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8화 > 124번 (1)
오싹한 감각이 목을 타고 내 몸으로 흘러들어온다.
이유 모를 동질감과 함께 느껴지는 살기가 피부를 긴장시킨다.
몸살이라도 난 것처럼 몸에 난 솜털 하나하나가 전부 아프다.
위기감이 끓어올라 몸 구석구석에 눌어붙으며 내장을 모아 잡아당기는 듯한 기분이 든다.
“에…에스, 더…님?”
왜 여기에 에스더가 있는 건지 이해가 되질 않는다.
괴수들과 함께 에스더가 나타났을 거라는 건 알 수 있다.
하지만 내 앞에, 나를 찾아다녔다는 듯한 말을 하며 모습을 드러냈다는 건 너무도 이상하다.
네거티브의 간부인 에스더의 주된 적은 마법소녀다.
마법소녀를 찾아가서 싸우면 싸웠지, 이렇게 내 앞에 혼자서 나타날 이유는 없다.
최면에 걸려있는 동안의 기억은 에스더도 그레이프나 래피드처럼 전혀 없을 게 분명하다.
대체 무엇 때문에 여기에, 내 앞에…내 목을 손으로 쥐고 있는 거지?
조금만 힘을 주면 내 목을 부러뜨릴만한 괴력이 느껴지는 손이 날카로운 손톱 끝으로 피부를 살짝 긁는다.
그것만으로 새어 나온 핏방울이 에스더의 팔을 타고 흐르는 게 느껴진다.
팔에 닿은 피가 빠르게 증발하며 비릿하고 끈적한 냄새를 남긴다.
무섭지만, 무서운 만큼 진정된다.
진정된다기보다는…감정이 결여된 것처럼 공포심의 일부가 마비되어있다.
에스더에게 만약 죽임을 당한다면 그건 당연한 일이라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왜냐하면, 에스더는…나보다…아니, 마법소녀…인가?
…아닌가?
내 안에서 죽어서는 안 된다는 의지와 복종심이 계속해서 부딪친다.
두렵기도 하지만, 두려움은 그리 크지 않다.
생각보다 꽤 안정적이고 조용한 기분이다.
에스더의 손이 내가 움직이지 못하게, 도망치지 못하게 목을 잡고 있기는 하지만, 생명을 위협하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나를 노려보고 있는 무시무시한 눈에도…적대감이 적다.
에스더에게서도 다른 마법소녀에게서, 촉수 괴수에게서 느껴졌던 이상한 감각이 느껴진다.
나를 죽이려고 하는 게 아니다.
조금 진정한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비전폰을 꺼내려다가 움직임을 멈췄다.
에스더도 그레이프처럼 내 눈에 보이지도 않을만한 엄청난 속도로 움직일 수 있다.
에스더에게는 아직 나를 공격하지 못하게 하는 최면을 걸지 못한 상태다.
섣불리 최면을 걸려고 시도했다가 반응해서 손을 잘리거나 공격당할 수도 있다.
좀 더 안전한 순간을, 반응하지 못하는 순간을 노려야 한다.
“124번, 내가 왜 여기 있는지 알아?”
에스더가 한 손에 쥐고 있던 불타는 검을 천천히 허공에 지워버리며 물었다.
대체 왜 여기에 있는 거냐는 질문 자체가 이상하다.
네거티브의 간부인 에스더가 괴수와 함께 나타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왜 여기 있는지 아냐는 질문을 한다는 건, 단순히 습격을 위해서 나타난 게 아니라는 얘기다.
“모르겠습니다…?”
“…몰라?”
“모, 모르겠습니다!
“흐응….”
뭔가 평소와는 다른 이유가 있어 내 앞에 나타났다는 것까지는 알 수 있지만, 정확하게 그 이유가 뭔지는 모르겠다.
솔직하게 대답해주니 에스더의 입가가 살짝 움찔거린다.
