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1화 > G rape (9)
사무실 안 사람들의 감정이 선명하게 느껴진다.
비웃음, 쾌감, 승리감…머리를 어지럽게 하는 감각이 몸속을 낮게 울린다.
나는 뒤늦게 사무실을 둘러보며 비웃음과 한심함이 섞인 눈빛을 보고 가슴이 점점 빠르게 뛰어가는 것을 느꼈다.
“과장님…갑자기 그게 무슨….”
“갑자기가 아니라! 너무 도를 지나치니까 내가 참다 참다 팀장님 대신해서 얘기하는 거 아냐!”
“저거 바보인 척 하는 거야? 아니면 진짜 바보인 거야?”
“앵거 씨 진짜 팀장님에 과장님까지 이러시는데도 상황 파악이 안되나 봐.”
“어휴, 한심하다 진짜….”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지만, 직원들 모두에게서 내 이미지가 완전히 쓰레기로 낙인찍혀있다.
회사에 다니기 싫었던 건 과장과 부장의 성격이 그리 좋지 않기 때문이었는데, 지금은 그전보다도 더 다니기 싫은 회사가 되어있다는 게 느껴진다.
“어?! 뭐야! 앵거! 너 또 뭔 짓 했어?!”
“하아…부장님, 부장님은 못 느끼셨습니까? 요즘 팀장님 조금 상태 안 좋으신 거….”
“아니…설마 앵거 니가 한 거야? 니가 뭐 해서 팀장이 그렇게 날이 서 있던 거란 말야? 갑자기 휴가도 쓰고?”
“아 진짜…부장님도 팀장님 때문에 눈치 많이 보셨을 텐데….”
“앵거 씨 하나 때문에 사무실 분위기가 다 엉망 되네….”
미리 짜두기라도 한 것처럼 직원들이 부장을 부추긴다.
이 순간을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과장이 직원 모두에게 내가 적이라고, 나를 괴롭히라고 은근하게 지시한다.
“아니 근데…앵거가 뭘 했는데?”
“한두 개가 아닙니다. 일 똑바로 안 하는 게 제일 크고, 팀장님한테 예의 없는 것도 그렇고…내가 이런 말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팀장님 간식까지 훔쳐먹고…그걸 또 팀장님은 용서해주고…앵거 씨 애야?”
부장이 궁금해서 묻자 과장이 기다렸다는 듯 내가 잘못한 일들이라며 이상한 얘기를 꺼낸다.
직원들이 또다시 수군거리고, 부장이 당황하며 눈을 크게 뜬다.
나는 과장을 노려보고 어이없다는 감정을 확 드러내며 말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모르는 줄 알았어? 팀장님 요거트 앵거 씨가 몰래 먹었잖아.”
“그건 팀장님이 먹으라고 주신 겁니다.”
“그게 말이 돼? 먹다가 들켜서 그냥 그런 거로 해 주신 거지.”
“와, 간식 훔쳐먹기까지 했어요?”
“야! 앵거!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설마 네가 지금까지 간식 훔쳐먹은 거야? 너 때문에 내가 팀장한테 욕먹었던 거잖아!”
기회라고 생각한 듯한 부장이 갑자기 내 책상을 손바닥으로 탕 하고 내려치고는 직원들 모두에게 들으라는 것처럼 자신이 지금까지 훔쳐먹었던 간식들을 내가 훔쳐먹은 거로 뒤집어씌우며 말했다.
“냉장고에 있는 게 누구 건지 모르겠으면 먹질 말아야 할 것 아냐! 내가 괜히 오해받아서 지금까지 욕먹었네! 누군지 몰라도 직원들 중 누군가겠지 하고 넓은 마음으로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었는데, 그게 직원들 여럿이 아니라 앵거 혼자서만 그랬던 거다 이거지!”
“그것뿐이 아니라 자기가 일 못 해서 팀장님까지 야근 시키질 않나, 일 똑바로 하지도 않으면서 자존심만 강해서….”
“어우…진짜, 개발자면 다야? 아무리 그래도 저러지는 않는다.”
“진짜, 과장님이 개발은 더 잘하는데…할 줄 아는 것도 별로 없으면서, 무슨 저급언어? 한다고 과장님이 말하시던데….”
직원들과 과장, 부장 모두에게서 나를 향한 비웃음과 욕설 아닌 욕설이 들려온다.
점점 머리가 어질어질해진다.
나는 아무 말도 없이 눈을 가만히 뜨고 부장과 과장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에 직원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아 몰랐던 거지만, 지금 보니 과장의 눈빛이 어딘가 이상하다.
직원들의 눈빛도, 부장의 눈빛도 어딘가 망가진 것처럼 흐릿해져 있다.
