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7화 > 혼란 (7)
그레이프가 출근하고 난 뒤 이제서야 하는 생각이지만…어제는 진짜 많은 일이 있었다.
아직도 머릿속이 많이 혼란스럽고, 상황이 잘 정리되지 않는다.
그레이프랑 섹스하는 데에 정신이 팔려 머릿속을 정리해보지 못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상한 일이 너무 많아 혼란스럽다.
내 상황을,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마침, 지금은 내가 혼자가 된 시간이다.
나는 옷장에서 대충 옷을 꺼내 입은 뒤 언제나처럼 노트북 앞에 앉아 가지고 있는 의문들을 하나하나 짚어보기 시작했다.
일단…지금 제일 궁금한 건 왜 이렇게 그레이프가 예쁜가 하는 것이다.
아니, 예쁜가가 아니라, 왜 이렇게 예뻐 보이는지…예쁘다는 말도 부족하긴 한다.
왜 이렇게 관능적이고 건강한 육체가 주는 매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느끼며 야릇한 색기가 흘러넘치는지…가 의문이다.
좋긴 한데…섹스할 때 엄청 흥분되고 너무 기분 좋아서 좋긴 한데….
너무 흥분돼서 이 상태로는 그레이프의 머리카락 냄새만 맡아도 발기해 버릴 것 같다.
자꾸 중학생 때의 지금보다 훨씬 성욕이 넘치던 내가 떠오른다.
그레이프가 갑자기 예전과 다르게 느껴지는 원인이 짐작이 가지 않는 건 아니다.
육체 반응이 확실하게 달라졌다는 얘기는 결국 내 육체에 뭔가 변화가 생겼다는 말이다.
그리고 내 왼손에는 아주 확실한 변화가 자리 잡은 상태다.
촉수 괴수는 체액에 음액이 아주 많이 섞여 있는 괴수다.
내 왼손에 박힌 촉수가 혹시 내게 자꾸 야한 기분을 들게 하는 건 아닐까?
가능성은 충분하다.
지금도 뭔가 차가운 액체가 흘러나와 근육통을 낫게 해주고 있는 게 느껴지는걸 보면 내 몸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건 확실하다.
피로와 상처를 회복시켜주는 대신 부작용으로 마법소녀가 평소보다 훨씬 예뻐 보이게….
…갑자기 그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뭐라고 말할 수 없지만, 이게 아니라는 건 알겠다.
왼손의 촉수 때문에 그레이프가 갑자기 예뻐 보이는 게 아니다.
그럼 대체 어째서일까.
일단, 정답을 모르는 의문은 뒤로 미뤄둔다.
다음으로, 가장 우선해서 해결해야 할 과제인 최면에 대한 문제들을 머릿속에 떠올린다.
다른 것보다도 그레이프에게 걸었던 최면들이 마음에 걸린다.
최면을 사용한 트라우마 제거.
전투를 도와주기 위한 최면.
마법소녀가 더욱 강해질 수 있도록 보조하는 사용법….
단순히 최면으로 마법소녀를 조종해 섹스할 생각만 하던 나에게는 조금 충격적인 최면이었다.
다급한 마음에 일단 걸고 본 거지만, 생각보다 훨씬 효과가 컸던 것 같기도 하다.
혹시 그레이프가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에스더의 기억보다 더 강한 힘을 낸 게…최면 때문은 아닐까?
…이것도 지금은 답을 알 수 없는 의문이다.
최면을 잘못 걸었을 때의 부작용은 크지만, 잘하면 엄청난 효과를 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좀 더 최면에 대해 알아볼 필요성이 느껴진다.
래피드와 섹스하기 위해서도, 위험해지지 않기 위해서도…좀 더 세세히 알아봐야 한다.
래피드와 섹스….
…그레이프와 너무 많이 섹스해서 그런지 지금은 욕구가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도 래피드와 꼭 섹스하고 싶다는 생각만큼은 머릿속에 단단히 박혀있다.
