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4화 > 124번 (7)
대체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이해가 되질 않는다.
어지럽고 혼란스럽고 엉망진창이다.
상쾌하면서도 불쾌하고 개운하면서도 찝찝하다.
내장이 이리저리 비틀려 뒤죽박죽이 된 것 같다.
뭔가가 몸속에 자리 잡았다.
아니, 자리를 잡았다기보다는…단단해졌다.
내 피부나 근육이 물리적으로 단단해졌다는 얘기가 아니다.
지금까지 느끼지 못했던 안정감이 내게 이전에는 알아차리지 못했던 감각을 역체감 시켜주고 있다.
고정이 잘 된 느낌, 선명해진 느낌…이 상태를 표현할 방법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머릿속은 엉망으로 뒤엉켜 이러다 뇌가 터져버리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숨 막히게 어지럽다.
이상한 기억이 이리저리 뒤섞였다가 사라진다.
전압을 착각한 콘센트처럼 잠시 켜졌다가 그대로 불타오르는 것처럼 기억이 증발한다.
왼팔은 팔이 통째로 떨어져 나간 것처럼 끔찍한 통증에 푸욱 잠겨있다.
살갗을 전부 벗겨내고 칼집을 낸 뒤 날카로운 소금으로 뒤덮어 비트는 것처럼 아프다.
팔이 달려있다는 게 원망스러울 정도로 고통스럽다.
“허억…허억…윽…!”
엉망이 된 몸에서 기분 좋은 곳은 입안뿐이다.
딸기 시럽처럼 끈적하면서도 달콤한 맛이 끈적하게 남아있다.
에스더의 음액에 중독된 심장이 두근거리며 피를 빠르게 순환시킨다.
피를 따라 흐르는 속도가 빨라지며 왼손에 박힌 조그마한 뭔가가 움찔거린다.
머릿속에 자리 잡은 무언가도 내 몸을 빠르게 씻어낸다.
몸속에 가득 차 있던 침전물이 억지로 뜯겨나가 한 곳에 뭉쳐진다.
복잡하게 뒤엉켜 있던 기억들이 단단한 틀에 담겨 차곡차곡 정리되어간다.
같은 조각이 보이면 둘 중 좀 더 용량이 큰 것을 두고 작은 것을 없앤다.
지직거리는 노이즈와 불타버리고 찢겨나간 듯한 기억은 맞춰 볼 곳이 없다.
아직 뒤죽박죽으로 뒤섞여 있기는 하지만…그럭저럭 맞는 조각들이 들어맞는다.
“…어?”
서서히 돌아오던 정신의 진행도가 이제서야 내가 나라는 걸 알 수 있는 수준에 도달했다.
독립되어 자리 잡은 안정감과 함께 허탈한 이탈감이 내 몸을 가득 채운다.
넓은 풀장에 몸을 담그고 있다가 밖으로 나온 것처럼 개운하다.
뭔가에서 벗어났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이게….”
내가 알지 못하던 정보들이 머릿속에 남아있다.
망가진 기억 조각들 속에서 그나마 쓸만한 정보들이 흐릿하게 남아 기괴한 사실을 떠올린다.
감정을 맛으로 느낀다는 건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감각이 아니다.
그리고…지금은 그 감각이 느껴지질 않는다.
가지고 있었던 혀와 꼬리가 잘려나간 것처럼 갑자기 나타났다가 사라진 감각의 부재가 어색하다.
목욕탕에서 다른 사람들이 말할 때 느껴지는 미묘하게 멍한 느낌이 귀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조금 전까지 내가 알지도 못하고 느끼고 있었던 것들이 잔상처럼 남아 서서히 사라진다.
하지만…개운하다.
근육통도 엄청나고 자지가 아플 정도로 세워져 있지만, 머리는 정말로 개운하다.
괴수가 나타나기 전에, 어릴 때에나 이렇게 상쾌한 기분을 느껴봤었던 것 같다.
서서히 잦아드는 통증을 참아내며 초점을 맞춰 흐릿한 시야를 바로잡자 바로 앞에서 이마에 손을 대고 있는 에스더의 모습이 보인다.
“허억…헉….”
“큭…뭐야, 기억이…?”
“에스더…?”
“마법 부작용인가…? 하긴…마법 구조가 그러니까….”
에스더도 나와 마찬가지로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가만히 보고 있으니 내게서 달라진 점이 느껴진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두렵게 느껴졌던 에스더가 조금도 무섭지 않다.
이상할 정도로 에스더가 친근하다.
아니, 친근한 걸 넘어서…편하다.
좋아졌다거나, 사랑스러워 보인다거나 그런 얘기가 아니다.
그냥 편하다.
“나한테 뭘 한 거야?”
