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화 > 접근 (1)
도와달라고, 이쪽으로 좀 오라고 말하기도 전에 전화가 끊어져 버렸다.
당황스러운 와중에도 그레이프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게 느껴진다.
거리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바로 옆에 있는 것처럼 불쾌할 정도로 끈적한 마력의 파동이 느껴진다.
심장 소리가 울리는 것처럼 짙은 마력이 계속해서 주변을 휩쓸고 지나간다.
애쉬를 처음 봤을 때 느꼈던 감각과 비슷하다.
마력을 쏘아내, 다른 마력을 가진 물체에 반사시켜 위치를 특정한다.
하지만 정상적인 마법소녀의 마력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이상하다.
불쾌하면서도 편안한 감각이 내 몸속에 가라앉아있는 무언가를 가라앉히고 띄우기를 반복한다.
동질감과 반발감이 동시에 느껴진다.
“괴수?! 아니, 이건…?”
“로제, 앞에!”
괴수들에게서 느껴지는 마력과는 맛이 다르다.
같은 단맛이어도 초콜릿과 설탕이 다른 것처럼 아직 덜 녹아들어 있는 맛이다.
아직은 마법소녀다.
하지만 가능성이 있다.
알려야 하나?
뭘?
대체 누구한테…?
“아까부터 뭐야 이건…!”
“선생님?”
불쾌한 감각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질 않는다.
뭔가가 내 안에 있다.
사람이 가져서는 안 될 감각이 조금씩 깨어나면서 그 이질감이 느껴진다.
마법소녀의 진한 마력이 내장을 흔들고 네거티브의 끈적하고 질척한 기운이 몸속을 가라앉힌다.
주체가 계속해서 흔들리며 두통이 점점 심해진다.
제어권을 빼앗긴다.
평범한 사람인 내가 버틸 수 있는 힘이 아니다.
“읏…?”
갑자기 머릿속이 차분하게 가라앉으며 이성이 돌아온다.
이질감 같은 건 없다.
나는 정상이다.
머리가 조여드는 느낌이 있지만, 꽤 편안하다.
위화감을 왜 느낀 거지?
내가 느끼는 위화감은 전부 당연하다….
당연한 일…아무런 이상도 없는 일이다.
스트레스가 이렇게 강한 상황에서 두통을 느끼는 건 당연하다.
생명의 위기를 느끼고 있는 사람이 갑자기 평범한 사람은 느끼지 못하는 마력을 느끼는 건 당연하다.
당연하다, 문제없다.
“로제, 침착하고 마력을 똑같이 쏘아내. 그리고 주변에 있는 놈들 죽여. 마력 아끼지 말고.”
“앗, 네!”
안정을 되찾은 나는 가장 먼저 로제에게 마력을 아끼지 않고 사용해 위치를 알리게끔 하고 주변의 네거티브들을 정리할 것을 명령했다.
그레이프가 오고 있으니 더는 로제의 마력을 아낄 이유가 없다.
내가 이용할 수 있는 마법소녀가 더 강한 것으로 교체된다.
로제의 마력 파장을 받아냈는지 주변을 훑고 지나가던 마력의 파동이 점점 줄어든다.
위치를 특정하고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지하철은 이미 괴수와 감염체들이 나타나며 완전 폐쇄되어있을 테니 그레이프가 올 때까지는 아직 좀 더 시간이 걸릴 것으로 판단된다.
어떡하면 좋을까?
다행스럽게도 감염체들은 전부 그레이프의 마력에 반응해 몸을 움츠리며 소극적이게 움직이고 있다.
피라냐가 상어를 보고 도망치는 것처럼 동물적인 본능을 자극하는 천적을 느끼고 도주를 고민한다.
괴수와 감염체가 다른 점은 이런 부분이다.
감염체는 자신보다 과하게 강한 마법소녀를 만나면 도망칠지 말지를 고민하지만, 괴수는 목숨을 버리고 달려든다.
