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2화 > G rape (10)
그레이프는 목소리가 미묘하게 떨리고 있었다.
안 좋은 일이 있었던 것 같은 목소리지만, 이제는 신경도 쓰이지 않는다.
나는 그레이프를 경계해 엘리베이터 문 쪽에 등을 기댄 채 조금씩 옆으로 걸어가며 대답했다.
“집에 갑니다, 허리도 아프고 머리도 아파서…가서 쉬려고요.”
“아, 으응…네에…조퇴, 하는구나…머, 머리는 왜요?”
“이상하게 꽉 조여드는 것처럼 아프네요, 스트레스가 많았나….”
“…네.”
그레이프는 위험하다.
그레이프를 피해야 한다.
그레이프로부터 멀어져야 한다.
머릿속에 계속해서 그레이프와 가까워지는 걸 경고하는 문장이 떠오른다.
나는 굳은 표정으로 그레이프를 힐끔거리며 조심히 거리를 벌렸다.
그레이프는 내가 경계하며 말하자 울상이 되어서 침을 꿀꺽 삼키고는 내게 음료수가 가득 든 봉투를 내밀었다.
“이, 이, 이거!”
“뭐죠?”
“앵거 씨…마, 마시고 싶은 거…골라서, 마셔 주세요….”
“…안 마실게요.”
“왜요?!”
“가까이 오지 마세요!”
내가 음료수를 거절하자 그레이프는 당장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당황하게 가까이 다가왔다.
1층 복도에는 나와 그레이프 외에는 아무도 없다.
나는 그레이프가 무슨 짓을 할지 몰라 두 손을 앞으로 내밀며 뒤로 빠르게 멀어졌다.
그러자 걸음을 멈춘 그레이프는 아랫입술을 물고 부르르 떨면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마셔, 마셔 주세요…원래, 잘 마셔 줬잖아요….”
“…그 안에 뭘 탔을지 제가 어떻게 알아요?”
“뭘 타다뇨…? 안 탔어요!”
“강간범 말을 제가 어떻게 믿죠?”
그레이프는 마법소녀니까 뭔가 내가 모르는 마법을 썼을지도 모르고, 단순하게 머리카락으로 구멍을 뚫어 안에 뭔가 약물을 넣었을지도 모른다.
냉정하게 말하자 그레이프는 손을 꾸욱 쥐어 봉투가 일그러지는 소리를 내더니 팔을 부들부들 떨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죄…죄송, 죄송 해요….”
나는 사과를 하는 그레이프를 가만히 보고 있었다.
그레이프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나를 보며 계속해서 고개를 떨어뜨리고 다시 힐끔거리기를 반복하더니 젖은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무척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제가, 왜 그랬는지…제가, 그게, 성급했어요…오해, 오해 해서…그런 거, 바란다고…생각해서, 혼자, 혼자 이상한 상상 많이 해버려서…못 참고….”
“…오해요?”
“오해해서…! 죄송해요…헷갈려서, 잘 모르니까…경험, 남자 몰라서…이런 거 모르니까….”
대체 뭘 모른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자세히 알고 싶지 않다.
나는 그레이프의 말이 너무도 황당해 어이없어하며 물었다.
“오해해서 강간했다고요?”
“으읏…!!”
“오해라고요?”
“죄, 죄송…죄송…죄송해요…잘못, 했어요….”
그레이프는 죄책감과 후회가 가득한 얼굴로 당장에라도 울 것처럼 눈에 눈물을 맺히며 사과했다.
강간한 것에 죄책감을 느끼는 최면을 걸어뒀으니, 당연한 반응이다.
나는 강간을 오해해서 했다고 말하는 그레이프를 차가운 눈으로 가만히 바라보며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그러자 그레이프는 내 쪽으로 한 걸음 다가오며 다급하게 말했다.
“앞으로! …그래도 매일 보는 사이니까, 저기…부, 불편한 사이라도 안 되었으면…제가 잘못, 했어요….”
“괜찮습니다.”
“네?”
그레이프는 매일 보는 사이니까 불편한 사이가 되고 싶지 않다며 사과했지만, 내게는 전혀 필요 없는 사과다.
난 이미 퇴사하고 나오는 길이다.
이제 그레이프와 나는 매일 보는 사이가 아니다.
“그런 거 신경 안 쓰셔도 돼요.”
“신경 안 써도 된다뇨…?”
“괜찮으니까, 신경 안 써도 된다고요….”
“어…?”
그레이프는 영문을 알 수 없어 어리둥절하면서도 어딘가 안도하는 풀린 표정을 지어 보였다.
당황과 안도가 함께하는 얼굴이다.
“…혹시, 저라서…괜찮은 거에요? 정말로 괜찮…아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전 집에 가 보겠습니다.”
“아! 네, 네에…빨리, 빨리 가셔서 쉬세요.”
이상한 말을 하던 그레이프는 내가 집에 가겠다는 말을 꺼내자 깜짝 놀라며 내게 빨리 가라고 문 쪽을 손으로 가리켜줬다.
