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0화 > 질문 (9)
“그건….”
“음액 때문이면 어쩔 수 없잖아? 일단…그치? 처음에도 그랬고…? 그런데 마침 나는… 그레이프랑 하는 게 싫지 않기도 하니까…어쩔 수 없고, 좋아하는…쪽이니까.”
말하면서 그레이프쪽을 힐끔거리니, 어느새 내 쪽으로 완전히 몸을 돌린 모습이 보인다.
쭉 뻗은 다리에 커다란 가슴, 꽉 조여든 허리, 근육이 보여 건강미가 훤히 드러나는 몸에 관능미 느껴지는 얼굴까지.
마법소녀가 아니어도 눈길이 갈만한 미인이다.
보기만 해도 저절로 침이 꿀꺽 삼켜진다.
“…그리고 오늘 구하러 와줬잖아.”
“저 때문에…위험해진 거잖아요….”
“그레이프 때문이 아니라…아니, 맞더라도 구해줬잖아. 애초에 그레이프 때문이 아닌 게 맞고.”
내가 습격받은 건…에스더 때문이다.
어렴풋이 남아있는 감각과 기억 속에서 조금만 생각해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그레이프 때문이 아니다.
“그러니까…회사에서 그레이프가 뭔가 했다고 해도 난 신경 안쓰고…그냥, 다른 사람들이 그레이프랑 친해지는 것 같아 보이니까 질투해서 멋대로 그랬을 테고….”
“퇴사했잖아요….”
“원래 나 퇴사하려고 하고 있었는데…그레이프 파견 끝나면 나도 그냥 관두려고 했어.”
“…파견 안 끝났는데.”
“그건…하아, 아무튼 그레이프 때문에 그런 거 아니야. 다른 사람들이 괴롭혀서…아오, 그래…그레이프 때문에 그랬다고 생각한 거면 미안해.”
“어?”
얘기를 좀 들어보니 그레이프 입장에서는 충분히 내가 그레이프때문에 퇴사했다고 생각할 만하다.
나를 강간해서 죄책감을 느낀다, 강간한 뒤 내가 퇴사한다, 심지어 자신이 나에 대해 안 좋은 얘기를 한 탓에 다른 직원들이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최면이 그레이프의 사고에 섞여 자신 때문에 내가 퇴사했다고 여기게 되었을 것이다.
“애, 앵거 씨가…사과할 게…사과를 왜….”
“미안, 나도 회사에서 자꾸 괴롭히고 그레이프 들먹이니까 스트레스 받아서 조금 오해한 것 같은데…그레이프가 날 괴롭히려고 했으면 구하러 와주지도 않았을 거 아냐.”
“어? 네, 그, 네에…마, 맞아요.”
“그러니까…음, 믿어. 그레이프가 날 괴롭힐 생각은 없었고, 오해고…조금 안 좋게 착각할 만 했고…아무튼, 하아….”
그레이프가 오기 전부터 묘하게 날 괴롭히고 있다가, 잠시 정지, 다시 그레이프를 들먹이며 괴롭힘을 시작하고 더 심해진 직원들.
내게 최면에 걸려서 나를 강간하고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가 또 최면이 잘못되어서 다시 강간해버린 그레이프.
어째서인지 이상하게 생각해서 모든 잘못을 그레이프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이해가 안 되는 행동을 연발한 나까지….
상황을 좀 풀어보려고 생각해보니 일이 생각보다 복잡하다.
가장 이해가 안 되는 건 내 행동이다.
대체 뭘 어떻게 하면 사고회로가 그렇게 동작하게 되는 걸까.
내 행동이었는데 내가 이해가 안 간다.
이해가 안 가는 내 행동을 내가 해결하기 위해 애써야 한다는 지금 이 상황 자체가 답답하다.
그래도 일단은 해결해 둬야 한다.
냉정하게 생각해봐도 그레이프와 지금 사이가 멀어지는 건 그리 좋지 않은 선택이고, 감정적으로 생각해봐도 별로 내키지 않는다.
“미안.”
“어, 어? 어…? 어?”
“불렀을 때 걱정해주고 바로 와 줘서 고마워.”
“어어어어…? 어?”
일단 사과와 감사인사부터 한 나는 놀라고 당황하는 그레이프와 눈을 마주치며 조금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괜히 얼굴이 붉어져 얼굴을 보는 게 어렵다.
심지어 이상하게 전보다 훨씬 예뻐보여서…보기만 해도 두근거린다.
“그…음, 퇴사했다고 안 볼 것처럼 얘기하지 말고…연락했으면 좋겠, 그냥…저기, 전에 친구…하자고 했잖아.”
“네, 네에….”
“그러니까…그게, 싫어하는 거 아니니까…아! 냉장고에, 케이크 있는데…그거 그레이프 줄려고…한거였는데, 아직 맛있을테니까…그게, 케이크 주려다가…그레이프가 나 덮쳐서…못 준건데.”
어떤 케이크였는지 깜빡해버렸지만, 분명 냉장고 안에는 그레이프한테 줄까 싶어서 사둔 케이크가 남아있다.
내 말을 들은 그레이프가 주춤거리며 냉장고 쪽으로 다가가 문을 열고 안쪽을 힐끔거렸다.
“…그거, 맛있어서….”
“아, 어…앗…네, 네에….”
“저기 그리고…진짜로, 약간 그렇게 나쁜 짓 해도 그레이프니까 괜찮…아…그러니까, 싫은 거…아니니까.”
말하다 보니 분위기가 너무 어색하다.
간질간질하고, 부끄럽고, 민망하다.
입이 저절로 닫힌다.