박쥐와 마견은 남아있는 동물적 본능과 네거티브로서의 욕구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지만, 허거는 더 활발하게 움직이며 불빛에 달려드는 나방처럼 마법소녀에게 달려들 준비를 한다.
그렇다면 감염체를 먼저 처리하게 하는 게 좋을까, 아니면 소형 괴수들을 먼저 없애버리는 게 좋을까.
고민하던 찰나 머리 위에서부터 이상한 진동이 느껴진다.
“어?”
터널을 비추는 붉은빛의 마력 감지등이 하나둘씩 꺼진다.
무언가가 중간에서 전선을 끊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빛이 점멸하고 천장에서부터 돌과 먼지가 비처럼 떨어져 내린다.
위에서부터 강력한 마력이 느껴진다.
“언니?! 미쳤어?!”
떨어지는 돌덩이에 괴수 특유의 방벽을 지니고 있지 않은 감염체들이 머리를 부딪치고 고통스러워한다.
박쥐가 떨어지고, 마견이 돌을 피하며 거리를 벌린다.
로제는 깜짝 놀라 내 옆으로 다가와 머리 위로 방패를 들게 하고 위험하지 않게끔 받쳐주고 있다.
천장을 보고 있는 로제의 눈빛이 경악의 감정으로 물든다.
별로 맛있는 감정은 아니지만, 상황을 짐작하는 데에는 도움이 된다.
천장에서부터 그레이프가 땅을 뚫고 내려오고 있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지하철은 위기 상황 시에 방공호로 쓸 수 있도록 매우 깊은 지하에 지어져 있다.
평소 차량을 운행할 때는 마수들이 나타나는 침입로가 되기도 하지만, 대피상황이 되면 차단벽이 내려가며 임시 쉘터로도 사용할 수 있게끔 설계되어 역 전체가 강도 높은 금속으로 둘러싸이는 구조다.
괴수 경보가 일어난 순간 지하철은 임시 쉘터로 변한다.
들어오기 위해서는 정상적인 통로를 통해 임시 폐쇄된 출구를 하나하나 열며 들어오는 수밖에 없다.
그걸 다 무시하고 빠르게 들어오기 위해서, 쉘터를 부순다.
“히익!”
로제가 기겁하며 내는 목소리와 함께 콰드득! 하는 소리가 나며 천장에서부터 흙더미가 무너져 내리고 어두운 지하철 안이 먼지로 뒤덮인다.
유리처럼 녹아내린 반들반들한 돌들이 바닥을 구르고 번득이는 칼날과 머리 위에서부터 밝게 빛나는 고리 형태의 빛이 지저분한 지하철 안을 비춘다.
공포스러운 광경이다.
“하아…! 하아…!”
마법소녀로 변신한 그레이프의 손에는 검은 기운이 작게 일렁이는 크리스탈 소드가 날카로운 빛을 쉴 새 없이 내뿜고 있었다.
그레이프에게서부터 뿜어져 나온 마력 파동이 주변을 쓸어버리며 허공에 퍼진 먼지를 한 번에 밀어내 시야를 밝힌다.
머리에 손을 대고 입에서 피가 날 정도로 이를 악 문 그레이프의 입에서 이유를 알 수 없는 중얼거림이 들려온다.
기분 나쁜 마력이 몸을 간지럽히고 지나가는 것과 동시에 공포스러운 시선이 내게로 향한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무섭지는 않다.
육체는 두려움에 부들부들 떨리지만, 정신은 꽤 멀쩡하다.
그레이프는 적이 아니라 지금 내가 이용해야 할 도구다.
진정하고, 차분하게 지금 상황을 생각해야 한다.
감정이 점차 소모되며, 감각이 현실과 박리되어간다.
전혀 두렵지 않다.
“그레이프 언니! 온거야?!”
“아아…아아아…!”
나를 발견하고 눈을 크게 뜨며 가까이 오려고 하는 그레이프의 머리에서 빛의 고리가 주변을 찢어버릴 것처럼 강하게 회전한다.
그레이프의 표정이 일그러지고, 몸 주변에서 마력이 요동친다.
