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5화 > 혼란 (5)
“으으음….”
덥다.
익숙한 알람소리가 들리자마자 땀을 흘리며 잠에서 깨어난 나는 근처에 손을 뻗어 비전폰의 전원을 끈 뒤 시간을 확인했다.
슬슬 출근할 시간이다.
“으으으읏…! 하아아…악!”
찌푸린 눈을 한 번 질끈 감았다가 뜨고 기지개를 켜자 끔찍한 수준의 근육통이 온몸을 덮친다.
배, 다리, 가슴, 등…아프지 않은 곳이 없다.
특히 아픈 곳은 허리다.
땀에 젖은 몸이 찝찝하다.
매트리스, 이불도 축축하다.
그러고 보니 침대 높이가 너무 낮다.
“으, 응….”
“아.”
잠이 덜 깬 상태로 상체를 일으키고 주변을 둘러보던 나는 바로 옆에 자고 있는 그레이프를 발견하고 그제서야 전날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어젯밤에 나는 그레이프와 계속 섹스하고, 섹스하고, 섹스하다가….
어느 순간엔가 필름이 끊긴 것처럼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
내 방에, 내 침대에 누워있는 그레이프를 보고 있으니 묘한 기분이 든다.
눈으로 보고 있는데도 실감이 안 난다.
최면도 안 걸었는데 나랑 섹스하다니.
그러고 보니까…왜지?
가만히 보고 있을수록 점점 위화감이 커진다.
왜 이상하게…예전보다 예뻐 보이는 걸까.
섹스한 상대라서 예뻐 보인다거나 하는 말도 안 되는 이유가 아니다.
그냥 뭔가, 잘 안 보이던 게 보이게 된 것처럼 예쁘다.
색맹이 색맹 교정안경을 쓰고 새로운 색을 보게 된 것처럼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인다.
지금 보니 치아가 엄청 하얗다.
마법소녀여서 그런 것인지 몸의 어디를 봐도 흠 잡을만한 곳이 보이질 않는다.
왜 이렇게 예뻐 보이는 걸까 싶어 감탄하면서도, 감탄할수록 더더욱 나와 섹스한 이유가 궁금해진다.
이렇게 예쁜데 굳이…최면 때문도 아니고 자발적으로 나랑 섹스한다고…?
기분 좋긴 했는데…좋았는데….
그 이유가 순수하게 궁금하다.
그레이프는 나랑 이미 섹스한 사이였고…날 강간하기도 했으니 섹스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날 강간한 건 내가 최면을 걸어서 그런 거였고…이번에는 딱히 뭔가 한 게 없는데….
왜 갑자기 섹스해준 걸까….
섹스할 때는 흥분해서 하지 못했던 생각들이 뒤늦게 머릿속을 채운다.
섹스한 게 싫어서 이런 생각을 하는 건 아니다.
믿기지 않는 것뿐이다.
그레이프같은 미녀가 왜…최면으로 나랑 하고 싶어지게 한 것도 아닌데 왜 나랑 섹스해준 걸까….
그레이프가 이상한 사이비 종교집단의 포교활동을 하는 것도 아닌데.
날 강간했다는 죄책감 때문에?
역시 그레이프가 말한 대로 몸으로 사과한 것 뿐인 걸까.
보지로 사과한다니…야한 만화에서도 보기 힘든 상황이다.
그치만 그레이프는 자위영상을 비밀계정에 올릴 정도로 야한 여자니까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정말 혹시, 설마 싶지만…사실 그레이프는 날 좋아하는 거 아닐까?
자기를 싫어하냐고 물어보기도 했고…일단 날 싫어하는 건 아닌 것 같다.
하지만 날 싫어하지 않는다는 게 좋아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치만 아무리 그래도, 보지로 사과한다면서 언제든 원하면 대주겠다는 말을 할까…?
역시 날 좋아하는 거 아닐까?
그렇다면 대체 왜…?
섹스했다고 남자들이 멋대로 연애하는 거라 생각하지 말아줬으면 좋겠다고 하는 말을 회사 여직원들의 대화를 엿들으며 들어본 적이 있다.
어쩌면 정말 단순히 그냥 섹스만 한걸 수도 있다.
섹스를 하긴 했지만, 섹스했다고 해서 좋아하는 건 아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레이프가 날 좋아할 이유가 없다.
좋게 생각해봐도 그냥 친구 정도가 아닐까.
난 보기만 해도 너무 예뻐서 두근거릴 정도지만, 그레이프가 보기에 나는 그냥 마른멸치 삼류 개발자 폐인 정도로밖에는 안 보일테고.
사실 그레이프가 그런 사람이 취향인 건 아닐까?
촉촉이같은 이상한 걸 싫어하지 않는 특이한 취향을 가진 여자니까 정말로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아무리 그래도 그레이프가 날 좋아할지도 모른다니, 망상이어도 믿기지 않는다.
