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0화 > 위화감 (3)
뭔가 자국이 있었다면 그건 그레이프가 목에 입술을 대고 쪽쪽 빨아대서 생긴 자국이지, 위험한 건 절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일단 말을 삼켰다.
래피드에게 그레이프와 섹스하다가 생긴 키스 자국이라는 말을 할 수는 없다.
“아…음, 네…고마워요.”
“빨리 나아 주세요, 어제 쓰러지는 거 보고 그레이프도 엄청 걱정해서, 아….”
감사 인사를 하자 래피드는 활짝 웃으며 그레이프 얘기를 꺼내고,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저기…저, 혹시…저, 이상한 질문, 인데….”
말을 한번 멈춘 뒤 래피드는 갑자기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말하기 힘든 얘기인지 말을 더듬으며, 작은 한숨을 쉬고 입술을 살짝 깨물기까지 한다.
그렇게 한동안 말없이 우물쭈물하던 래피드는 눈에 보일 정도로 조심스러워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레이프랑, 화해…하셨어요?”
“어…화해, 요?”
“사이…안 좋아 졌던 걸까 해서….”
사이가 안 좋아졌다고 할만한 일이…있었…있었긴 한가?
내가 그레이프한테 가까이 오지 말라고 하긴 했다.
그게 그레이프에게 상처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럼 래피드의 질문대로 화해라고 할게…있었나?
엄청 박아대고, 엄청 섹스하고, 엄청 질내사정 하긴 했는데….
…화해인가?
“저기, 그레이프…마법소녀로서는 철벽이라는 단단한 별명이지만, 사실은 진짜 약하고 마음 여린 애거든요…? 조심성도 많고, 겁도 많고….”
“음…네.”
“둘이, 그…그냥 직장 동료 사이인 건 아는데, 친구…인거죠?”
친구….
친구는 무슨 사이를 말하는 걸까.
친구가 없는 세월이 너무 길어서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레이프랑 나는 친구인 걸까?
친구 사이라는 건…자지를 쪽쪽 빨아대고 보지를 푹푹 박아대는 관계를 말하는 걸까?
친구…인가?
친구 하기로 하긴 했는데….
최면으로 섹스할 때는 몰래 한 거니까 그런 생각을 안 했지만, 맨정신으로 섹스하고 나니 의문이 든다.
친구 사이에 질내사정을 해도 괜찮은 걸까…?
“어…친구….”
“치, 친구…죠?”
“…그렇죠?”
섹스프랜드라는 말도 있으니까, 친구 사이에 섹스하는 게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그레이프와 내가 섹스프랜드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섹스프랜드는 아니겠지?
래피드를 보고 잠시 머릿속에서 사라졌던 의문이 다시 떠오른다.
그레이프는 왜 나랑 섹스한 걸까…?
혹시 정말로 우린 섹스프랜드인걸까?
그런 상상 속의 동물 같은 관계가 정말 내게 생긴다고…?
“저기, 저도…그레이프랑 친구니까….”
“어…?”
멍하니 이상한 생각에 잠겨있던 나는 래피드가 그레이프와 친구라는 말을 들은 순간 망상을 펼쳤다.
그레이프랑 나는 친구고 섹스하는 사이….
래피드도 그레이프랑 친구라면…래피드랑 그레이프는 섹스하는 사이라는 걸까?
“그레이프도 많이 힘들 테니까…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는 몰라도 많이 미안해하는 것 같았고, 저…참견인 건 아는데, 아마 그레이프가 나쁜 생각을 가지고 뭔가 한 건 아닐 거에요….”
“아…네!”
두 사람이 서로 뒤엉켜 커다란 가슴을 빨아대고 보지를 맞대는 모습을 상상하던 나는 상상 속에서 둘 사이에 끼어들려는 순간 래피드의 목소리를 듣고 눈을 깜빡거리며 정신을 차렸다.
바보 같은 상상이었다.
그치만 행복한 꿈이었다.
“그러니까, 정말…좋은 애거든요? 그, 될 수 있으면 화해…하고, 얘기 나눠보면 분명 사소한 오해였을 거에요!”
오해…그러고 보니 그레이프도 오해라는 말을 많이 했었다.
뭐가 오해였다는 건지도 잘 모르겠고, 난 별로 신경도 안 쓰는데….
하긴, 그레이프도 내가 그런걸 신경 쓴다고 날 오해하긴 했지.
“아…서로 오해 있었던 건 어제 풀었어요.”
“그럼 화해한 거에요?”
“음…그렇죠.”
“아…! 다행이다….”
어찌되었든 서로 오해가 있었던 것 같고, 당사자랑 잘 풀고 섹스했다.
래피드는 그레이프와 내가 화해했다는 말을 듣고 본인이 화해한 것처럼 기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이 좋아 보여요, 이렇게까지 걱정해주고.”
그레이프와 래피드가 마법소녀로서도, 사적으로도 서로 친한 친구 사이라는 건 이미 유명한 얘기다.
그레이프도 래피드도 방어 위주의 전투를 하며, 둘 다 전투보다는 구조를 우선한다.
싸울 때는 믿을 수 있는 동료, 평소에는 닮은 점이 많은 친구.
친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래피드의 반응을 보니 알려진 것보다도 더욱 각별한 사이인 것 같다.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모습에 웃으며 말하자 래피드는 활짝 웃으며 자신의 친구에 대해서 얘기해주기 시작했다.
“네에, 서로 닮은 점도 많고 마법소녀가 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부터 같이 다녔으니까…제일 친한 친구 중 한 명이에요.”
“하긴, 둘 다 방어 위주의 전투라던가…성향이 좀 많이 닮기는 했죠.”