조여드는 고리를 그레이프의 마력이 밀어내는 광경이 선명하게 보인다.
최면에서 저항하고 있는 모습을 보자 두려움이 일어나지만, 지금은 내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 그레이프가 필요하다.
목숨을 유지해야만 래피드의 처녀를 가질 수 있다.
우선해야 될 게 명확해지자 그레이프의 상황을 살펴보게 된다.
내가 먼저 걸어둔 최면인 내게 가까이 오지 말라는 최면에 저항하고 있다.
나를 눈으로 직접 본 순간부터 내게 가까이 온다는 게 더욱 확실시되며 최면의 구속이 강력해졌는지 움직임이 점점 느려진다.
그레이프에게서 부정적인 감정이 읽힌다.
후회와 절망과 불안감, 내게 느끼는 죄책감으로 가까이 왔다가 미움받을까 봐 두려워하고 있다.
달콤하고 끈적한 감정이 속을 간지럽히지만, 식욕보다 중요한 건 내 생명이다.
먼저 걸어둔 최면을 취소해 줘야 한다.
“로제, 그레이프 쪽으로!”
“네!”
그레이프에게 걸어둔 최면은 내게 가까이 오지 말라는 최면이지, 내가 가까이 올 때 피하라는 최면이 아니다.
내 쪽에서 다가간다면 문제 될 것은 없다.
그렇게 생각하며 점점 그레이프에게 가까워지던 도중 내 몸으로 허거 한 마리가 뛰어들었다.
“히익?!”
그와 거의 동시에 무시무시한 살기와 예리한 기운이 내 몸의 바로 옆을 스쳐 지나갔다.
눈 깜빡할 사이에 내게 가까워진 그레이프가 살벌한 눈빛을 하고 무시무시한 기운을 주변에 퍼뜨리고 있다.
눈을 깜빡이며 살펴보니 최면이고 뭐고 다 무시하고 갑자기 달려든 그레이프의 검 끝에 허거가 꿰뚫려 있었다.
“어디, 어디, 이…!”
내게 가까워진 그레이프의 몸에서 검은빛의 끈적한 기운과 촉각을 강제로 곤두세우는 살벌한 마력, 머리 위에서 빛나는 빛의 고리가 동시에 빛난다.
그레이프는 이를 악문 채 검 끝에 마력을 덧씌워 검날을 길게 늘리고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검을 휘둘렀다.
“어딜 손 대려는 거야! 벌레 새끼야아!!”
긴 참격이 내 등 뒤에 있던 감염체들과 괴수들을 한 번에 쓸어버린다.
강력한 힘이 소형 괴수들을 끌어당기며 강제로 참격에 끌어들이고 거리를 벌리고 도망가려던 마견을 추격해 찢어발기며 지나간다.
오싹한 광경이다.
로제가 그렇게 고생하며 하나하나 상대하고 중위권 마법소녀 넷이 힘겨워하던 수의 감염체가, 괴수들이 단 한방에 사라진다.
로제는 자신이 그렇게 고생하던 괴수들이 단 일격에 사라진 게 허탈한지 눈을 크게 뜬 채 그레이프를 가만히 바라보며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나 또한 로제와 같은 이유로 황당하고 허무해 하면서도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레이프가 약한 건 아니지만, 이렇게 강했나?
이건 뭔가 조금 과하게 강한 압박감이다.
그레이프에게서 애쉬 같은 압력이 느껴진다.
마력의 질이 다르다고 해야 하나, 종류와 밀도 자체가 다르다.
나는 한 박자 늦게 그레이프의 입에서 나왔던 말을 되새기며 중얼거렸다.
“…벌레 새끼?”
그레이프가 내 앞에서 이렇게 욕을 한 건 처음이다.
비록 나를 강간한 강간범이기는 해도…그때만 제외하면 공격적인 말을 할 때도 선을 지키며 너무 심한 말은 하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그레이프가 이렇게 살벌한 말투로 벌레 새끼라는 말을 할 줄이야.
충격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