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8화 > 질문 (7)
[근데 너 그레이프한테 좀 잘해주면 안 돼? 왜 이렇게 얘가 불쌍해졌어?]
“…뭐가?”
[그레이프가 우는 게 어울리긴 하는데…좀 내가 느끼기에는 격차가 너무 심하거든요.]
“우는 게 뭐…? 너 쓰레기야?”
나도 만만치 않게 쓰레기지만, 이 녀석한테 비할 바는 아니다.
대화를 하다 보니 슬슬 정리되어간다
.
지금까지의 나는 그대로, 그 위에 다른 내가 덮어씌워진다.
다른 건 전부 그대로, 감정연기를 좀 더 능숙하게, 거짓말을 좀 더 잘하게, 상대의 생각을 파악하는 기술을 익힌다.
원래 있던 게 빠져나갔으니, 아마 서서히 감정을 느낄 수 있게 될 것이다.
다른 것보다도 막히던 게 사라진 데다 익숙함까지 더해졌으니 공감능력이 전보다는 나아질 게 분명하다.
“근데 이거…아무리 그래도 내가 너무 혼란스럽지 않을까?”
[그렇겠지…그래도 최대한 원래 상태를 유지시켜 뒀으니까 괜찮을 거야.]
“이거 이러는 거 맞아?”
[나도 몰라? 내가 이런 게 아니잖아.]
“…근데말야, 나 이대로 가면 더 쓰레기가 되는 거 아닐까?”
[잘하면 이리저리 계획하면서 영업사원처럼 연기도 하고 살살 꼬드겨서 따먹는 쓰레기가 되겠네.]
“야….”
진짜 이게 맞을까?
이것밖에 방법이 없었던 걸까?
꼭 이래야만 했나?
[그래도 이게 아니면 끝이 그리 좋지 않을걸.]
“아오 몰라, 내가 알아서 하겠지.”
[나다운 발언이군…역시….]
어차피 지금 나는 여기에서 깨어나면 거의 모든 걸 잊어버린다.
나도, 이 녀석도 이대로 사라질 거…이 정도까지 해줬으니 더 책임져줄 생각은 없다.
알아서 잘 해보라지.
[근데…이거 이렇게 섞어도 돼?]
“음.”
아무리 좋은 것만 섞어두려고 해도 장점만 합쳐지는 건 아니다.
위화감도 느끼게 될 테고…조금은 이기적이게 될지도 모른다.
수동적인 성격도 조금은 적극적이게 변해서, 바보 같은 짓을 더 많이 할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남아있던 것과 새로 덮어 씌워진 것의 영향까지 있으니…안 좋게 되면, 지금보다 더 안 좋아질지도….
그치만 이대로 두면 안 좋아지기만 할 테고 어쩔 수 없지.
가리던 것도 사라졌는데 지가 알아서 하라지.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이상해지면 이젠 나도 모른다.
“아, 일어난다.”
# # #
[…침대가 왜 이래?]
[아, 어…그, 글쎄…망가졌나봐.]
[…이 침대 프레임 버리는 거겠지? 내가 버려줄게. 난 그냥 공간에 넣으면 되니까.]
목소리가 들린다.
익숙한 목소리다.
래피드랑 그레이프….
몽롱한 머릿속에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울린다.
[어…? 인형….]
[아…내가 선물해줬어. 조금 특이하게, 인형을 좋아한다고 해서…왜?]
[…아니, 아니야.]
머릿속이 어지러워지며 등에 무언가가 닿는다.
몸이 쭉 펴져 으슬으슬 떨린다.
너무 더워서 춥다.
피가 너무 빨리 돌아서 주변 공기가 차갑다.
[괜찮은 걸까….]
[…너무 걱정하지 마, 상태는 멀쩡해 보이니까…아마도 마력에 너무 많이 노출되어서 잠깐 중독증상을 보이는 걸 거야.]
[…응.]
[조금만 쉬면 정신 차릴 거야, 예전에는 몇 번 있는 일이었잖아. 마력에 노출된 사람이 쓰러지는 거….]
[그건…응. 그치, 예전에는 쉘터도 없었고.]
기죽은 목소리와 부드럽게 달래주는 목소리가 들린다.
듣기만 해도 안심이 되는 편안한 감정이 전해져 온다.
