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3화 > 질문 (2)
“그레이프랑 같은 회사에 다녔어요, 그레이프가 팀장이고 제가 부하 직원….”
서로 아는 사이라니, 설명이 굉장히 부족한 대답이다.
나는 좀 더 정확하게 래피드에게 서로 어떻게 아는 사이인지를 설명해줬다.
그러자 그레이프가 갑자기 풀이 죽은 목소리로 옆에서 중얼거렸다.
“으, 응…같은 회사….”
“아!…그레이프 다니는 회사면…법률회사?”
“아뇨, 개발회사인데…그레이프가 파견팀장으로….”
“어? 그레이프 전에 그거 파견 그만두겠다고 하지 않았어?”
“마음이 바뀌어서…계속하고 있었는데….”
파견을 그만둔다는건…아마도 꽤 예전에 했던 얘기 같다.
아마도 술을 마시면서 팀장으로서 어디까지 해도 좋은 걸까를 고민하던 그때 한 말이 아닐까.
지금과 다르게 회사 생활이 힘들었을 때였으니 그레이프도 나처럼 관두고 싶어 할 만 했을 때다.
“어? 그런데 어떻게 그레이프가 마법소녀인 걸 알아요…?”
“그건…그게….”
바이저가 깨진 상태로 섹스하다가 그레이프라는걸 알게 됐다.
하지만 그런 걸 래피드한테 말해줄 수는 없다.
“어쩌다보니까…지금은 안 쓰고 있는데 원래 쓰고 있던 그 얼굴 가리는 거, 바이저가 깨져서 알게 됐어요.”
“아하….”
그레이프는 자기가 음액에 중독되어서 나를 덮치는 바람에 정체를 들켰다고 생각하고 있어서 그런지 래피드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고 있다가 내가 한 말을 듣고 뭔가 애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회사구나, 그래서 온 거야?”
“어? 그래서 오다니…?”
“그야, 그레이프 원래는…지하철 못 내려왔었잖아.”
아마도 이건 그레이프의 개 공포증 얘기다.
예민한 얘기인지 그레이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고, 래피드도 대답을 바라고 꺼낸 얘기가 아닌 듯 곧바로 말을 이었다.
“대단하네, 직장 동료를 위해서…그레이프는 예전부터 그런 점이 진짜 대단해, 동료를 위해서….”
“아…직장 동료는 아니에요. 부하 직원이고…퇴사했거든요.”
“네?”
나는 래피드의 말을 듣고 거짓이 되어있는 점을 수정해줬다.
그러자 내 앞에 서 있는 그레이프가 움찔거렸고, 래피드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오늘 퇴사하고 돌아가다가 이런 일이 생긴 거라서….”
“어? 퇴, 퇴사…? 어…? 왜…왜요?”
“뭐, 다른 사람들하고 같은 이유죠, 회사 다니기 힘들어서 그만뒀어요.”
“어…?”
퇴사 사유는 다들 똑같지 않을까?
당연한 얘기를 했을 뿐인데 그레이프와 래피드의 반응이 이상하다.
래피드는 그레이프 쪽을 힐끔거리고, 그레이프는 내게 등을 돌린 채 어깨를 부들부들 떨고 있다.
“어…힘들다뇨? 그레이프가…어?”
“읏, 윽….”
“둘이…그, 친한 사이…맞죠? 무슨…관계에요?”
래피드는 그레이프가 회사에서 날 괴롭히는 상상이라도 한 것인지 눈에 띄게 조심스러운 태도로 나와 그레이프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그레이프가 날 괴롭힌 적은…없는 것 같긴 한데, 그레이프가 원인이 되어서 욕을 먹기는 했다.
오해긴 한데, 오해가 아니기도 한 상상이다.
“글쎄요, 싫어하는 건 아닌데…친한, 사이…?”
“아, 그쵸? 싫어하면 그레이프가 구하러 올 리가….”
“무슨 관계라고 하면…이제 부하 직원도 상사도 아니고 음….”
“아, 아…!”
대체 그레이프와 나를 무슨 관계라고 정의해야 하는 걸까.
뭐라고 말을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자 갑자기 그레이프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목소리가 부들부들 떨리고 말이 툭툭 끊긴다.
“지, 지금, 지금은…아직은, 그게…사, 사이 나쁜 건…아니, 니까…아는, 사이….”
확실히 말하자면 그레이프에게 있어 나는 음액에 취해서 강간하고 그 뒤에 싫다는데도 하루 종일 강간한 강간범과 강간 피해자 사이라고 말해야겠지만,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그레이프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기라도 한 듯 뭔가 불안해 보이고….
