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5화 > 접근 (5)
기억이 이리저리 찢겨나간 듯 머릿속이 멍하지만, 그레이프의 감정을 세세하게 해부해 곱씹어 맛봤다는 감각이 아직 머릿속에 남아있다.
혼란스럽다.
“애, 앵거? 왜 그래요? 아파요?!”
“아니…괘, 괜찮…하아…하아….”
“다, 다, 다친 거 아니에요? 복통?! 아까 코핀 셸 뜯을 때?”
그레이프는 내장이 비틀리는 감각에 배에 손을 올린 나를 보고 아르나를 물고 있던 조개를 열 때 혹시나 남자에게 심각한 복통을 일으키는 가스에 노출된 건 아닌가 걱정했다.
천천히 배에서 손을 떼며 괜찮다는 의미로 앞으로 내밀자 그레이프가 갑자기 내가 업고 있던 루이를 한 손으로 집어 든다.
작은 고양이라도 들고 가는 듯한 가벼운 움직임에 내 어깨에서 느껴지던 무게가 갑자기 사라졌다.
“진통제! 아…! 가지고 있던 거 그때 전부….”
“잠깐, 그냥 갑자기 속이 어지러웠던 것뿐이고….”
“빨리 가요, 빨리 가서 검사…해독제 맞아야 돼…!”
“아니, 코핀 셸은 해독제가 따로 없고 그냥 아프다 보면 낫는데….”
갑자기 다급해진 그레이프가 앞장서 걸어가며 앞에 있는 감염체와 괴수 시체들을 마력을 씌운 검을 휘둘러 휙휙 날려 보내기 시작했다.
마력 낭비인 것 같지만, 확실히 어두운 길이 좀 더 걷기 편해지며 움직이는 속도가 빨라진다.
소형 괴수가 잠깐 보인 것 같았지만 그레이프가 검을 휘두르자 곧바로 가루처럼 사라져버렸다.
그렇게 빠른 속도로 이동하니 얼마 지나지 않아 차단벽이 내려져 있는 역에 도착했다.
“문 열게요, 앵거 씨 빨리 여기로…!”
“하아…하아….”
마법소녀한테는 그냥 조금 가볍게 걷는 정도였을지 모르지만, 평범한 사람인 내가 쫓아가기에는 조금 벅찬 속도였다.
그레이프는 급하게 차단벽 한쪽에 있는 작은 문에 손바닥을 대고 마력을 흘려 넣었고, 마력에 반응한 개폐장치가 푸슉 하고 압축되어있는 공기를 뿜어내는 소리를 내며 천천히 열렸다.
그리고 그와 거의 동시에, 역 안에서부터 촉수들이 쏟아져 나왔다.
“흥!”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미리 문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던 듯한 촉수 괴수의 칼날 촉수가 말미잘처럼 쏟아져나오지만, 그레이프의 검에 순식간에 잘려나간다.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휘둘러진 검이 촉수 괴수를 베고, 베고, 또 베어서 조각낸다.
역 안으로 들어가는 그레이프의 등 뒤를 따라가 보니, 못 본 사이에 엉망이 된 내부가 보인다.
철로와는 다르게 밝은 등이 켜져 있는 역 안에는 이미 촉수 괴수가 가득 차 있었다.
그 광경에 갑작스러운 의문이 든다.
대체 어디에서 들어온 거지?
괴수들이 몰려오던 철로 쪽과 역은 차단벽으로 확실히 분리되어 있었다.
철로에서 역 안으로 들어올 수는 없다.
“시이이익!!”
“이쪽!”
그레이프가 비상탈출 포트로 향하며 검을 휘두르자 최음효과가 섞인 체액이 튀며 바닥을 적시고 근처의 촉수 괴수들이 반응해 울음소리를 낸다.
이건 울음소리가 아니라…이쪽으로 오라는 신호다.
하지만, 촉수 괴수 정도로 그레이프를 막을 수는 없다.
그레이프의 검이 순식간에 촉수들을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두꺼운 지렁이로 만들어가며 탑승구역의 가장자리에 이어지는 길을 만든다.
어깨에 마법소녀를 둘이나 들었는데도 수많은 촉수 괴수가 상대도 되지 않는다.