이런 황당한 망상보다 더 확실한 가설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레이프가 나와 확실하게 친해지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을 만한 시기는 에스더를 만난 뒤, 최면어플을 사용한 뒤다.
아르나, 로제, 루이같은 다른 마법소녀에게 실험해 본 결과, 한번 건 최면은 취소한 뒤에도 그 여파가 남는다.
나랑 섹스하는 상상을 하는 최면이 취소한 뒤에도 여파가 남아 나를 보고 섹스하고 싶어진 게 아닐까.
나를 보면 기분이 좋아지는 최면도 걸려있었으니 그럴지도 모른다.
네거티브랑 싸우고 끓어오른 피를 섹스로 식히고 싶었을 수도 있다.
다른 것보다 날 강간했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끼는 최면이 문제다.
죄책감도 느끼는데, 내가 몸으로 사과해달라고 농담으로 말하기까지 했으니 그레이프는 이번에 죄책감을 떨쳐내고 싶었을지도 모르고….
이거다.
냉정히 생각해봤을 때 이게 맞다.
그레이프는 원래 야한 취미가 있는 마법소녀.
마법소녀니까 음액에 노출될 일도 잦다.
취소한 최면의 영향도 남아있을 테고, 죄책감을 풀 기회까지 찾아왔다.
이것으로 머릿속에 세운 가설이 증명됐다.
연애 경험이 없어서 실수할 뻔했다.
이렇게 예쁜 그레이프가 날 좋아할지도 모른다니, 정말 어이가 없는 망상이다.
이번에도 역시 최면이 뭔가 잘못된 거였던 게 틀림없다.
혹시 내가 싫어한다고 하면 자기가 잘못해서 퇴사까지 하고 싫어하기까지 한다는 생각에 죄책감이 너무 커져 버티기 힘들어질 테니까…이번에 큰마음을 먹고 한번 물어본 게 아니었을까.
대화해보니 싫어하는 건 아닌 것 같고, 몸으로 사과해달라고 하니 곧바로 섹스하자고 달려든 거고….
이해했다.
애초에 좋아했으면 섹스하자고 안 하고 키스하자고 했겠지?
그러고 보니 어제 섹스할 때도 서로 얼굴이 가까워졌다가 갑자기 얼굴을 틀어 목을 빨아댔다.
분명 흥분은 되는데 키스하긴 싫어서 그런 거다.
생각해본 것 뿐인데도 뭔가 상처받는다.
하지만 난 이런 상처에 이미 익숙해졌다.
그레이프는 커다란 딜도로 매일매일 자위해대는 여자니까, 최면이 없으면 나랑 섹스할 일도 없고 섹스해도 실망하기만 했을 것이다.
최면에 걸렸으니까 나랑 섹스하면서 좋아헤 주고, 딜도보다 내 자지가 좋다는 립서비스까지 해준 게 분명하다.
너무 잘 해주니까 어제는 너무 흥분해버렸다.
나 같은 마법소녀 오타쿠는 이렇게 상냥하게 대해주는 미녀한테 한없이 약하다.
옆에 누워서 잠들어있는 그레이프를 볼수록 생각이 더욱 확고해진다.
내 쪽을 보고 자고 있었는지 옆으로 누운 몸이 야릇한 곡선을 그린다.
커다란 가슴, 깨끗한 피부, 쭈욱 내려갔다가 위로 확 올라오는 골반 라인, 긴 다리까지…일단 누가 봐도 나 정도 남자한테 만족할만한 외모가 아니다.
속눈썹도 길고, 입술도 예쁘고, 코도 높고…전체적으로 도도하고 섹시하고 관능적인 인상에 몸매도 좋다.
어딘가 달리기 좋아하는 동물이 떠오르는 탄력 있는 다리 근육에선 건강미도 느껴지고, 전체적으로 강하면서도 여성스러운 인상을 자아낸다.
자면서 풀어둔 건지 긴 머리카락이 젖은 피부에 달라붙어 있는 모습도 자극적이다.
보기만 해도 두근거리는 외모다.
이런 여자가 순수하게 날 좋아할 리가 없지.
역시 이번에도 최면어플 때문이었어.
확실히 느끼는 거지만…최면어플은 양날의 검이다.
제대로 손잡이를 잡고 잘 휘두르면 원하는 대로 사용할 수 있지만, 잘못 쓰면 나도 베여 버린다.
이번에는 어떻게 된 건지 그레이프와 최면 없이 섹스한다는 굉장히 야하고 좋은 결과가 나왔지만, 오히려 그런 만큼 방심할 수 없다.
“아.”
혼자서 생각하고, 혼자서 이해하기를 반복하던 나는 시간을 확인하고 깜짝 놀라며 그레이프의 어깨에 조심스럽게 손을 올렸다.
피부만 닿았는데 이상하게 두근거린다.