에스더는 입꼬리를 서서히 올려 웃으면서도 웃는 게 아닌 얼굴이 되어 나를 살벌한 눈으로 노려봤다.
“나한테 할 말은?”
“살려주세요…?”
“흐응?”
대체 뭐가 불만인지 에스더는 갑자기 내 목을 쥐고 있는 손에 살짝 힘을 주며 반대쪽 손에 붉은 화염을 휘감았다.
저절로 내 머릿속에 쉘터 문을 뜨거운 열기로 녹이던 광경이 떠오르며 등골이 서늘해진다.
이대로 내게 손을 대기라도 한다면 내 몸은 그대로 녹아내릴 게 분명하다.
“잘못했다는 건 알긴 아나 보네? 살려달라니.”
“네…?”
“124번…팬이 그러면 안 되지? 마법소녀의 소중한 곳을 만지다니 말이야.”
나는 에스더의 말을 듣자마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얼굴에서 피가 쭈욱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단두대가 떨어진 것처럼 몸속이 무겁게 울리고 심장이 빠르게 뛴다.
알고 있다.
최면을 걸었다는 걸, 알고 있다.
아마도…불가능한 얘기는 아니다.
그레이프도 최면에 저항하는 모습을 보였으니 그레이프보다 강한 에스더라면 최면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확실한 건 아니지만 그럴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은 있다.
에스더에게 최면을 걸어, 보지를 보여달라고 한 걸 알고 있다.
에스더의 보지를 핥아댄 것도, 음액을 맛보며 두근거렸던 것도 알고 있다.
충격적인 말에 전원이 순간적으로 차단된 뇌가 천천히 재부팅된다.
“변명은?”
“그…그게….”
머릿속이 새하얘지며 말이 제대로 나오질 않는다.
나한테 지금 뭘 하라고 한 거지?
최면을 걸었다는 변명을 해 보라고 한 건가?
대체 왜?
바로 죽이지 않고…변명을 해보라고?
의문에 잠겨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자, 에스더의 날카로운 눈빛이 살짝 풀어진다.
혼내려다가 너무 겁먹은 걸 보고 조금 마음이 풀린 것처럼 아주 약간의 걱정이 느껴진다.
“하아…대체 어떻게 한 건진 모르겠지만…반응을 보니 확실한 것 같네?”
“어, 어? 네?”
생각하고는 조금 다르게 흘러가는 듯한 상황에 머리가 아플 정도로 돌아간다.
딱히 나를 죽이려고 하는 것 같지는 않다.
네거티브의 간부인 에스더의 보지를 봤는데, 만지고 빨기까지 했는데…말투가 생각보다 부드럽다.
이해가 되질 않는다.
뒤늦게 에스더가 한 말이 머릿속에 들어오며 이상한 점이 느껴진다.
대체 어떻게 한 건지 모르겠다는 말은 내가 최면을 걸었다는 걸 모르고 있다는 얘기다.
보지를 만진 건 알고 있지만,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전부 알고 있는 건 아니다.
“솔직하게 자기가 뭘 했던 건지 한번 말해보지? 촉수들이 이미 다 얘기해 줬으니까.”
지금 상황에 대한 정보가 차례로 들어온다.
에스더가 촉수와 대화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그리 놀랍지 않으면서도 놀랍다.
분명 내게는 놀라운 일인데 어쩐지 당연하게도 느껴진다.
촉수들이 얘기해줬다는 말은 에스더가 최면에 걸렸을 때의 기억을 알고 있는 건 아니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솔직하게 말해 보라는 건…자신도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자세히 알지 못하니 내 자백을 통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아보겠다는 얘기….
패닉에 빠질 뻔한 정신이 빠르게 제 자리를 잡는다.
에스더에게 최면을 걸었던 순간, 보지에 입을 대기 직전에 나는 촉수들에게 보지 말라고 명령했던 거로 기억한다.
촉수가 본 건 에스더의 보지를 보고, 만지는 것 까지.
무슨 짓을 해서 그런 일이 가능했는지도 모르고 정확하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른다.
