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3화 > 124번 (6)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말을 계속해서 중얼거리며 천천히 내 얼굴을 쓰다듬는다.
조금만 마음이 바뀌면 그대로 내 머리를 여섯 조각으로 갈라버릴 수 있는 날카로운 손톱이 닿지 않도록 조심하며 촉감을 확인한다.
예민한 코가 움찔거리며 냄새를 맡고, 붉은색과 금색이 한쪽씩 차지한 두 눈이 반짝이며 형태를 기억한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엄청 기뻐하고 있다.
네거티브에게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불쾌한 농도의 기쁨이 에스더에게서 쉴 새 없이 흘러나온다.
보지를 빨리는 게 그렇게 기분 좋았던 건가?
“…마법.”
가만히 나를 내려다보던 에스더의 눈빛이 갑자기 흐릿해진다.
어딘가 먼 곳을 보고 있는 것처럼, 다른 곳으로 잠시 떠난 것처럼 초점이 완전히 나가 있다.
그와 동시에 주변이 이리저리 비틀리며 에스더에게 모여지는 이상한 느낌이 든다.
“문…새틀라이트 Moon Satellite.”
뭔가를 멍하니 중얼거린 에스더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하지만 예전처럼 살벌하게 날카로운 눈빛은 아니다.
강한 의지를 가지고 무언가를 결심해 조심하며 신중하게 집중하는 눈빛이다.
“124번…아니, 1번.”
대체 이게 뭐하는 걸까.
묘한 압박감이 온몸을 구속한다.
무릎을 꿇고 앉아있는 내 위로 에스더가 천천히 허리를 굽혀 얼굴을 가까이한다.
“가만히…있어.”
뻣뻣하게 긴장한 에스더는 내 머리 위에 한 손을 올리더니 주사기를 잡는 것처럼 꼬리 끝을 잡았다.
눈을 반쯤 감고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진지한 표정을 짓는다.
그대로 에스더의 꼬리가 내 목에 박혔다.
“크윽?! 어, 어째서?!”
갑자기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
발버둥 치며 벗어나려 하자 에스더의 날개가 펼쳐지며 내 어깨를 감싸 팔을 올리지 못하게 한다.
머리를 손으로 눌러 무릎을 꿇고 꼼짝 못 하게 제압하고 있다.
“아아아악!! 뭐야아!!”
목에 꽂힌 꼬리를 통해 뭔가가 내 몸속으로 들어온다.
불쾌한 감각이다.
무언가가 내 혈관에 들어와 꿈틀거리며 내 몸속의 피를 타고 헤엄치고 있다.
목에서부터 출발한 그것은 내 몸속의 혈관에 맞게 몸을 변화시키는 듯 혈관에 몸을 비벼대며 점점 가늘어져 갔다.
핏줄이 울룩불룩하고 불거지며 어디로 움직이고 있는지를 알려온다.
순식간에 팔까지 도착했다.
혈관이 아프다.
지금 당장에라도 팔을 잘라버리고 싶다.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것이 왼쪽 손등에서 멈춰 선다.
핏줄 하나가 평소보다 훨씬 도드라져 보이며, 이리저리 꿈틀거린다.
왼쪽 손에 확실하게 자리 잡고 있다.
팔이 그 잠깐 사이 전체가 다 멍든 것처럼 아프다.
목에서부터 팔까지 이어지는 혈관이 전부 소금물을 넣은 것처럼 아려온다.
왼팔이 바들바들 떨린다.
“으윽…크으윽…아악…!”
“앵거….”
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
고통스러워하며 이를 악물고 눈을 질끈 감고 있자 머리 위에서 에스더의 목소리가 들린다.
울먹이는 듯한, 애틋하고 아쉬워하고 후회하는 듯한 감정이 어렴풋하게 느껴진다.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퀴즈 전부 맞췄잖아 하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고통스러운 숨소리에 섞여 사라진다.
혼란스러운 와중에 뒤늦게 무언가 이상한 사실을 깨달아 커다란 의문이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앵거?
내가 에스더한테 이름을 가르쳐 준 적이 있나?
“앵거…미안해, 내가…내가…!”
고개를 힘겹게 들어 올리자 혈관이 전부 찢어지고 다시 꿰매지는 통증에 일그러진 시야 너머로 에스더의 모습이 보인다.
무언가 이상하다.
붉은색이 아니다.
태양과도 같은 황금색이 시야를 가득 채운다.
금색으로 빛나는 두 개의 눈동자가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것처럼 젖었다가 뜨거운 열기에 마르기를 반복한다.
태양처럼 빛나는 황금빛의 불꽃이, 쉘터 안이라는 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주변을 새하얗게 비춘다.
“…미안해.”
사과와 함께 오싹할 정도로 강렬한 마력이 뒤늦게 느껴진다.
불쾌하지도, 달콤하지도, 끈적하지도 않다.
이건….
누구지?
“아아아악!!”
머리에 올려진 손에서부터 무언가가 다시 내 몸 안으로 들어온다.
말도 안 되는 통증이 내 안을 찢어발긴다.
뜨거운 열기로 불태우고 지져서 무언가를 내게 박아넣는다.
몸에 박아넣는 게 아니다.
형체가 없는 것을 내게 박아넣고 있다.
몸이 찢겨나가는 것만 같다.
[와! 마법소녀! 와아!]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이 갑자기 감겨 있는 눈앞에 환상처럼 나타난다.
말도 안 되는 끔찍한 고통에 느끼는 주마등인가?
네거티브가 나타나기 전, 마법소녀가 나오는 만화를 보고 좋아하는 어렸을 때의 내 모습이 보인다.