아는 사이…뭔가 설명이 부족한 것 같긴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그레이프랑 나는 아는 사이다.
“…네, 아는 사이에요.”
“으, 응…맞, 아…아는, 아는…사이….”
“아, 네, 네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레이프의 말에 동의하자 어째서인지 그레이프는 목소리를 더 떨고 말을 더듬으며 다시 한 번 자신이 한 말을 래피드에게 확인시켜줬다.
래피드는 그런 그레이프의 모습을 보고 뭔가 건드리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는지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다가 갑자기 말을 돌렸다.
“아! 그레이프, 머리끈!”
“어? 어?”
“아까 끊어졌지? 되, 되돌려줄게! 마력도 조금 찼고, 그런 작은 물건은 되돌릴 수 있어! 아까 떨어진 게…여기 있다!”
래피드는 말하는 것과 동시에 다 녹아내리고 타버려 원래의 형태를 알 수 없게 된 검은 재를 집어 들었다.
마법소녀의 감각은 일반인하고 다르다던데, 래피드는 다른 마법소녀들보다도 공간에 대한 감각이 더 뛰어난 것 같다.
곧바로 마법을 사용한 래피드의 손안에서 검게 타버린 재가 낯익은 머리끈의 모양으로 되돌아온다.
내가 그레이프에게 사줬던 포도 장식이 달린 싸구려 머리끈이다.
“아…! 고마워….”
그레이프는 머리끈을 받자마자 활짝 웃더니 내 쪽을 힐끔거리며 머리를 예쁘게 묶었다.
깔끔하게, 단정하게…묶은 머리가 푹신푹신한 느낌이 남을 정도로 컬이 져 있는 래피드와는 다른 느낌으로 찰랑거리며 떨어진다.
“머리끈 매번 끊어져서 좀 그렇지…? 그레이프도 차라리 이참에 머리끈 특수한 걸로 바꿀래?”
“아…난 지원금 따로 다 쓰고 있으니까 조금이라도 아껴야 되서…지금 래피드가 쓰고 있는 게 그거지? 예쁘게 묶…?”
머리를 묶고 뭔가 얘기하던 그레이프가 갑자기 말을 멈추고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갑자기 대화를 멈춘 그레이프의 모습에 나와 래피드는 같이 왜 그러냐고 말없이 물으며 그레이프를 가만히 바라봤다.
“…어?”
그레이프는 불안한 눈빛으로 래피드의 묶인 머리를 봤다가 천천히 시선을 움직여 얼굴과 커다란 가슴을 내려다봤다.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리고 숨이 거칠어지며 침을 꿀꺽 삼킨다.
“그레이프?”
누가 봐도 긴장한 거로 보이는 모습에 래피드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가만히 나와 래피드의 시선을 받고 있던 그레이프는 내 쪽을 힐끔거리더니 혼자서 알 수 없는 말을 작게 중얼거렸다.
“…아, 아냐…아니, 아니야…응…이름도 모르고 있었는걸.”
“그레이프? 괜찮아? 왜 그래?”
“으, 응? 아냐! 괜찮아!”
나도 그레이프가 갑자기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응?”
그레이프가 계속해서 이상한 반응을 보이는 그때, 갑자기 머리 위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벌이 날아다니는 소리가 위쪽에서부터 커다랗게 울려 세로로 뻥 뚫린 터널 안에 울려 퍼진다.
네거티브가 나타나게 된 이후의 사람들에게 너무도 익숙해져 버린 소리였다.
상황이 종료된 것을 알리고 꽤 시간이 지났는지 방위군의 드론들이 지하로 진입해 들어온다.
구조용 드론들이 달궈진 벽면에 물을 분사하고 벽면의 열기가 수분을 증발시켜 순식간에 물안개가 가득해진다.
그러자 드론들이 회전하며 안개를 위로 날려 보냈다.
수없이 많은 드론 무리는 각자의 역할을 분담해 능숙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열기를 식히는 드론과 안개를 날려 보내는 드론으로 나누어져 있다가 다시 눌어붙은 벽면을 집게발로 부숴 들고가는 드론과 망가진 철골을 잘라내는 드론으로 나누어져 바쁘게 주변을 정리한다.
드론이 날아다니는 걸 보니 정말로 상황이 완전히 종료되었다는 게 실감 난다.
현장에 맞춰 적응해 움직이는 드론들을 본 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감탄했다.
방위군의 구조용 드론은 완전 무인화가 아니다.