그레이프는 어느새 천천히 냉장고를 닫고, 벽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시선을 살짝 밑으로 내리고 계속해서 내 쪽을 힐끔거린다.
똑같이 그레이프를 힐끔거리던 나는 어색한 분위기를 참지 못하고 조금 저질스러운 농담을 던졌다.
“난 진짜 괜찮은데…그래도 그레이프가 정 미안하면…몸으로 사과하는 건 어때?”
“네?”
그레이프와 이미 섹스한 사이라는 생각에 그냥 입 밖으로 꺼내고 보니 너무 저질이었나 싶은 느낌이 뒤늦게 든다.
그냥 너무 미안해하지 말고 가볍게 생각하라고 한 말이었는데…이건 좀 아닌 것 같다.
“농담이야! 이건 농담…그만큼 그게,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는….”
“…정말?”
나는 그레이프에게 변명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그레이프는 갑자기 얼굴을 붉히고 내 쪽을 보더니, 천천히 기대고 있던 벽에서 등을 떼고 있었다.
“어…?”
잘못 들은 건가 하고 당황하며 고개를 들어 올리자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한다.
어느새 해가 져 창문 밖에서 들어오는 불빛이 방안을 그늘지게 비춘다.
줄무늬처럼 빛과 그림자에 번갈아 비치고 있는 그레이프의 모습이 보인다.
긴 머리를 단정하게 묶은 머리카락이 손가락에 쓸어내려 져 천천히 앞으로 당겨진다.
입술이 야릇하게 빛나고, 젖은 눈이 반쯤 감겨 내 눈에 마주친다.
얇은 민소매에 가려진 커다란 가슴이 숨을 들이마시는 것에 맞춰 살짝 부풀어 올랐다가, 서서히 내려간다.
크게 벌어진 골반이 살짝 흔들리며, 상의가 올라가 배꼽이 드러난다.
허리 뒤쪽에 둔 손의 엄지손가락이 조심스럽게 반바지에 걸린다.
쭉 뻗은 다리 끝의 발가락이 꼬옥 쥐어진다.
“…사과하면…받아줄 거에요?”
그대로 천천히, 엄지손가락에 걸린 옷이 골반 밑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새하얀 골반이 가장 먼저 드러나 창밖으로 새어 들어오는 빛에 비친다.
허리에서부터 떨어지는 음란한 라인에 따라 옷이 벗겨지며 늘어났다가 다시 줄어들어 간다.
한 번에 속옷까지 잡아버린 손가락이 내 눈치를 보며 중간에서 살짝 걸린다.
아랫배 밑의 살짝 튀어나왔다가 들어가는 곡선이 시선을 잡아끈다.
저절로 침이 삼켜진다.
조금 더, 조금 더 밑으로 내려간 반바지가 일정한 라인을 넘어간 순간 그대로 스르륵 떨어져 내린다.
발밑에 걸린 옷이 살짝 접히는 다리에 걸려 따라 올라갔다가 툭 하는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아래에 아무것도 입지 않은 그레이프의 모습이 보인다.
“연락해도 돼요…?”
“어, 어…? 응? 어…?”
“몸으로…사과하러 와도 돼요?”
두 눈이 크게 떠져서 그레이프의 몸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분명 전에 봤던 몸인데, 예전엔 대체 왜 이걸 몰랐던 걸까 싶을 정도로 야하고 매력적이다.
심장이 너무 빠르게 뛰어서 숨이 막힌다.
나는 그레이프에게 가만히 눈을 맞대고 서서히 나를 향해 걸어오는 그레이프를 바라보고 있었다.
소리 없이 조심히 가까워지는 그레이프의 시선이 내 밑을 힐끔거린다.
같은 곳을 보니 어느새 자지가 아플 정도로 발기해 있었다.
“이, 이건…저기…그게…음액, 음액 때문에….”
괜히 음액 때문에 발기했다는 핑계를 댄 나는 말해놓고도 정말로 음액때문에 이런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심장소리가 커지는 걸 느꼈다.
귓속이 시끄러울 정도로 두근거린다.
숨이 점점 가빠지며, 그레이프에게 시선이 완전히 고정되어 움직이질 않는다.
“…음액 때문이에요?”
“어..어? 어?”
바로 옆까지 다가온 그레이프가 천천히 매트리스 위에 올라온다.
이불을 옆으로 완전히 치워버리고, 앉아있던 내 어깨를 잡아 조심스럽게 눕혀 가만히 내려본다.
나는 멍청하게 그레이프를 올려다보며 두근거리고만 있었다.
가만히 옆에 앉아 몸을 눕힌 그레이프의 커다란 가슴이 내 어깨를 감싼다.
긴 다리가 내 다리에 얽히고, 열기에 젖은 눈빛을 마주친다.
숨이 막혀 버릴 정도로 야릇하고, 관능적이고…예쁘다.
나는 숨을 들이마신 채 그대로 멈춰버렸다.
"아, 어, 아…."
분명 몇 번이나 최면을 걸어 끌어안고, 욕정을 쏟아낸 상대인데…이상하게 긴장된다.
왜 지금까지 이런 느낌을 못 느꼈을까 싶을 정도로 너무 야하고, 매력적이어서…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언어능력이 퇴화되어 버린다.
침을 꿀꺽, 꿀꺽 삼키고 그레이프를 가만히 올려다보자, 그레이프가 내게 야릇하고 달콤한 시선을 보내왔다.
숨이 막힌다.
“음액 때문이면…어쩔 수 없는 거죠?”
그레이프의 손이 천천히 배를 타고 미끄러져 내려간다.
그대로 다리까지 들어가 팔을 세워 바지를 벗겨낸다.
어느새 빳빳하게 발기된 내 자지는 그레이프의 손에 조심스럽게 쥐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