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0화 > 별 (6)
고개 숙인 에스더의 눈이 충혈된 것처럼 붉게 빛난다.
두근, 두근 하고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에 맞춰 피처럼 붉은 마력이 주변에 쫘악 펼쳐졌다가 흘러내린다.
조금 전과는 압박감이 완전히 다르다.
마력이 울컥울컥 쏟아져 나와 새어 흐른다.
마법소녀가 마력을 흘리며 주변에 나타나는 영향과 현상은 본인이 일부러 일으키는 것이 아니다.
너무 많은 양의 마력을 채 부여잡지 못해 새어 나오고 터져 튀어 오르는 것에 가깝다.
주머니에서 갑자기 비전폰이 종료할 때 나는 소리가 지직거리는 노이즈와 함께 들려온다.
기계장치가 마력에 접했을 때 일어나는 노이즈 현상을 넘어 기계 자체가 셧다운 되고 있다는 얘기다.
네거티브가 나타나기 전 세대의 물건도 아니고 노이즈 현상에도 버틸 수 있게끔 되어있는 비전폰이 강제 셧다운에 들어간다는 건 주변의 마력농도가 심각한 수준이라는 얘기다.
“윽…!”
평범한 사람은 숨도 쉬지 못할 정도로 농도가 짙다.
폐가 타들어 갔다가 왼손이 차가워지는 것과 함께 다시 회복된다.
비정상적인 속도로 고통이 사라지며 회복될수록 몸의 기운이 빠르게 소모되며 지쳐간다.
괴수와 감염체의 검은 피에 젖어있던 지면이 바삭하게 말랐다가 다시 질척하게 녹아내린다.
뜨거운 열기에 목구멍이 간질거리고 눈에서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시야가 점점 붉은색과 흰색으로 가려진다.
“아하하하하, 아하하하, 아하하하하하하!!”
왼손이 욱신거리며 에스더와 이어진 무언가가 갑자기 확 끊기는 게 느껴진다.
무언가에 삼켜진 에스더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검게 타오르는 마력이 에스더를 불태운다.
제대로 생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숨이 막혀오는 와중에도 한가지 생각이 머릿속에 선명하게 떠오른다.
죽는다.
뭔가 공격을 받은 게 아니라 마력을 끌어올린 것만으로 죽는다.
“래피드! 쓰지 마!”
“그치만, 이건!”
“어떻게든 다 막을 테니까, 공간이동 준비해!”
용광로 안에 들어온 것처럼 강렬하게 쏟아지는 열풍이 그레이프의 목소리와 함께 잦아든다.
열기도 조금 낮아져 힘겹게 숨을 들이마시고 눈을 뜬 내 시야에 기괴한 광경이 들어왔다.
검게 타오르는 태양이 그레이프의 방패에 부딪히고 있다.
방패를 태우고 녹이고 씹으며 그레이프를 위협한다.
방패 이곳저곳이 불타 구멍 나고 있지만, 그 틈새를 그레이프의 마력이 채운다.
에스더가 태우는 것보다 더 빠르게 방패를 수복한다.
방패보다 더 큰 크기의 마력이 벽을 만들어 에스더의 화염을 막는다.
에스더의 마력이 무서울 정도로 부풀어 오르고 있지만 그레이프의 마력도 그 뒤를 쫓고 있다.
서로 힘 싸움을 하고 있는데 그레이프가 전혀 밀리지 않는다.
말도 안 되는 광경이다.
어떻게 그레이프가 이걸 다 버티지?
막아줘야 하지만, 막아 주는 게 좋지만, 막고 있어서 다행이지만…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막아서는 게, 힘겨워하면서도 충분히 막을 수 있어 보이는게 이상하다.
이런 상황인데도 그런 생각은 나만 하는 게 아닌지 왼손을 통해 에스더의 짜증이 전해져 온다.
“왜 버티고 있는거야아아! 그레이프으으!!”
“크으윽…!”
“버텨 봤자! 어차피 넌 나한테 못 이겨!”
지하라는 걸 잊어버릴 정도로 막대한 양의 빛이 헤엄치며 뻗어 나온다.
검은 불이 그레이프의 방패를 갉아먹고, 새어 나와 흩뿌려지는 붉은 화염이 래피드와 내 주변의 땅을 질퍽하게 끓인다.
“아하하하하하!”
“큭…!”
에스더의 웃음소리와 함께 점점 화력이 강해지며 열풍 사이사이에서 바람 새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레이프의 발밑이 녹아내려 지면이 비틀린다.
전투복은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는 것 같지만, 발 쪽에서 타는 소리가 들려온다.
자세가 흐트러지고, 방벽이 살짝 흔들리며 열풍이 옆을 스친다.
그때, 열기에 버티지 못한 그레이프의 머리끈이 툭 하고 끊어지고 풀리며 작은 포도 장식이 뜨거운 지면에 떨어졌다.
그레이프의 묶인 머리가 풀려 이런 열기 속에서도 찰랑거리고 흔들리며 머리 장식을 방벽 너머로 던진다.
싸구려 비즈로 장식된 머리끈이 질척하게 녹고 불타 없어지는 광경이 시야에 들어온다.
그와 동시에 이상하게도 그레이프의 마력이 더 강렬하고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마력을 보지 못하는 일반인들도 볼 수 있을 정도로 농도가 짙어진 마력이 결정체를 이루며 바닥에서부터 쌓아져 올라온다.
“어딜…위험하게! 불같은 걸 들이대는 거야!”
주변이 차갑게 식는다.
열풍이 점점 차단되어가고, 바닥이 굳어간다.
화염이 완전히 막히기 시작한다.
“못 이겨도 상관 없어…! 신경 안 써!”
“뭐야 이건…너…!”