서로 애정을 가지고 가만히 바라보며 높은 호텔 창가에서 조용히, 로맨틱한 첫 경험을 하고 싶다.
…왠지 양심이 찔린다.
그리고 왼손의 촉수…이건 뭘까.
에스더가 내게 뭔가 심어놨고, 그게 그리 나쁜 의도에서 심은 게 아니라는 건 알고 있다.
뭔지 궁금하긴 하지만, 일단 내게 나쁜 영향을 주는 건 아닌 것 같고…묘하게 이게 있는 게 내게 좋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이 촉수가 혹시 지금 내 몸이 가볍고 감각이 예민한 것과 뭔가 관계가 있을까?
온몸의 감각이 피부 위에 씌워뒀던 천을 벗겨낸 것처럼 예민하다.
하지만 전보다 예민해졌다기보다는, 잊고 있던 감각을 되찾은 듯한 느낌에 가깝다.
A 시에 오지 않고 방위군을 준비할 때까지만 해도 몸이 이렇게 가벼웠었다.
다음으로 궁금한 건…기억에 왠지 구멍이 나 있는 것 같다는 거다.
내가 겪은 일이 기억나지 않는 건 아니다. 몇 주 전부터 오늘까지 있었던 일은 전부 선명하게 기억난다.
그런데도 뭔가…뭔가 중요한 걸 잊은 것 같은 느낌이 사라지지 않는다.
…제일 혼란스러운 건 지금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상한 단어들이다.
퍼스널 리얼리티, 테리토리, 임프린팅….
단어 자체의 의미는 대충 알 것 같은데, 그게 아니라는 느낌이 든다.
뭔가 내가 알고 있는 의미와는 다른 뜻으로 사용되고 있는 단어라는 확신이 든다.
“어….”
그러고 보니, 한 단어는 확실히 어딘가에서 봤던 게 기억난다.
내 기억이 맞다면…분명 최면에 대해서 공부할 때 봤던 단어다.
나는 곧바로 마진사에 접속한 뒤, 2동 박사와 최면술사가 나눈 대화를 찾아봤다.
[퍼스널 리얼리티 자체가, 마법소녀가 최면에 면역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일반인은 테리토리가 없으니 정신공격에 취약하다는 얘기….]
[그거랑은 상관없고, 그보다는 대다수의 사람이 일정한 키 코드와 마인드 해킹에 약한 방어율을 보이지만, 마법소녀는 예외라는 게….]
예전에 구매했던 글의 열람시간이 이미 지나 보이지 않지만, 짧은 미리보기 속에 확실히 내 기억과 같은 단어들이 보인다.
여전히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힘든…아니, 미묘하게 말의 뜻이 이해된다.
대체 왜…이게 조금이나마 이해되는 것인지 이해가 되질 않는다.
퍼스널 리얼리티는, 마법소녀 각자의 마법이 특징을 가지고 있는 이유 중 하나….
테리토리는 마력으로 형성된 마법소녀와 네거티브의 독자적인 마력 영향 영역….
임프린팅은 미리보기란을 아무리 찾아봐도 나오지 않는다.
사전적 의미는 각인, 아기새가 눈을 뜬 순간 처음 본 대상을 어미로 인식하는 걸 뜻하기도 한다.
…이 단어가 대체 왜 조금이나마 이해되는 걸까.
모든 의미를 파악한 건 아니라는 것도 느껴진다.
이상하다.
왜 내가 이걸 알고 있는지가 의문이다.
말도 안 되는 망상이라는 걸 알면서도 어쩐지 다른 사람의 기억이 내게 들어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정말 뜬금없는 기억이 내 머릿속에 선명하게 박혀있다.
…꿈이라도 꿨던 것처럼 내가 영업사원으로 일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있기까지 하다.
영업사원으로서 할 수 있는 약간의 연기나, 상대의 목소리 톤이나 표정을 읽고 파악하는 법…그리고 얼굴의 철판을 깔고 뻔뻔하게 대하는 마음이…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세세하게 기억난다.