루이에게서 말없이 빌린 방패를 찬 한쪽 팔을 절묘하게 움직여 촉수를 튕겨내고, 검으로 베어내 처리한다.
나는 그레이프의 뒤를 뒤따라 달리며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을 이어갔다.
이 녀석들이, 촉수 괴수가 여기 있다는 건…다른 괴수들에게 이끌려 왔다는 얘기다.
문제는 어디에서 왔는가 하는 거다.
다급하게 뛰며 숨이 차올라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지만, 촉수 괴수들이 이곳에 있다는 현실에서 느껴지는 위화감이 사라지질 않는다.
그대로 위화감을 가지고 뛰는 사이에 비상탈출 포트가 빠르게 가까워진다.
비상탈출 포트는 4인승으로, 탑승해 본 적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지만 각자 한 캡슐에 들어가서 지상으로 발사되는 형식이다.
지하철에 근무하는 마법소녀들이 만일의 사태에서 도주하는 목적으로 주로 사용되는 보험용 탈출장치 같은 것이기에, 마법소녀가 아니면 작동시킬 수도 없다.
“그레이프 언니, 전부 태웠어!”
“막고 있을 테니까 앵거 씨 내보내 줘!”
그레이프가 나와 로제에게서 등을 돌리고 점점 모이는 촉수 괴수들을 막아내는 동안 로제가 바닥에 던져진 동료들을 포트에 태운다.
캡슐같이 생긴 일회용 탈출기에 앉히고 안전벨트를 확실하게 장착해 고정시킨다.
루이, 아르나, 시에나를 탑승시킨 로제는 마지막으로 나를 태워서 밖으로 내보내려고 했다.
로제와 그레이프, 아직 전투가 가능한 두 마법소녀가 남아 나머지 괴수들을 처리한다는 생각이다.
이대로 탈출하면 되지만…묘한 감각이 발목을 붙든다.
이대로 탈출포트를 타고 지상으로 도망치면 정말로 안전해질까?
철로와 탑승구역은 완전히 분리되어 있었고, 철로가 아니라면 지상으로 이어지는 길밖에 없다.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걸 느끼며 숨을 집어삼켰다.
비상탈출 포트를 써서는 안 된다.
촉수 괴수는 지상에서 내려왔다.
“로제! 네가 탑승해!”
“네?!”
“빨리!”
지금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깨달은 나는 탈출 포트에 탑승하는 걸 거부하며 로제의 몸을 밀쳤다.
그러자 마법소녀인 탓에 아무리 밀어도 꼼짝도 하지 않는 로제가 대체 왜 이러냐는 듯 놀란 표정을 짓는다.
“이럴 때가 아닙니다, 빨리 탑승하셔야…!”
“촉수 괴수가 어디서 온 것 같아?”
“네? 갑자기 그게….”
“지상에서야, 차단벽이 내려와 있으니까 틀림없어. 위쪽에도 괴수가 있을지 몰라…아니, 있을 거야!”
급한 상황에 짧게 말했지만, 로제는 내 말을 정확하게 알아듣고 움직임을 멈췄다.
이대로 나와 아르나, 루이, 시에나를 위로 탈출시켰다가 괴수가 한 마리라도 있으면…전부 잡혀가고 나는 죽는다.
로제는 동료를 지켜야 하니 이대로 탈출해야 한다.
탈출 포트는 4명밖에 사용할 수 없다.
상황을 빠르게 파악한 로제가 이래야 한다는 걸 이해하면서도 나를 두고 가야 한다는 사실에 탈출을 망설인다.
나는 갑작스럽게 힘든 선택을 하게 된 로제의 손을 잡으며 탈출 포트로 이끌었다.
“다른 애들은 전부 전투불능이니까…네가 지켜야 해.”
“그치만…그, 그래도 평범한 사람을 두고 간다니…!”
“내가 아까 방어선을 줄이라고 했지? 이게 최선이야.”
“하, 한 명을 내리고…!”
그 방법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긴 하다.
로제와 내가 탑승하고 다른 한 명을 내버려 둔다면 그레이프에게 짐밖에 되지 않겠지만, 일단 나는 탈출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미 마력을 상당히 소모해 힘이 다 빠져가는 중위권 마법소녀 로제와 방금 도착해 마력이 넘치는 상위권 마법소녀 그레이프 중 선택하라면…그레이프를 선택하겠다.