“그래도…이번만큼은 안 져, 아니…못 져!”
에스더가 주변을 자신의 마력으로 덧씌우는 것보다 그레이프의 마력이 더 견고하다.
주변을 전부 불태워도 이건 태울 수 없다.
뼈대를 올리고, 기둥을 세우고, 주변에서 들어오는 모든 걸 다 차단하는 방벽을 만든다.
다른 마력과 질감부터가 다르다.
평범한 마력이 물이고 에스더의 마력이 끈적이는 점액이라면 이건 완전히 결정화된 고체다.
고체의 형태로 굳은 게 아니라 그 이상의 무언가다.
"저리 꺼져어어!"
왼손에서부터 오싹한 감각이 전해지는 것과 동시에 화염이 크게 타오른다.
분노와 질투, 짜증과 다급함이 팔을 기어오르며 오싹한 감각을 전해온다.
막힌다.
무조건 막힌다.
이건 못 뚫는다.
그레이프 따위에게 막힌다.
래피드에게, 그레이프에게 빼앗긴다.
그 전에 친다.
래피드를 친다.
“메테오 재블린 Meteor Javelin!”
강렬한 빛이 눈을 가리며 에스더의 모습을 감춘다.
빛 속에서 에스더의 목소리와 함께 마력이 한곳으로 모이는 게 느껴진다.
투창하는 자세를 취한 에스더가 곧바로 거대한 화염을 던지고, 시야가 완전히 가려진다.
주변을 완전히 뒤덮은 마력이 오감을 마비시킨다.
이건 속임수다.
진짜는 옆이다.
온다.
“아…!”
말을 할 시간도 없다.
이미 주변을 에스더의 마력으로 완전히 채워놔서 위치를 감지하기도 어렵다.
이클립스를 써서 흔적을 감추고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그레이프도 눈치채지 못하고 쏘아진 마법을 막으려고 결정화된 마력을 앞에 집중시킨다.
작열하는 화염이 응축된 검이 옆에서부터 찔러 들어온다.
에스더의 생각이 전해져 들어온다.
래피드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정면에 마력을 집중하느라 측면이 약해져 있다.
이대로 찌르면 끝이다.
머릿속에 수십 가지 생각이 동시에 떠오른다.
에스더가 오른쪽에서 빠르게 접근하는 게 너무도 선명하게 느껴진다.
마력으로 충분히 주변을 뒤덮고 마법으로 시야를 완전히 가린 뒤 빈틈을 만들어서 습격한다.
이건 막을 수 없다.
래피드가 당한다.
래피드가 당하면….
당해야 하지 않나?
아니, 당하면 안 된다.
순간적으로 떠오른 이상한 생각이 가라앉는다.
에스더가 공격해 온다는 걸 래피드에게 알려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내가 입을 움직이는 것보다, 말하는 것보다 에스더의 검이 더 빠르다.
에스더가 그레이프의 방벽을 뛰어넘어 공격한다.
내게는 공격할 수 없는 최면이 걸려있으니 안전할테지만…래피드가 위험하다.
에스더는 내게 공격할 수 없다.
그런 최면이 걸려있다.
그러니까…아까도 화가 난 것 같지만 나를 공격하지는 않은 거겠지?
에스더는 나를 공격할 수 없다.
공격할 수 없다.
하지만 상위권 마법소녀는 최면에 저항할 수 있다.
그레이프가 저항할 수 있었으니까, 그레이프보다 강한 에스더도 당연히 저항할 수 있다.
저항하는 순간 몸이 움찔거리거나, 움직임이 조금 더뎌진다.
나를 공격하려는 순간 더뎌진다?
그 사실을 인식한 순간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우측으로 몸을 던져 에스더를 막는다.
공격의 틈새에 끼어드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아주 잠깐 막아서면 최면이 에스더를 막을 테고, 그 잠깐의 틈이 있다면 래피드도 반응할 것이다.
몸이 움직이고 난 뒤 갑작스러운 의문이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나를 공격할 수 없다는 최면은 뭐가 더 우선되는 거지…?
공격할 수 없다는 게 공격이라는 행동을 하는 시작을 막는 실행차단 명령이라면, 이미 실행된 건 효과가 없는 거 아닐까?
공격을 실행한 뒤 이후 중단하려면 공격을 하게 되면 움직임이 멈춘다는 최면이었어야 하는 거 아닐까?
이미 하기 시작한 공격에 갑자기 내가 끼어들어도 문제 없는 게 맞을까?
그러고 보니까 나 아까 폐가 타들어 가는 것 같지 않았었나?
그건 공격인데, 왜 에스더가 마력을 끌어올릴 수 있었지?
내 왼손이 뭔가 해서 날 회복시켜줄 거라는 걸 알고 있었어서?
공격도 아니라고 생각해서?
내게 피해를 줄 생각이 없었으니까?
그레이프가 막아줄 거라고 생각해서?
아니면…공격 대상이 내가 아니고 그냥 나는 휘말려 든 것뿐이어서…?
…아니겠지?
미묘한 불안감에 휩싸인 순간 에스더의 생각이 왼손을 통해 역류해 들어왔다.
내가 몸을 던지는 것과 거의 동시에 래피드의 눈동자가 에스더를 바라본다.
래피드의 마법은 공간을 다룬다.
감각으로,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고 있다.
마법소녀였던 시절부터 같이 행동해 에스더가 다른 마법소녀들에 대해 잘 아는 만큼, 래피드도 에스더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큰 마법으로 시야를 가리고 공격할 거라는 걸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파악 당했다.
마력을 회복하면서 몰래 마법을 준비하고 있던 래피드가 손을 뻗는다.
늦었다.
래피드가 늦은 게 아니라, 에스더가 늦었다.
“스페이셜 랜드!”
공간이 절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