“마…말하겠습니다.”
생각보다 그렇게 적대적이지도 않고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전부 아는 것도 아니다.
위험한 상황인 것 같기는 하지만, 아직 괜찮을지도 모른다.
나는 끈적해진 입안의 침을 한번 삼킨 뒤 에스더의 손에 목을 쥐어진 채 최대한 당당하게 그때 있었던 일을 말했다.
“에스더님이…저도 이유는 모르겠는데 갑자기 멍해지셔서…왜 그러신 건지 모르겠지만 저는 다른 마법소녀가 무언가 공격을 해서 멈춘 줄 알았습니다.”
“…마법소녀가 공격해? 멍해졌다고?”
얘기는 해 주지만, 솔직하게 진실을 얘기해 주지는 않는다.
최면에 대해서도 숨기고 거짓말을 잘 섞어 적당히 속여 넘긴다.
나는 한쪽 눈살을 살짝 찌푸리는 에스더에게 얘기를 계속하며 쉘터 출입문 쪽을 힐끔거렸다.
밖에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멈췄다…공간정지? 시간정지…? 래피드가…? 그런 마법은 기억에 없는데…각성했나? 아니면 네거티브…마인드 컨트롤러 그 새끼가 뭔가 하려고 한 건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멈추셔서….”
“쯧, 뭐가 되었든 마음에 안 들어.”
다행히 에스더는 내 말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순수하게 믿어주는 듯 인상을 쓰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내 말에서 짚이는 게 있는지 뭔가를 중얼거리다가 혀를 한번 찬 뒤 다시 내 쪽을 살벌하게 노려보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가만히 있는다고 그런 짓을 해?”
“죄송합니다!”
이건 곧바로 사과하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다.
보지를 보고 만진 걸 들켰으니, 변명의 여지가 없다.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쉘터 밖에도 들릴만한 큰 목소리로 사과했다.
“팬이니까 그런 행동을 이해해 줄 수는 있어.”
“네?”
내 목소리를 듣고 빨리 그레이프가 와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그때, 에스더가 한 말에 나는 감았던 눈을 크게 뜨고 멍청한 목소리를 냈다.
보지를 만진 걸 이해해 준다니?
네거티브 간부, 감염된 마법소녀 에스더가 할만한 말이 아니다.
“다행히 꽤 부드럽게 만진 것 같지만…혹시라도 무슨 문제가 있었으면 가만두지 않았을 거야.”
에스더는 새끼를 훈육하는 짐승처럼 내 목을 꽈악 쥐며 경고하듯 말했다.
다시는 함부로 손대지 말라는 의미가 느껴진다.
마법소녀는 처녀막의 유무로 성장세가 바뀐다고 하니 당연한 반응이다.
나는 에스더가 하는 말을 이해하고 순순히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그때는 처녀를 지켜야 강해지는 줄 모르고….”
“그건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얘기야? 그딴 걸로 강해질 리 없잖아.”
사과를 하던 나는 에스더가 정말 어이가 없다는 듯이 한 말에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마법소녀는 처녀를 지키면 강해진다는 사실을 모르나?
황당해하던 에스더는 내 목을 잡고 있던 손을 놔주고 허공을 할퀴는 것처럼 손을 크게 흔들더니 두 팔로 팔짱을 끼며 다리를 꼬아 앉았다.
날개가 활짝 펼쳐지며 날개 끝에서부터 마력이 느릿하게 흘러나와 에스더의 몸을 공중에 띄운다.
“네 손이 거기에 닿는 것만으로도 불쾌해 하고 내게 배신감을 느낄 팬도 있다는 걸 좀 생각해주지 않을래? 그게 팬으로서의 매너라는 거니까.”
“어, 네?”
“그러니까, 마법소녀는 팬을 위해 순수함을 지켜주고 있는 건 맞지만 그게 124번이라는 개인의 팬을 위한 건 아니라는 걸 좀 알라는 얘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