에스더가 편하다는 사실이 오싹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느껴졌던 경계심이나 두려움, 복종심이 전부 사라져서 조종이라도 당하는 것처럼 에스더가 나쁘지 않게 보이고 있다.
네거티브의 간부면 적인데…안 무섭다.
광기 어려 보였던 눈빛은 도도해 보이고 타오르는 것처럼 보였던 붉은 머리는 그냥 부드럽게 찰랑거리는 거로 보인다.
날카로운 뿔도 그냥 손에 쥐어 보고 싶다는 생각만 들고 저기에 찔려도 별로 안 아플 것 같다.
날개는 만져보고 싶고 꼬리는 잡아당겨 보고 싶다.
촉수 보지 맛이 자꾸 입안에 맴돈다.
“너무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 124번, 대단한 건 아니니까.”
말하는 걸 보니 에스더가 내게 뭔가 했다는 건 확실하다.
하지만 방금 있었던 일이 대단한 게 아니라는 말은 공감하기 힘들다.
그 무지막지한 감각이 별 게 아니라고?
“마침 좋은 마법 하나를 각성해서 말야…약간 부작용이 있는 것 같기도 하지만, 확실히…내가 원하던 마법이야.”
“윽?!”
에스더가 손을 내 쪽으로 내밀고 천천히 움켜쥐자 왼쪽 손등이 움찔거린다.
보이지 않는 힘이 아주 약하게 느껴진다.
내가 여기에 있다고, 무언가에게 내 위치를 알린다.
“잠깐…뭐야?!”
마법소녀도 아니고, 마법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는 나지만, 내 왼쪽 손등에 자리 잡은 이거랑 지금 이 묘한 감각이 에스더가 건 마법의 결과물이라는 건 알겠다.
“이런 거구나…흐응, 마음에 들어.”
“혼자서만 알지 말고 나한테도 좀 설명을…!”
“설명…? 흐음…그냥 표시 같은 거야. 혹시라도 다른 네거티브가 널 공격하면 내가 직접 죽여버리겠다는 표식.”
“뭐?”
“그러니까…내, 내…소유물이라는 표식인 거지. 네거티브만 알 수 있는.”
“…이게?”
대체 왜 그런 걸 나한테 박아넣는 거지?
왼쪽 손등에 뭘 박아넣었길래 네거티브가 공격하지 않는다는 거지?
왜 내가 에스더의 소유물이지?
의문을 품고 왼쪽 손등을 내려다보니 핏줄 안에서 가느다란 촉수 같은 느낌의 무언가가 핏줄 아래로 서서히 내려앉는다.
정말 기이하게도, 별로 거부감이 들지 않는다.
오히려 굉장히 안정적이고…편안하다.
“뭐, 촉수 괴수로 만들지 않아도 이거면 충분하고…촉수로 만들면 말도 알아듣기 힘들어지고 성격도 많이 바뀌니까…이걸로 인간이어도 안심할 수 있겠네.”
”어? 인간…요?”
그 말은 촉수 괴수로 만들려고 차원문 너머로 데려가거나 하지 않겠다는 얘기인가?
깜짝 놀라며 에스더를 바라보니 묘하게 기뻐 보이는 에스더가 꼬리를 빠르게 붕붕 흔들고 있다.
“촉수 괴수로 만들지 않겠다는 얘기인가요…?”
“…그래, 넌 변할 필요가 없으니까.”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불행 중 다행인 소식이다.
앞으로 또 만날 일이 생겨도 에스더는 더 이상 나를 강제로 촉수 괴수로 만들기 위해 끌고 가거나 하지 않겠다는 얘기다.
“124번은 특별하니까 말야. 그래…특별 회원권, VIP 표시 같은 거야. 잘됐네 124번? 이제는 나오지 않는 에스더님 굿즈 중에서도 최고로 희귀한 거야. 친필 사인하고도 비교할 수 없는 스페셜 레어.”
“아니…그…음….”
핏줄 안에서 꿈틀거리는 초소형 스페셜 레어 촉수라니….
촉촉이 키링보다도 받기 싫은 선물이다.
생각과 함께 미묘한 감정을 담아 왼손을 들어 보이자 에스더의 의기양양한 표정이 시야 너머로 흐릿하게 보인다.
“왜? 너무 대단해서 현실감이 안 느껴져? 124…아니, 이제 124번까지 필요하지도 않으니까…그래…잠깐만, 너…이름이 뭐야?”
“이름?”
“그래, 이름.”
질문이 이상하다.
아까 내 이름을 말해놓고 왜 모른다는 듯이 이름을 물어보는 거지?
내가 모르는 다른 의미가 숨어있는 질문인가?
“앵거…인데.”
“앵거…앵거…흐음…그래, 앵거…지금부터 네가 1번이야.”
“…네? 1번요…? 전 124번인데요?”
정말로 내 이름을 모르고 있던 것 같은 반응이다.