위쪽에 괴수가 얼마나 남아있을지 모르지만, 그레이프는 촉수 괴수 수십 마리를 혼자서 상대할 수 있으나 지금의 로제는 두 마리도 벅차다.
거기에 더해 지상으로 가게 되면 세 명의 전투불능 마법소녀라는 짐까지 생긴다.
그레이프와 함께 지하에 남는 쪽이 더 안전해 보인다.
“로제, 정신 차려. 동료를 버리겠다는 얘기야?”
“그건…그건….”
“나는 다른 애들과 다르게 직접 움직이거나 걸어 다닐 수는 있어, 짐은 되겠지만…한명을 두고 내리는 것보다는 덜하겠지.”
어차피 탈출해야 하는 거, 짐 덩이는 빨리 없애버리는 게 내 생존확률이 올라간다.
나만 지키는 것과 나 포함 다른 마법소녀들도 지키는 것 중 나만 지키게 하는 게 더 안전하다는 건 생각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당연한 사실이다.
이렇게까지 말했는데도 로제는 탈출 포트에 탑승하지 못했다.
“로제! 아직이야?”
“어, 언니…!”
“전부 다 막는 건 슬슬 힘들어…! 빨리! 촉수가 너무 많아!”
“읏….”
말도 안 되는 속도로 검을 휘두르며 벽을 치듯 촉수를 막아내고 있는 그레이프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지만, 그런데도 여전히 로제는 움직이지 않았다.
상황도, 이유도 전부 이해되지만, 행동으로 옮기자니 차마 그럴 수가 없는 모양이다.
더 이상 말로 설득 하는 건 시간 낭비다.
나는 비전폰을 주머니에서 꺼내 로제에게 최면을 걸었다.
“당장 탈출 포트에 탑승해서, 작동시켜. 전부 지상으로 나가.”
“읏…!”
그러자 드물게도 로제의 머리에 빛의 고리가 나타나며 거부감을 보인다.
하지만 중위권 수준밖에 안 되는 마법소녀인 로제는 최면에 저항할 수 없다.
초점을 잃은 눈으로, 인상을 쓰면서도 캡슐에 탑승해 안전장치를 전부 채운 뒤 마력을 일으켜 탈출포트를 작동시킨다.
“앗…! 왜, 왜?! 선생님?!”
캡슐 안에서 정신을 차린 로제가 이성을 되찾고 깜짝 놀라며 말했지만, 이미 탈출포트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캡슐을 보호하는 몸체가 닫혀 럭비공처럼 변하며, 경고음과 함께 붉은 등이 점멸한 직후 탈출포트를 드러내던 문이 닫힌다.
곧바로 놀이기구가 발사되는 소리가 나며, 짐만 되는 마법소녀들이 멀어져간다.
“뒤로 가는 거 부탁…안돼!”
그 소리를 듣고 로제가 나를 무사히 지상으로 탈출시킨 줄 안 그레이프가 촉수를 일부러 뒤쪽으로 흘려보냈다.
남는 촉수를 로제에게 상대하게 하려고 한 것 같지만, 뒤쪽에 있는 건 로제가 아니라 나다.
내 어깨로 찔러 들어오는 칼날 촉수에 제대로 반응하지도 못한 내가 얼어붙어 있자, 뭔가 이상한 걸 느끼고 뒤를 힐끔거린 그레이프가 기겁하며 내 쪽으로 달려든다.
하지만 촉수 쪽이 조금 더 빠르다.
아슬아슬하게 촉수가 먼저 내 쪽에 닿는다.
닿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쉭?!”
그런데 그때 내 몸에 닿으려던 촉수가 갑자기 눈에 보이게끔 움츠러들었다.
깜짝 놀라는 소리와 함께, 그레이프가 내게 근접해 검을 휘둘러 촉수를 자르고 무서운 속도로 내게 달려들어 나를 감싸 안는다.
그레이프에게 안기는 충격과 동시에 촉수들만의 언어가 노이즈가 낀 것처럼 지직거리며 흐릿하게 느껴진다.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