[…우린 이제 나가야 하지 않을까?]
[난…조금만 있다가 나갈게, 직장 동료…였으니까….]
[릴리 선생님 때 생각나서 그래?]
[그런 건 아냐. 빨리 가 봐, 애쉬가 부른다면서.]
[…응.]
부우웅, 우우웅 하고 뭔가 울리는 소리가 들리고 예민해진 감각을 통해서 인기척 하나가 사라지는 게 느껴진다.
머리가 무겁다.
피가 빠르게 돌고 돌아서, 왼손에 의해 차갑게 식는다.
과하게 빨라진 심박을 강제로 진정시킨다.
지끈거리는 두통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기억이 조금씩 정리되어간다.
샤워실에서 물소리가 들린다.
현관문이 열렸다가 닫히고, 잠시 후 다시 열린다.
비닐봉투가 바스락 거리는 소리.
낡은 인덕션에서 웅, 웅 하고 울리는 소리가 들린다.
뭔가를 통통 썰고, 보글보글 끓인다.
“윽….”
“아…!”
시간이 지나 서서히 어지럼증이 가라앉으며 정신을 차린 나는 지끈거리는 이마에 왼손을 대고 몸을 일으키려 했다.
아직 잘 들리지 않는 귀에 놀란 목소리가 들리고, 누군가가 내 등을 손으로 받친다.
뭉개진 시야가 서서히 선명해지며 주변 상황이 머릿속에 들어온다.
정신을 잃은 사이 데려와 준 건지 나는 내 방에 누워있었다.
망가진 침대 프레임은 어디에 버렸는지 보이지 않고, 낡은 매트리스만 바닥에 둔 상태다.
엉망이 된 옷은 본 적 없는 셔츠와 바지로 갈아입혀 져 있고…뭔가 맛있는 냄새가 난다.
“…그레이프?”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처음 자취할 때 샀던 내 앞치마를 걸치고 있는 그레이프가 보인다.
한 손에는 국자 쥐고, 빈손으로는 내 등을 받쳐서 일으켜 주고 있다.
표정은…꽤 복잡하다.
안도한 듯 풀어졌다가도 걱정이 많은지 축 처진다.
“괘, 괜찮아요…? 상태는 어때요? 몸은…어디 이상한 데 없어요?”
“어…응.”
이상한 곳은 없다.
굳이 말하자면 너무 개운하고 머리가 맑다는 게 이상하다.
뭔가가 벗겨진 것처럼 시야도 맑고 귀도 전보다 훨씬 잘 들린다.
온몸의 감각이 조금 예민해진 듯한 가벼움이 꽤나 상쾌하다.
두통은 점점 가라앉고 있고, 심장은 빨리 뛰고…숨 쉬는 것도 뭔가 평소보다 더 편하다.
나쁜 점을 하나 꼽자면, 근육통이 여기저기에서 다 느껴진다는 것뿐이다.
“집에 데려다준 거야?”
“앗…네.”
“…맛있는 냄새 나.”
“아! 가져다줄게요! 잠깐만….”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난 그레이프는 나도 써본 지 오래된 접이식 상을 펴고 그 위에 죽을 담은 그릇을 하나 올려 가져와 줬다.
매트리스 바로 옆에 상을 놓고, 손으로 그릇을 잡아서 수저로 떠올려 입으로 후 하고 살살 식힌다.
보기만 해도 간지러워지는 광경이다.
“아….”
“…내가 먹을 수 있는데.”
긴 머리를 묶고 예쁜 목선을 드러내 보이면서 이런 서비스를 해주는 건 좋지만…부끄럽다.
얼굴이 뜨거워지는 걸 느끼며 수저를 받으려고 손을 뻗은 나는 손목이 부들부들 떨리는 걸 보고 그레이프를 힐끔거렸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근육통이 너무 심해서 죽을 먹는 것도 힘들 것 같다.
“…먹여줘도 돼요?”
“어…응.”
포기하고 손을 내려놓은 나는 작게 입을 벌렸다.
곧바로 입안에 적당히 식은 죽이 들어온다.
쇠고기 죽이다.
“맛있다.”
“더, 더…더 줄까요?”