대체 왜 이런 걸 알고 있는 걸까….
모르는 일투성이다.
지금은 모르겠는 것들을 전부 보류하고 나면, 그나마 약간의 단서만이라도 남아있는 일이 남는다.
결국, 내 목적은 예전과 동일하다.
래피드와 만나 머리카락을 채집해 포인트를 모으고, 2동 박사와 최면술사의 대화 기록을 파헤쳐 정보를 얻는다.
퍼스널 리얼리티, 테리토리, 임프린팅…지금부터는 최면만 알아보는 게 아니라 이 단어 자체의 의미에 대해서도 알아본다.
알아보고 내 상태를 파악하며, 최면도 공부해 래피드도 꼬신다.
그레이프한테 걸 때처럼 부작용이 생기지 않게…래피드에게는 좀 더 확실한 최면을 깔끔하게 걸어야 한다.
“후우…!”
생각을 끝낸 나는 마진사 사이트에서 나온 뒤 노트북을 종료하며 짧은 한숨을 토해냈다.
의문점들을 일단 전부 정리하고 정리한 머릿속에 잠시 침묵이 유지되다가, 갑자기 새로운 의문이 떠오른다.
…그러고 보니 난 왜 래피드랑 섹스하고 싶어하는 걸까.
A 시에 오기 전부터, 래피드에게 반해있었다.
래피드가 좋아서 래피드의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에스더의 방송도 꼬박꼬박 구독하고, 래피드를 쫓아다니려고 방위군에 지원하기까지 했다.
래피드의 흔적을 쫓으려고 네거티브가 나타난 습격지에 숨어들고, 머리카락을 채집했고, 최면어플을 얻은 뒤에는…애쉬에게 죽을지도 모르는데 목숨을 걸고 래피드와 섹스하려 하고 있다.
…난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이상하다.
왜…이렇게까지 래피드를 좋아하지?
래피드는…좋다.
귀엽고, 예쁘고, 상냥하고, 강하니까….
양갈래로 묶은 머리도 귀엽고, 단호해야 할 때는 단호하지만, 막상 힘든 일이 생기면 한없이 약해지는 모습이 귀엽다.
그런데도 온 힘을 다해서 노력해, 어떻게든 이겨내려고 발버둥 치고 애쓰는 모습이 멋있다.
모두가 성녀라고 칭송할 만큼 사랑받는 마법소녀다.
상냥하고, 착하고, 능력도 뛰어나다.
가슴도 크고, 귀엽고, 아담한데도 몸매가 정말 기적적일 정도로 야해서…남자라면 누구나 좋아할 수밖에 없다.
좋다.
좋은데….
…난 왜 래피드를 좋아하게 되었던 걸까?
…뭐가 원인이었지?
[똑똑똑]
“어….”
갑자기 든 의문에 점점 빠져들어 가던 도중, 갑자기 현관문 쪽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하던 생각을 멈추고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문 쪽으로 걸어갔다.
혹시 그레이프가 뭔가 두고 가서 일단 출근한 뒤 몰래 집으로 돌아온 건 아닐까.
이 시간부터 찾아올 사람도 없고 저렇게 상냥하게 노크해줄 만한 사람도 없는 집이다.
사이비 종교에서 온 사람들은 상냥하게 두드리긴 해도 혹시나 안에 사람이 듣지 못할까 봐 좀 더 오랫동안, 자주 두드린다.
아마도 그레이프일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혹시나 싶어 일단 도어체인을 문에 건 나는 천천히 문을 열고 문 틈새로 밖의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누구?”
“아, 안, 안녕…하세요.”
그리고 문밖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깜짝 놀라며 숨을 삼켰다.
기억에 있는 목소리다.
대체 왜 여기에, 왜 내 집 앞에 있는지 이해가 안 되는 상대다.
“어…?”
문 앞에는 원피스를 입은 래피드가 가만히 서서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