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법소녀 최면물-149화 (149/299)

< 149화 > 질문 (8)

“에?”

갑자기 이게 무슨 말일까.

당황해서 멍청한 소리를 낸 나는 가만히 그레이프 쪽을 보고 있었다.

힘 조절이 어려운지 싱크대에서 작게 끼긱 하는 소리가 났다가 멈춘다.

“저…저…! 제가…! 전부…착각, 한 거에요…?”

“어….”

“처음부터, 저 혼자…제 착각…오해밖에 없는 거예요?”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대체 뭐가 착각이고, 뭐가 오해라는 거지.

뭔지는 모르겠지만…그레이프가 굉장히 고통스러워하는 건 알겠다.

목소리만 들어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감정이 선명하게 느껴진다.

“몰랐는데…나만, 나만…몰랐는데, 다들…괴롭히는 줄…몰랐는데…나는…난…우우우우…윽, 으으으….”

“그레이프?”

…이거 우는 건가?

갑자기 왜…뭐 때문에?

당황스러우면서도 뭔가 굉장히 먹먹하다.

그레이프의 앞에서 계속해서 물소리가 나고 있다.

물이 반사되는 빛 때문에 울고 있는 건지 잘 보이지 않지만, 어깨가 작게 떨리고 있다.

나는 혹시나 우는 건가 싶어 그레이프에게 조심히 말을 걸었다.

“…울어?”

“아, 안 울어요…무슨 소리에요.”

“어….”

…진짜 안 우는 것 맞나?

그레이프가 그렇게 말했으니, 안 울었거나 울었다는 걸 알려주기 싫다거나 둘 중 하나다.

그러면 그냥 모르는 척해주는 게 맞다.

맞는데…이상하게 마음에 걸린다.

“그냥, 그냥…그냥….”

“그냥?”

“…그냥, 앵거…씨한테 잘못한 게 너무 많은 것 같아서….”

“…뭘?”

대체 뭘…잘못했다는 거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레이프가 잘못했다고 할만한 게….

어….

날 강간한 거…?

그치만 그건 내가 최면을 잘못 걸어서 그렇게 된 거지, 그레이프의 잘못이라고 할만한 게 아니다.

아니, 대체 왜…내가 왜 이걸 그레이프가 잘못한 것처럼 생각하고 있던 거지?

“처음, 같이 술 마셨을 때…마법소녀인거 숨기려고, 취한 척해서 피곤하게 한 거랑….”

“별로 피곤하게 하진 않았는데….”

술 취한 척을 잠깐 한 것 같기는 한데, 아주아주 잠깐이었다.

부장이랑 과장이 사라지자마자 술이 좀 깬다면서 고개를 들고 멀쩡해졌다.

그냥 아, 이 사람 몸매도 좋은데 술 취해도 일어선 자세가 곧고 바르네 정도만 생각했다.

“뒤에서, 견제한다고…다른 여사원한테 나쁘게 말한 거랑….”

“…뭘 견제해?”

여직원들한테 나쁘게 말하는 걸 듣기는 했지만, 그건 나쁘게 말했다기보다는 그냥 사실을 말한 거니까 신경 쓰지 않는다.

매일 듣던 말이고, 그럴 수도 있지.

그보다 견제했다는 게 대체 뭔지 좀 신경 쓰인다.

“선물…이, 이, 잃어버린 거….”

“어…? 견제한 건 뭐였는데…그리고 그건 버린 거랬잖아.”

“잃어버린 거! 잃어버린 거…!”

“아, 응….”

버린 게 아니었나…?

엄청난 압박감이 느껴지는 걸 보니, 내가 기억을 잘못하고 있는 게 아닐까.

강한 마력이 기억에 영향을 준다고 했으니까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더라도 그냥 내가 잘못 기억하고 있는 거로 해야 할 것 같다.

“그리고…그리고…그리고….”

전부 다 잘못했다고 하기에는 조금 거리가 있지 않나 싶은데, 아직도 뭔가 남았는지 말을 더듬는다.

흠뻑 젖어 떨리는 목소리에 부채감이, 죄책감이 묻어나온다.

“가, 가, 가, 강간…! 해서…! 으으으읏…죄송, 잘못…했어요….”

“어….”

이 반응을 보고 나니 내가 그레이프에게 건 최면이 저절로 머릿속에 떠올랐다.

강간했다는 사실에 큰 죄책감을 느끼게 하는 최면 때문에 내게 조금이라도 나쁜 일을 했다 싶으면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건 아닐까?

지금까지 별로 느끼지 못했는데, 굉장히 괴로워하고 있는 게 느껴진다.

…이렇게까지 괴롭힐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난 그레이프한테 왜 그렇게 제약을 걸려고 한 걸까.

나한테 뭔가 위해를 가하거나 공격할까 봐, 배신할까 봐 최면을 걸어서 제약한다니.

그레이프는 마법소녀인데…그럴리가 없다.

물론 최면을 걸었다는 걸 들키면 화도 내고, 잘못하면 공격을 할 수도 있긴 하겠지만…그렇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하나하나 철저하게 속박하듯 제압해 둘 필요는 없다.

그냥 나한테 공격하지 못한다는 최면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모르겠다.

최면을 걸어서 제약을 거는 것 자체는 맞는 생각이다.

내가 한 건 상대의 의지와 의사를 강제로 꺾어서 마음대로 하는…마법소녀가 아니어도 거부감을 느낄만한 행위니까, 당연히 그 사실을 안 순간 내게 적대감을 가질 만 하다.

맞긴 한데…맞는데….

이상하게 거부감이 든다.

최면을 걸고 싶은 것도 맞고, 최면을 걸어서 조종하는 게 기분 좋은 건 맞는데…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없던 감각이 갑자기 생겨난 것처럼 양심이 찔린다.