한번에 수많은 드론을 담당하는 방위군 조종수가 있으며 자동화된 프로그램이 수리하는 것은 드론이 직접, 어려운 부분은 사람이 끼어들어 수리하는 식이다.
그 사실을 자세히 알고 있는 만큼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이 놀랍기만 하다.
지금 움직이는 건 아무리 봐도 사람이 조종하는 게 아니라 드론이 스스로 판단해 동작하는 움직임이다.
인공지능을 대체 어떻게 짜면 이런 상황에도 드론이 알아서 판단해서 움직일 수 있는 걸까.
지금은 방위군의 구조용과 현장정리용 드론만 온 것 같지만, 대충 정리가 끝나고 트루비전에서 제조한 도시복구용 드론이 날아오면 곧바로 재건축을 시작해 조금만 기다리면 원상복구 시켜놓을 것이다.
이런 식의 도심지 파괴와 재건축은 이제는 일상이 되어버린 일이다.
한동안 출근하는 사람들은 고생 좀 하겠지만, 나는 이미 퇴사했으니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수고하십니다, 방위군 통신병 코드 A42입니다.]
“우왓.”
가만히 드론이 움직이는 걸 구경하고 있자 벽면을 정리하던 드론들 중에서 구조용 드론 한 대가 날아와 기계음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통신병을 준비해 본 만큼 이 드론이 왜 왔는지, 무슨 상황인지도 알고 있다.
통신이 완전히 끊겨있던 장소의 사건경위 파악, 데이터베이스 수집을 위해서다.
방위군의 구조용 드론은 원래 이런 식으로 마법소녀와의 소통창구로 사용되기도 한다.
드론에서 인명구조용 기계 팔이 나와 사람처럼 손을 비벼댄다.
이건 사람이 조종하는 거다.
[피곤하실 텐데 죄송하지만, 상황 설명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마법소녀와의 대화를 통해 수집된 데이터는 이후 전투 교범 변경이나 새로운 장비 개발에 사용된다.
당연히 드론은 래피드, 그레이프와 대화를 하러 왔을 것이다.
나는 곧바로 자리를 비켜주기 위해 그레이프의 옆에서 슬쩍 뒷걸음질 쳤다.
그러자 대체 어째서인지 드론이 나를 따라왔다.
잘못 본 줄 알고 다시 움직여보니 움직인 만큼 나를 따라온다.
그대로 멍하니 가만히 드론을 보고 있자 갑자기 드론이 내 얼굴 앞에 멈춰서 스캔 장치를 꺼내 내 얼굴을 스캔했다.
“어, 어?”
[이름 앵거, 표기 A.N.G.E.R, 6번 구역 거주, 직업 개발자, 맞습니까?]
“네? 어…마, 맞는데요?”
[스캔 결과는…감염정보 없음, 훈련병? 흐음…성적은 좋은데, 어? 탈락?]
상황이 이해되질 않는다.
왜 갑자기 내 정보를 검색하고 있는 거지?
짐작 가는 게 없는데도 혹시나 최면어플을 어딘가에서 들키기라도 했나 싶어 심장이 두근거린다.
그럴 리가 없는 데도 불안하다.
방위군에게 조사당할 만한 일은 한 적이 없다.
대체 왜 이러는 건가 싶어 숨을 가쁘게 내쉬자 갑자기 그레이프가 나와 드론 사이에 끼어들었다.
“잠깐…무슨 일이죠?”
[죄송합니다 그레이프님, 애쉬 님 명령입니다. 사건 상세 정보가 필요한데 아무리 봐도 이해되지 않는 점이 있어서….]
“애쉬…명령이라고요?”
[금일 오후 1시 32분부터 상황 발생, 루이로부터 상황 신고, 지원요청 발생, 그레이프님 지원…까지는 이해되는데, 이 부분이 아무리 봐도 이상합니다만, 상세 설명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드론의 밑부분에서 갑자기 트루비전의 태블릿 PC인 비전패드가 나타나 그레이프의 앞에 내밀어 지며 화면에 보고서로 보이는 내용이 떠올랐다.
내게도 보이는 화면을 보니 오늘 날짜와 사건장소, 진행 상황이 적혀있는 일지가 보인다.
그중에 한 곳이 잘 보이게끔 크게 확대되어 있다.
[그레이프님이 추가 지원 요청을 하신 뒤 레이더 감지 정보에 에스더 출현…이건 쉘터 내부 촬영기기인데…이거, 뭐 하시는 건가요?]
일지에는 내가 에스더에게 촉수를 심어지는 순간 찍힌 것으로 보이는 노이즈가 가득한 사진이 첨부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