전에는 안 이랬는데 왜 이러는 걸까.
“그레이프…그레이프…?”
“으, 응…으으응….”
“그레이프, 일어나.”
“응…? 아…아…앵거다~”
정신을 차린 그레이프는 잠이 덜 깬 눈을 감고 살며시 웃으며 평소보다 훨씬 귀여운 목소리를 냈다.
심장에 해롭다.
침이 저절로 삼켜진다.
“아, 아침…그, 출근…출근 시간….”
“아…하아아…으응….”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며 비전폰을 보여준 나는 계속 보고 있으면 얼굴이 빨개질 것 같아 그레이프한테 향하던 고개를 돌렸다.
나는 퇴사해서 갈 필요가 없지만, 그레이프는 오늘도 출근해야 한다.
가만히 시간을 확인하던 그레이프는 잊고 있던걸 떠올린 것처럼 작게 한숨을 내쉬고 몸을 틀며 기지개를 켰다.
그것보다 이상하다.
왜 이렇게 감정이 요동치지?
지금까지 감정을 느낄 줄 모르기라도 했던 것처럼 몸이 너무 격하게 반응한다.
예뻐서 숨을 못 쉬겠다는 말이 절절하게 느껴진다.
목소리까지 들리니까 더 심하다.
이래서야 회사에서 그레이프만 보면 시끌시끌하게 떠들던 사람들이랑 다를 바가 없다.
“잘 잤어요?”
“어? 어, 응…어? 응.”
얘기하려고만 해도 긴장된다.
그레이프를 대할 때 내 성격은 절대 이렇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어젯밤부터 두근거림이 멈추질 않는다.
하고 있던 생각이 머릿속에서 지워지고, 자꾸만 그레이프를 힐끔거리게 된다.
“…커졌네요.”
“아…아침이니까?”
그레이프는 가만히 누운 채 내 다리 사이에 시선을 향하더니 중얼거리듯 말했다.
방금 일어나서 그런 것도 있고, 그레이프를 보며 저절로 발기된 것도 있다.
나는 왠지 창피해져서 이불로 다리 사이를 가리려다가 그레이프에게 손목을 잡혔다.
“모닝 섹스…해도 돼요?”
“에?”
“아직 시간 있는데….”
모닝섹스…?
모닝은 아침, 섹스는 섹스다.
즉, 모닝섹스는 아침에 섹스하자는 뜻이다.
지금은 아침이다.
그레이프는 아무것도 안 입고 있다.
출근 시간까지는 확실히 조금 남아있긴 하다.
“어? 어…어? 으, 응? 지금?”
“네….”
“어….”
나는 당황해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다가 아무 말 없이 그레이프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멋대로 흥분해버린 자지가 움찔거리며 까딱까딱거린다.
그레이프는 그런 내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더니, 갑자기 팔을 확 끌어당겨 날 침대 위에 눕혀버렸다.
“하, 하게?”
“…해도 돼요?”
말은 허락을 구하는 것처럼 말하면서, 몸은 젖은 입구를 내 귀두에 맞춰 살짝 내리누르고 있다.
이런 짓을 해버리면 거절할 방법이 없다.
머릿속에 있던 생각이 자꾸 날아가 버리고 그레이프랑 섹스하고 싶다는 생각만 들어찬다.
“해도 돼요…?”
“윽….”
천천히, 천천히 밑으로 내려온다.
거절하지 않으면 그냥 해 버릴 생각이다.
위에 올라타 커다란 가슴의 끝을 내 몸 위에 살짝 올리며 끈적한 눈빛을 보낸다.
거절할 마음도 지워버리고, 애초에 거절할 마음이 들지도 않는다.
“해도 돼요…?”
밑으로, 밑으로, 깊숙이, 깊숙이.
허리가 내려와 치골이 완전히 밀착된다.
커다란 엉덩이로 골반을 누르며, 안쪽을 꾸욱 조인다.
아침이어서 그런 것인지 어제보다도 더 뜨거워진 듯한 보지가 자지를 기분 좋게 조여와 아찔한 느낌을 전해온다.
“…할게요?”
“읏….”
나는 그레이프에게 이유 모를 수치심을 느끼며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곧바로 내 가슴 위에 손을 올린 그레이프가 조심히 엉덩이를 들어 올렸다.
어젯밤처럼 똑같이, 쭈으읍 하고 빨아들이며 당겨 올린 뒤, 단숨에 밑으로 내려와 자지를 한 번에 삼켜버린다.
“하아아앙….”
“하아아….”
뜨거운 한숨과 함께 머릿속의 생각이 새어나간다.
그냥 기분 좋다는 생각밖에 안 나서, 바보가 된 것 같다.
그레이프는 그대로 내 위에서 허리를 흔들며 찌걱, 찌걱 하고 능숙하게, 용서 없이 자지를 쾌감에 빠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