 즐거워 보이면서도 씁쓸한 사진이다.

…그리고 야하다.

나는 사진을 두 손가락으로 확대해 그레이프의 가슴과 래피드의 가슴, 에스더의 가슴을 각자 비교하며 몇 번이고 돌려봤다.

서서히 사진을 내려 배를 지나 다리 사이를 보니, 벗은 것보다 야하게 당겨져 있는 비키니가 보인다.

“아…!”

밑이 욱신거리며, 왼손이 차가워진다.

피로가 갑자기 잊어버린 것처럼 풀린다.

발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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