그러면서도 손에 든 음료수가 가득한 봉투를 들어 올렸다가 머뭇거리고는 다시 내 쪽을 힐끔거리며 한숨과 함께 팔을 내려놓는다.
나는 그레이프에게서 조금 떨어지고 난 뒤 그레이프의 얼굴을 힐끔거리며 말했다.
“그러면…프로젝트 잘 되길 바래요.”
“…네?”
그레이프의 안도하던 표정이 점점 이상하게 일그러진다.
눈썹이 모이며 미묘하게 인상을 쓰는 게 뭔가 불안해 하고 경계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대로 그레이프에게서 멀어지려던 나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그레이프를 불러세우며 비전폰을 들어 올렸다.
나는 이번에도 그레이프가 최면에 걸리지 않을까 봐 아주 잠시 망설였다가, 최면어플을 작동했다.
“아, 그리고…잠깐 여기 좀.”
최면에 걸린 그레이프의 표정이 굳은 채로 멈춰 선다.
최면에 걸리면 완전히 풀어진 얼굴이 되던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표정이다.
눈썹이 찌푸려진 채 펴지질 않는다.
하지만 눈에 초점은 확실히 나가 있었고, 눈앞에서 손을 흔들어 봐도 전혀 반응이 없는 걸로 보아 최면에는 잘 걸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기존에 걸었던 나를 상상하며 자위할 때 절정하지 못한다는 최면을 취소한다.”
나는 최면에 걸려 있는 그레이프에게서 일단 조금이나마 이상행동의 원인으로 의심이 가던 최면을 삭제시켰다.
그러고 난 뒤, 그레이프에게 최면어플을 보여주며 머릿속에 떠올렸던 최면을 걸어버렸다.
“내게 자발적으로 가까이 오지 않는다.”
그레이프와 가까워지는 것을 포기했으니, 이왕 하는 건 확실하게 해 두는 게 좋다.
이 최면으로 그레이프는 나를 잊지는 않아서 위화감을 느끼지 못하지만, 내게 가까이 오지는 못하게 된다.
즉, 내가 회사를 관둔 뒤에도 내 집에 찾아오거나 하지 않고 나를 강간하지 못하게 되는 최면이다.
다른 최면들은 따로 지울 필요가 없다.
내가 야한 눈으로 볼 때 호감을 가진다는 최면은 어차피 나와 만나야만 실행되는 최면이다.
애초에 만나지 않게 해 두면 실행되지도 않으니, 건드리지 않아도 된다.
나를 공격하지 못한다거나 피해를 못 준다는 최면도 풀지 않아도 상관없는 최면이다.
이것으로 모든 문제를 개운하게 정리했다.
퇴사에 이어서 그레이프에게 최면을 거는 것을 끝마친 나는 최면에 걸려있는 그레이프를 1층 로비에 내버려두고 천천히 멀어졌다.
그대로 입구에서 최면어플을 끈 나는 최면에서 풀려난 그레이프를 뒤로하고 건물 출입문 앞에 섰다.
“어…? 어? 앵거 씨?! 그게,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레이프는 정신을 차리고 당황하며 내게 물었지만, 가까이 다가오지는 않았다.
나는 다행히 이 최면은 제대로 걸린 것 같다고 생각하며 건물을 나섰다.
내게 다가오지 않는 그레이프를 두고 회사를 나오자 따뜻한 햇살이 나를 반긴다.
지금은 회사가 밀집한 구역인 이곳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회사 안에 앉아 멈춰서 있는 시간대다.
퇴근 시간도, 출근 시간도 아닌 탓에 길에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나는 한적한 거리를 걸어 느긋하게 지하철 역으로 향했다.
그레이프와 회사 일은 완전히 정리했으니, 이젠 집에 돌아가서 좀 쉬고 나서 래피드에 대한 생각만 집중하고 싶다.
그레이프에게 최면을 걸며 실패했던 경험을 밑바탕으로 래피드에게는 더욱 철저하게 최면을 건다.
그러기 위해서 좀 더 최면에 대한 공부를 하고 싶다고 생각한 나는 지하철 역에 도착하자마자 최면어플의 추적기능으로 래피드의 위치를 확인했다.
래피드는 오늘도 여전히 0번 구역에, 애쉬는 2번 구역에 가 있었다.
2번 구역이면 트루비전의 본사가 있는 것으로 유명한 구역이다.
차라리 반대로 애쉬가 0번 구역이고 래피드가 2번 구역이면 당장 우연인 척 보러 가기라도 할 텐데….
래피드를 어떻게든 보러 가야 머리카락을 채취하고 최면 자료를 찾아볼 수 있지만, 아쉽게도 오늘은 집에 돌아가 휴식이나 해야 할 것 같다.
몸도 뻐근하고 허리도 아프니 나쁜 선택은 아니다.
나는 비전폰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지하철 차량을 기다렸다.
빨리 집에 돌아가고 싶은데 지하철이 오질 않는다.
출퇴근 시간을 제외하면 지하철은 배차간격이 무척 커서 대기시간이 오래 걸리는 편이다.