그레이프가 얼마나 힘들어하는지 목소리만 들어도 느껴져 속이 갑갑해진다.

이렇게까지 괴롭혀야 하나…?

나 너무 쓰레기 같은데…?

좀 너무한거 아닌가?

“음….”

“괴롭히려고 한 거 아니었어요…진짜로, 진짜…오해해서…! 회사도! 회사도…전부, 전부…뭔가 잘못돼서…그러려고 한 게 아니라…제가 괴롭히라고 한 게, 나쁘게 말한 게 아니에요….”

“아, 응. 그치.”

“그냥…그냥…가까워지고, 싶었던 건데….”

그건 말하지 않아도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회사 사람들이 좀 이상한 거지, 그레이프는 뒤에서 누굴 괴롭히라고 할만한 사람이 아니다.

“후, 후우…미안해요, 그게…이제, 못 볼…테니까, 사과하고 싶었어요.”

가만히 얘기를 듣고 있던 나는 그레이프가 한 말에 깜짝 놀랐다.

못 본다니, 이게 대체 무슨 말일까.

무슨 얘기인지 말 좀 해보라는 의미로 그레이프쪽을 가만히 보고 있자 그레이프가 내게서 등을 돌린 채 앞치마 끈을 풀었다.

“퇴사…축하, 해요…이제 괴롭히지도 않고, 힘들지도 않을 거고….”

내 쪽을 전혀 보지 않고 앞치마를 곱게 접어서 싱크대 옆에 정리해 올린다.

그대로 가만히 서서, 조용히 물을 멈춘다.

“…좋아하지도 않는 마법소녀인데 멋대로 착각해서 미안해요.”

“어?”

“그래도 혹시…길에서 만나면 인사 정도는 해주세요….”

“어? 어? 아니, 잠깐…잠깐만.”

나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려다가 근육통에 다리를 부들부들 떨며 다시 주저앉았다.

어느새 내 쪽으로 살짝 몸을 돌린 그레이프는 그런 나를 젖은 눈으로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

나는 그레이프를 올려다보며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안 볼 거야?”

대답이 없다.

가만히 입을 다물고, 고개를 돌린다.

안 보겠다는 의미인가?

대체 어째서?

“…그레이프?”

“읏….”

최면을 잘못 걸었나?

가까이 오지 말라는 최면은 이미 삭제해 뒀다.

대체 뭐가 어떻게 어디에서부터 꼬여서 그레이프가 이런 말을 하는 거지?

“안 볼 거야…?”

“앵거 씨…저 싫어하잖아요….”

대체 왜 내가 그레이프를 싫어한다고 생각하는 건지 모르겠다.

몸매도 좋고, 능력도 있고, 야하고, 강하고, 그렇다고 나한테 뭐 잘못한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싫어할 이유가 없는데.

모르겠다.

모를 땐 물어봐야 한다.

“어…왜 그렇게 생각하는 건데?”

“강간…했잖아요…맨정신일때도, 아닐, 때도….”

그거라면…죄책감을 느끼게 해 두었으니 그레이프가 내게 미안해할 만한 일이지, 내가 그레이프를 싫어할 이유가 아니다.

“저기…전에도 말했지만 그건 괜찮다고 했잖아? 그레이프니까 괜찮다고….”

“또 했잖아요! 침대도 부쉈고, 허리에 자국날 정도로 했잖아요!”

“음….”

그 말대로 내 방에는 지금 망가진 침대 프레임도 그레이프가 치워줬는지 보이지 않고, 내 배에는 아직도 V자 모양으로 그레이프가 찍어누른 자국이 남아있다.

강간당했습니다 하는 표식처럼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다.

“…그, 나도 그때는 조금…너무 격하게 반응하긴 했는데…그레이프 그때 슬라임 잡고 있다고 했잖아…? 음액에 중독되어서 그런 거 아냐?”

“슬라임은…그건….”

“그러면 이해해 줄게, 괜찮아.”

“스, 슬라임 안 잡았단 말이에요! 혼자 자위하다가, 계속 앵거랑 하고 싶어서 자위하다가 강간하러 간 거라고요!”

“어….”

이건 조금 할 말을 잃게 만드는 발언이다.

그치만…그것도 따지고 보면 내가 최면을 잘못 걸어서 그런거지 그레이프의 잘못이 아니다.

그레이프가 죄책감을 느끼는 건 내가 그렇게 만들어서 그런거지, 그레이프가 잘못한 게 아니다.

나는 그레이프를 달래주기 시작했다.

“괜찮아…나도 그레이프랑 하고 싶어서 자위한 적 있고….”

“…네?”

“그, 계정 팔로우 하고 있잖…아?”

“아….”

솔직하게 말하니 그레이프가 조금 놀란 목소리를 낸다.

당사자 앞에서 너랑 섹스하는 상상하면서 자위했다고 고백하다니, 말하고 보니 좀 부끄럽기는 하다.

그래도 확실히 효과는 있는지 그레이프의 목소리가 조금 진정되는 게 느껴진다.

“그리고…음, 강간한 건…전에도 말했지만 난 괜찮은데…마법소녀니까, 약간 그…음액때문에도 욕구가 쌓이긴 할…하지? 하는 거 맞지? 어…하지 않을까? 그러니까 자위도 많이…했던거지?”

그레이프는 내 질문에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마법소녀는 네거티브를 상대할 때 욕구가 쌓일까?

일반인은 과할 정도로 쌓이지만…마법소녀는 어떤지 잘 모르겠다.

“그러니까…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그리고 그레이프는 그, 예쁘…니까? 솔직히, 남자로서…싫어하는 건 아닌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