1번은 분명 에스더가 앉고 다니는 그 초대형 촉수를 얘기하는 건데…어째서인지 갑자기 내가 1번이 되어버렸다.
이건 분명 팬클럽 넘버를 얘기하는 걸 텐데…대체 왜 내가 갑자기 1번이 된 거지?
“내가 1번이라면 1번인 거야.”
“아…음, 네.”
“좀 더 기뻐해.”
“와, 와아! 기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내가 1번이 되었다는 사실에도 어리둥절하며 별 반응을 보이지 않자 에스더가 무척 기분 나빠하며 말했다.
왼손이 약간 따끔거릴 정도로 불쾌해 하는 모습에 억지로 활짝 웃다가 이상함을 느낀 나는 왼손을 살짝 쥐었다.
“어?”
지금 에스더의 감정에 왼손이 반응한 건가?
손을 쥐었다 폈다가 비틀어도 보고 오른손으로 왼쪽 손등을 눌러보기까지 했지만…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이게 대체 뭐지…?
“뭐, 1번…앵거 너는 실감이 전혀 안 날 테니까 이해해주겠지만 그건 엄청난 거니까 괜히 남들한테 자랑하지 않도록 해. 촉수들은 알아볼 테지만 사람들은 질투할 수 있으니까.”
“아…네…허억…?!”
에스더가 그렇게 말해도 이건 자랑거리가 아니라고 생각하던 나는 숨을 삼켰다.
에스더의 팬들은 이미 촉수 괴수가 되었거나, 에스더와 만나지 않기 위해 팬이었다는 사실을 최대한 숨기고 있는 사람밖에 남지 않았다.
애초에 왼손에 촉수가 있다는 건 자랑거리도 아니고 누군가에게 말한다면 그건 적출 수술을 위해 괴수 감염을 신고해야 하는 순간뿐일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나는 이 왼손의 촉수를 적출해 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방위군에 괴수 감염을 신고한 순간 감염대상자는 장기간 집중검사와 여러 가지 조사를 받는다.
그 과정에서 감염대상과 접촉한 자들을 조사하기 위해 비전폰을 압류하고 자택의 조사를 시행한다.
그런 짓을 했다가는 최면어플을 들키게 된다.
하지만 아직 포기하기에는 이르다.
그레이프에게 최면을 걸어서 어떻게든 해달라고 하면 뭔가 해줄 수 있을지도 모르고…그레이프가 안되면 래피드가 가능할지도 모른다.
래피드라면 사람을 다치기 전의 상태로 되돌아간 것처럼 치료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면…그래, 오늘은 기쁜 날이니까…지금부터 특별히 1:1 팬 미팅 시간을….”
마법소녀였을 적에 방송에서도 본 적 없을 정도로 활짝 웃으며 말하던 에스더의 표정이 갑자기 굳는다.
내 앞에서 쉘터 입구 쪽으로 등을 돌리고 선 에스더의 오른손이 옆으로 쭉 뻗는 것과 동시에 불의 검이 나타났다.
“…방해하지 말아 줄래?”
“에스더….”
입구 쪽에서부터 들려온 목소리를 듣자마자 온몸의 과도하게 신경이 바짝 서며 심장이 빠르게 뛴다.
시선을 돌려 비교적 밝은 입구 쪽을 보자 빛을 등지고 어두운 쉘터 안을 두 손으로 조준하고 있는 여자가 보인다.
기척을 숨기고 있기라도 했는지 래피드의 목소리, 래피드의 실루엣, 래피드의 향기가 뒤늦게 느껴진다.
이상할 정도로 두근거리는 심장에 의문이 생기지만, 낯선 감각은 아니다.
지금까지 언제나 래피드를 보거나 래피드의 냄새를 맡거나 흔적을 쫓을 때마다 이랬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이건 조금 과도하게 두근거린다.
“예전부터 참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타이밍 못 맞힐 때가 많단 말이야? 마법 특성은 시공간이면서.”
“그 사람을 놔 줘.”
이끌리는 것처럼 고개가 들어 올려져 래피드의 실루엣에 고정된다.
천천히 쉘터 안으로 들어온 래피드가 마력을 끌어올린다.
무지막지한 농도의 마력이 쉘터 안을 압박해온다.
대체 왜 내가 마력을 느낄 수 있는 거지?
왜 이걸 지금까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못했는지가 이상하다.
예전에는 느끼지 못한 래피드의 마력이 느껴진다.
아프거나 한 건 아니지만, 아주 조금 갑갑해질 정도로 엄청난 마력이다.
조금 숨이 막혀 크게 숨을 내쉬었더니 갑자기 갑갑함이 사라졌다.
에스더는 래피드를 날개를 크게 펼쳐 나와 래피드 사이를 막아서더니 불이 끓어오르는 소리를 내며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
“싫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