한입 먹고 나니 정신을 잃고 잊고 있던 굶주림이 떠오른 듯 점점 더 배가 고파진다.
이것저것 많은 일을 하루 만에 겪으며 기운을 다 써버렸는지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프다.
결국, 나는 그레이프에게 맛있으니까 더 달라고 부탁하며 두 그릇이나 비우고 나서야 식사를 멈출 수 있었다.
“요리 잘하네…맛있었어.”
“…예전에는 외식할 수 없어서 자주 해먹었거든요.”
“마법소녀인걸 알아볼까 봐?”
“그것보다는…힘조절이 아예 안 될 때가 있어서, 한동안….”
하긴…지금도 조금 힘 조절을 못하면 엘리베이터 손잡이를 뭉개버리거나 침대를 부숴버릴 정도니까, 예전에는 지금보다 더 못했으면 외식하러 간 순간 수저를 뭉개고 그릇을 깨 버렸을 게 분명하다.
식사를 하며 잠깐의 대화를 마친 그레이프는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리고 나도…점점 이상한 기분이 들어 그레이프를 힐끔거리다가 가만히 눈을 내리깔고 있기만 했다.
내가 왜 이러는 건지 모르겠는데 그레이프가 이상하게 예쁘다.
숨이 막힐 정도로 예쁘다.
그레이프가 이렇게 예뻤나?
자꾸 눈길이 갈 정도로 예뻐서 신경 쓰인다.
“그릇…치울게요.”
“어, 으…응.”
그레이프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싱크대에 그릇을 둔 뒤 곧바로 설거지를 하기 시작했다.
저절로 시선이 따라가 그레이프의 몸매를 몰래 훑는다.
식욕 후에는 성욕이 일어나기라도 하는 것인지 보기만 해도 침이 꿀꺽 삼켜진다.
앞치마를 꽉 조인 끈이 허리를 강조해 야릇하게 보인다.
커다란 엉덩이가 오늘따라 더 라인이 예뻐 보인다.
옷도 아까는 저런 복장이 아니었는데…짧은 반바지에 편한 셔츠를 입고 있다.
내 옷도 내가 본 적 없는 새 옷인 걸 보면 내가 정신을 잃고 있는 동안 밖에서 옷을 사 오기라도 한 것 같다.
그것까지는 좋은데, 괜찮은데…그레이프가 입은 옷이 묘하게 야하다.
엉덩이가, 골반이 너무 커서 좌우로 팽팽해진 짧은 반바지가…예쁘게 쭉 뻗어 새하얗게 빛나는 다리가 야하다.
“마력 멀미는…푹 쉬면 나아요. 마법소녀가 아니면 마력이 안에 못 머무르는데, 노출 정도가 심해져서 잠깐 어지럼증이 생기는 거니까….”
“아, 응, 네.”
“지금 아프거나 어지러운 건…그냥, 시간이 해결해 줄….거에요.”
“어…네.”
물소리에 섞여 무슨 말을 하는 건진 잘 모르겠는데, 설거지하면서 팔을 움직일 때마다 엉덩이가 살랑거리는 게 야하다.
이상하게 평소보다 훨씬 더 야하고 눈길이 안 떨어진다.
뭐랄까…야한거에 씌여져있던 모자이크가 사라진 것처럼 더 원색적이고 너 농후해서…좀 너무 진하게 야하다.
“…습격은 회사에 보험….”
뭔가 말하던 그레이프가 갑자기 말을 멈추고, 손 움직임도 멈춘다.
살랑거리던 엉덩이가 멈췄다가 다시 천천히 흔들린다.
설거지를 계속한다.
“퇴사, 했으니까…안…되겠죠.”
“어…응.”
“…그렇…죠.”
끼익, 끼익 하고 계속해서 그릇을 닦고, 물을 더 세게 튼다.
기름기가 그렇게 많은 음식도 아니었고, 그릇 하고 국자 하나뿐인데…너무 오래 닦는 것 같다.
힘 조절이 하기 힘들기라도 한 걸까.
뭔가…분위기가 갑갑하다.
“…애, 앵거…씨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 그레이프가 갑자기 그릇을 덜컥 내려놓으며 큰 소리를 냈다.
싱크대에 올린 두 손과 함께 목소리가 바들바들 떨린다.
“저…시, 싫어…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