그때, 20분 정도만 기다리면 차량이 도착한다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그대로 차량을 기다리며 시간을 보내자, 갑자기 주머니 안에 넣어둔 비전폰에서 벨소리가 울렸다.
비전폰을 꺼내 확인해보니 팀장님이라는 글자가 화면에 떠 있는 게 보인다.
벨소리가 울리는 소리를 들으며 받을지 말지 잠시 고민한 나는 통화 버튼을 누르고 천천히 귓가에 가져다 댔다.
[팀장님, 왜 그런 놈한테 계속 신경을 쓰세요? 관뒀으니 차라리 잘 됐죠. 어차피 도움도 안 되고….]
[닥치세요! 지금 전화하고 있잖아요!]
[티, 팀장님…?]
[당신이, 당신이 무슨 권리로 직원을 잘라요! 당신이 뭔데! 전화하는데 옥상까지 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따라오고! 이딴, 이런, 이런 짓을…!]
“…여보세요?”
분명 전화가 와서 받은 건데 전화할 상황이 아닌 것 같은 대화 소리가 들린다.
그레이프는 과장에게 날카롭게 날이 서려 있으면서도 불안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뭔가 말하고 있었다.
나는 그레이프가 전화가 연결되었다는 걸 모르는 것 같아 작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려줬고, 전화기 너머의 그레이프는 곧바로 깜짝 놀라며 굉장히 조심스러워하는 목소리를 냈다.
[애, 애, 애애애…앵거씨, 앵거, 앵거…씨, 잠깐, 잠깐만…잠깐만요….]
“바쁘시면 끊겠습니다.”
[아아아, 아니에요! 잠깐, 정말 잠깐만요! 내려가라고요! 내려가라고!]
[히, 히익! 네!]
그레이프의 목소리도, 과장의 목소리도 처음 듣는 것처럼 들린다.
그레이프는 무척이나 화가 나고 난폭하면서도 울 것 같은 불안한 목소리를 내고 있었고, 과장은 놀라면서도 당황해 겁에 질린 목소리를 냈다.
잠시 후 과장이 사라졌는지 그레이프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 이거 무슨 얘기에요?]
“…뭐가요?”
[퇴, 퇴, 퇴사! 저 때문…제가, 제가 그래서? 저 때문이에요? 저 때문에…?]
나는 그레이프의 말을 듣고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단번에 이해했다.
그레이프는 자신이 강간해서 퇴사하는 거냐고 물어보고 있다.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나는 이왕 퇴사하는 거 팀장인 그레이프한테 내가 왜 퇴사하는지 정도는 말해줘도 좋을 것 같아 순순히 얘기해줬다.
“부정은 안 할게요, 그리고 직원들한테 못 들었습니까?”
[…네?]
“그레이프한테 보호나 받고 일도 제대로 안 하면서 회사를 왜 나오냐고, 이럴 거면 나오지 말라고 하길래 퇴사했어요.”
솔직하게 얘기해주자 그레이프는 전화기 너머에서 가만히 숨을 삼키고 있다가, 떨리는 목소리를 작게 내며 중얼거렸다.
[저 때문에…? 제가, 잘 해줘서…? 전부, 전부…나, 나, 나 때문에…언제, 언제부터….]
“좀 됐어요.”
[왜…? 대체, 대체 왜…? 왜 말 안했어요? 왜? 왜…! 왜애애애….]
그레이프의 목소리가 점점 망가진다
듣기 좋은 목소리가 이리저리 갈라지고 떨리며, 힘에 부친 듯 숨을 빠르게 헐떡이는 게 들린다.
그레이프는 뭔가를 내리치고 손으로 구기고 있는 건지 콰득콰득 하는 소리를 내며 울부짖었다.
[왜 자꾸, 왜 자꾸 이렇게 되는 거야…타이밍도, 말하는 것도…상황도…어째서, 어째서…! 아니야, 아니야아아….]
전화 너머로 흐느끼는 목소리가 들리자 어째서인지 가슴 한쪽이 갑갑해진다.
그레이프는 포기했는데, 별로 친한 사이도 아닌데….
머리가 아파지고, 저절로 숨이 거칠어진다.
“지하철 오고 있어서 끊습니다.”
더는 그레이프의 목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던 나는 냉정하게 말하며 비전폰을 귓가에서 내렸다.
숨이 막혀서 더 듣고 있지를 못하겠다.
[앵거, 잠깐, 잠깐만…! 싫어!]
전화를 끊자 곧바로 그레이프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지만 나는 아예 수신거부 모드를 켜 버렸다.
그레이프에게 강간당한 뒤로 이상하게 그레이프를 생각할 때마다 머리가 아파져 온다.
강간당하며 받은 스트레스가 너무 심했던 것 같다.
빨리 집에 가서 일단 쉬고 앞으로 회사 일은 떠올리지 말자고 생각한 나는 조용히 서서 다음에 올 차량을 기다렸다.
그리고 잠시 후, 지하철이 역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