[괴물, 괴물이야!]
[왜…대체 왜!]
[마법소녀…?]
네거티브가 차원을 찢고 습격한 날, 사고에 휩쓸려 도망치다가 마법소녀가 주변의 괴수를 전부 없애줬다는 뉴스를 본 순간의 내 모습이 보인다.
[마법소녀야…마법소녀가 진짜로 있어!]
[래피드…? 요즘 방송에 많이 나오네…홍보인가?]
[근처에…마법소녀가 전투 중이라고? 괴수를 쓰러뜨리고 있는 거야? 래피드…?]
[래피드? 또야…? 구경…할 수 있나?]
[래피드…래피드….]
[래피드를 만나고 싶어…훈련병…평범한 훈련병으로는 만날 수 없어.]
[통신병과를 지원한다고? 확실히 재능이 있네, 지휘 센스도 있고…신체능력은 평범하지만 그야 약물로 보조하면 그만이고…대원 각자의 능력을 분석하고 파악하는 능력이 뛰어나.]
[이 주사는 뭐죠…? 신체 강화 보조 약품 반발검사…? 알겠습니다. 네…방위군 지원 사유요? 래피드를 보조하기 위해서 지원했습니다, 당연한 거 아닌가요? 래피드를…마법소녀를 지원하기 위해서, 가장 좋아하는 마법소녀요? 그야 당연히 래피드…좋아하는 이유는 얼마든지 말씀드릴 수 있는데…래피드가 제일 좋은 이유는 다른 것보다….]
[왜…? 내가 왜 떨어진 거야?]
방위군에 들어가기 위해 훈련병으로 합격했다가, 훈련 기간이 끝나고 결국 떨어지게 된 순간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A시에 머무르기 위해 이것저것 직장을 구하는 내 모습이 보인다.
[회사가 뭐 이렇지…? 하아…하지만 A시에 딱히 일자리가 나는 곳도 없고…취업이 잘 되는 곳도 없고…개발 전공 할 때만 해도 회사에서 이런 취급을 당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네거티브 때문에….]
[그레이프…? 마법소녀랑 같은 이름이네….]
[…방위군에 왜 지원했었냐고요? 다른 이유도 있기는 하지만…마법소녀만 싸우게 두는 건 조금…마법소녀도 여자잖아요. 좀 바보 같은 얘기인가…?]
[팀장님, 우산 없어요?]
회사에 처음 취업했을 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그레이프가 파견 팀장으로 왔을 때 있었던 일들이 그려진다.
[뷰지도장님, 오늘도 보여주시는 건가요?]
[아아…아직 방위군 사람들은 있지만 트루비전에서 수복반이 오기 전에 해야 하니까요.]
[오오…! 역시…엄청난 기술입니다.]
[선배! 이 사람 제약회사 영업사원이에요! 이거 카탈로그!]
제약회사에서 일하다가 래피드가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고 나갔던 습격장소에서 최면어플이 들어있는 데이터 칩을 주운 순간의 일이 떠오른다.
[딜도면 딜도답게 조용히 해요!]
[아아아악…! 미친보지…! 착정보지년아 진짜…!]
[이상하다…’지정역행’ 으로 되돌릴 수 있는 시간은 몇 초 정도밖에 안 되는데…? 역행…? 아냐, 설마…아니, 래피드의 마법 특성이 시공간이니까…그치만 그건 이상한데…? 같은 존재가 한 공간에서 충돌하면 ‘용량이 더 큰 것’ 이 덮어쓰니까….]
[저도, 그레이프…싶어서….]
그레이프에게 강간당하던 순간, 누군가…에게…뭔가 당했던 순간, 래피드와….
…뭐지?
뭔가 이상하다.
떠오른 기억이 이리저리 찢겨 기괴하게 비틀리고 사라진다.
[어딜 손대는 거야…이 새끼가아아아!!]
[대체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저희는…비밀 친구죠?]
[…요즘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너, 래피드랑 무슨 사이지?]
[벼, 변태새끼…!]
…이게 무슨 기억이지?
이런 기억은 내 기억에 없다.
이런 사람은 누군지 모른다.
[지랄하지 마…앵거.]
[앵거? 흐응…이름대로…굉장히 화가 나게 하네?]
[이번 퀴즈는 틀렸네, 정답은 별에게 소원을 Wish Upon a Star.]
[으아아앙! 앵거는, 앵거는 진짜 쓰레기에요! 쓰레기에요!!]
[아도니스 Adonis, 선 블레이드Sun Blade.]
[앵거…무서워, 앵거도 날 싫어하게 되면 어떡해?]
[누군가에게 받은 세계, 타인을 통해 이루어진 세계….]
이건…주마등이 아니다.
이건 내 기억이 아니다.
[몇 번이고 죽여주겠어!]
[나에 대한 모든 기억을 잊어라!!]
겹쳐진 게 이리저리 찢기고 갈라져 다시 조립된다.
부서진 것을 처음부터 다시 쌓아 올리며 다시 만든다.
같은 부분이 합쳐지고, 다른 부분이 충돌한다.
더 무거운 것이, 더 많은 것이 작은 것을 삼킨다.
“허억…! 허억…! 허억…!”
기억이 사라지고, 조립되고, 가루가 되어 뭉치며 혼란만이 남는다.
정신이 천천히 돌아오며 하얗게 물들었던 시야가 원래대로 돌아온다.
어두컴컴한 쉘터가, 붉은 머리에 양쪽 눈의 색이 다른 에스더가 눈앞에 보인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다.
“뭐, 뭐야…? 이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