“조금씩 다른 점은 있어요, 좋아하는 동물이나 입맛 같은 거…? 그래도 서로 생각도 잘 통하고 고민거리도 얘기하고…그리고 이젠 몇 명 안 남았으니까…더 친해진 것도 있고요.”
몇 명 안 남았다는 건…마법소녀 얘기다.
애쉬, 래피드, 에스더, 릴리, 그레이프…상위권 뿐만 아니라 마법소녀 전체를 봤을 때도 가장 친하다고 할 수 있는 그룹이다.
이 중에서 릴리는 은퇴, 에스더는 네거티브 감염…그 외에 다른 상위권 마법소녀의 일부도 부상을 입거나 행방불명, 입원 중에 있다.
지금 래피드와 친하게 지내고, 대화를 자주 할 수 있을 만한 마법소녀는 애쉬와 그레이프 뿐이다.
애쉬는 래피드와 친하긴 하지만, 내가 느끼기엔 확실히 애쉬보단 그레이프와 좀 더 닮은 점이 많아 보인다.
성격도, 행동도…분위기도 서로 조금 비슷하다.
“아, 아무튼…무슨 일이었는지는 몰라도 앵거 씨는 좋은 사람이니까 분명 둘 다 오해했던 걸 테고…서로 오해가 풀려서 다행이에요!”
주변에 남은 사람이 줄어들어 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우울해진 것인지 점점 목소리가 작아져 가던 래피드는 화제를 빠르게 돌리며 다시 웃는 얼굴로 말했다.
나는 그 얘기를 듣고 고개를 끄덕이다가 한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 짧은 고민에 빠졌다.
좋은 사람이라니…날 좋은 사람으로 봐주는 건 좋지만, 내가 좋은 사람인 걸까?
“좋은 사람요…? 제가?”
“좋은 사람이잖아요…?”
너무도 당연한 사실을 말하듯 확언하는 래피드의 모습을 보니, 내가 좋은 사람인가에 대한 의문이 커진다.
좋은 사람이란 뭘까…?
일단 래피드랑 섹스하고 싶어서 최면을 걸 생각만 하고 있는 사람한테 어울리는 단어는 아닌 것 같다.
“…어제 그레이프랑 같이 집으로 데려오면서 잠깐 얘기를 나누기도 했는데, 무척 좋은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그레이프랑요…?”
“네에, 자기가 잘못한 게 많은데 늘 묵묵히 참아주고…괜찮다고 해 주고, 미안한 일밖에 없다고…그리고, 자기 몸을 너무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아서 걱정된다고….”
…그게 누구지?
일단 난 아닌 것 같고, 이 말을 한 사람도 그레이프가 아닌 것 같다.
아니면 그레이프가 사람 보는 눈이 좀 많이 안 좋은 걸지도 모른다.
그레이프의 다음 생일선물은 안경으로 해 줘야겠다.
난 회사에서 상사가 짜증 나게 하면 상사가 타오라고 시키는 커피에 몰래 침을 뱉을 수도 있는 무서운 사람이다.
훈련병 시절에도 화나게 한 놈 총기의 총열 덮개 안쪽에 몰래 솜을 집어넣어 총열이 달아올랐을 때 불이 붙게 하기도 했다.
그 자식은 입대하면 몰래 래피드 방에 숨어들어서 따먹겠다는 말을 감히 내 앞에서 했으니, 당해도 싸다.
난 내가 다치는 걸 엄청 신경 쓰는 사람이다.
여름에는 에어컨 바람을 너무 맞으면 감기에 걸릴까 봐 적당히 날 스쳐 지나가게 해 그레이프 쪽으로 찬바람이 가게끔 조절하기도 한 이기적인 남자다.
그레이프가 했다는 얘기 중에 나와 맞는 게 하나도 없다.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이네요….”
황당한 말을 듣고 인상을 쓰고 있는 내게 래피드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전혀 공감할 수 없는 의견이라고 생각하며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음…네…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 얘기한 거 아닌가요?”
“앵거 씨는 모르는 것 같지만…제, 제가 보기에는 정말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날 너무 좋게 봐주고 있는 것 같긴 하지만, 래피드가 내게 호감을 느껴주는 건 좋다.
그레이프 덕분에 래피드와 좀 더 쉽게 친해질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해 주면 저야 고맙죠.”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위험하다고 그렇게 막 뛰어들고…마법소녀도 아니면서….”
얘기를 들어보니 내가 에스더의 공격을 막으려고 뛰어든 걸 안된다고 혼내면서도 무척 좋게, 인상적이게 생각해주고 있는 듯하다.
좋게 봐 줄 때 굳이 다른 말을 더 하다가 실수할 필요는 없다.
흐름이 생겼으면 그대로 흘러가게 놔두는 것도 영업하던 기억에서 배운….
…이상한 얘기지만, 아무튼 알고 있는 방법이다.
“저기…혹시, 괜찮으시면….”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자 래피드는 갑자기 얼굴을 붉히더니, 조금 전처럼 손에 든 비전폰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하기 힘든 말을 앞둔 사람처럼 눈에 보일 정도로 긴장하고 있다.
“친구의 친구는…친구라고도 하잖아요?”
“그런가요…?”
“네, 네! 그럴…걸요? 그래서 말인데 저기….”
래피드는 한참을 말없이 서서 나를 가만히 올려다봤다.
입을 살짝 벌리고 눈을 깜빡이며, 말하는 것도 부끄러운 듯 얼굴을 점점 붉힌다.
그리고 침을 한번 꿀꺽 삼켰다 싶을 때, 눈을 질끈 감으며 비전폰을 내밀었다.
“번호 교환…! 하실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