나를 보면서도 내가 아닌 무언가를 보고 있는 것처럼 초점이 잘 맞질 않는다.
“야! 앵거! 똑바로 안 해!”
“앵거 씨, 이따구로 할 거면 왜 일해?”
“진짜, 월급 도둑 아냐 저건?”
“팀장님이 봐주니까 자기 세상인 줄 아는 거지, 사람이 착한걸 이용하려고….”
그레이프가 없는 사무실에서 나를 향한 집단 따돌림이 계속된다.
그레이프가 강간하지 않도록 막아주고 있던 사무실이, 그레이프가 사라지자 나를 괴롭히는 사람들로 난장판이 되어버렸다.
사무실이 그레이프를 막아주고 있는 것처럼, 그레이프도 사무실을 막아주고 있었다.
“앵거! 대답 안 해!”
“팀장님이 계속 좋게 봐주시고 감싸주니까 아주 기가 살았네?”
“요즘 시대가 옛날도 아니고…개발자여도 최소한의 소통이랑 예의는 있어야 하는 거 아냐?”
“저건 그냥 자기 실력 자신이 있어서 그러는 것도 아니고, 그냥 팀장님 착하니까 저러는 거지.”
“인성 진짜 더럽다.”
나는 직원들로부터 지속적인 악평을 들으며 점점 한가지 생각이 머릿속에 선명해졌다.
이미 래피드의 머리카락을 채취하는 것만으로 자금 확보가 가능해진 내가 회사에 계속 다니고 있던 건 그레이프와 좀 더 친해지기 위해서였다.
팀장 그레이프보다도 상위권 마법소녀 그레이프와 친해지며 상위권에게 최면을 거는 방법을 연구하고, 위급상황이 생길 시 나를 보호하게 하기 위해서…회사에 계속 머무르고 있었다.
그레이프에게 건 최면은 이미 어딘가 잘못되어서 치명적인 오류를 발생시켰다.
회사 직원들은 그레이프를 힘들게 하고 그레이프가 감싸준다며 나를 안 좋게 보고 있다.
직원들에게는 최면이 통하지 않는다.
회사에 다닐수록 그레이프와 부딪치는 일이 많아질 테고, 그럴수록 직원들은 나를 더욱 안 좋게 볼 것이다.
그레이프에게 최면을 걸며 문제가 생기게 되면 아마 이 괴롭힘은 더 심해질 테고, 나는 회사 사람들이 그레이프와 나의 관계를 이상하게 보지 않게끔 더욱 많은 생각을 하며 최면을 걸어야 한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이렇게까지 고민해야 하는 문제들일까?
단 하나만 포기하면, 전부 한순간에 해결할 수 있다.
그레이프와 가까워지는 걸 포기하면, 지금 당장 회사를 관둘 수 있다.
그레이프와 가까워져서 회사 생활을 좀 더 편하게 하고, 다니기 편해진 회사에 다니며 그레이프와 가까운 사이가 되는 게 내 목표였다.
그렇게 친해진 나를 보호해주길 원했지만, 그레이프는 나를 강간해버렸다.
그레이프는 위험하다.
가까이 지내서 좋을 것이 없다.
역시나…마법소녀는 나를 보호하기보다는, 해를 끼치는 존재다….
머리가 조여오는 느낌이 들며, 두통이 생긴다.
물건이 고장 났을 때 고장을 해결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어디가 고장 났는지 잘 확인해보고 수리법을 공부해 고쳐보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망가진 걸 버리고 새 걸 사는 것이다.
괜히 지금까지 최면을 걸어온 게 아까워서 그레이프를 붙잡고 있을 필요는 없다.
이미 나를 강간하기까지 한 걸 봤을 때 그레이프에게 건 최면이 어딘가가 어긋나 있는 건 틀림없으니, 버리고 새 마법소녀를 구하면 된다.
그레이프는 포기한다.
이것으로 머리 아픈 고민은 끝이다.
“…뭐야?”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생각을 정리하고 모니터 앞에 앉아 미리 작성해둔 사직서를 출력했다.
그 광경을 내 바로 뒤에서 두 눈으로 확인한 과장은 황당한 목소리를 냈다.
나는 과장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사직서를 전부 뽑은 뒤 컴퓨터를 가만히 켜두고 자리를 정리하며 일어났다.
곧바로 인쇄기 앞에 가 사직서를 손으로 구기며 집어 든 나는 구겨진 사직서를 들고 부장의 자리로 가 책상에 던져놓으며 말했다.
“관둘게요. 그럼.”
“…뭐?”
과장과 부장은 내가 냉정하게 관둔다고 하고 일어나자 한순간 당황한 모습을 보였지만, 곧바로 인상을 쓰며 거친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야! 지금 이게 뭐하는 짓이야! 장난해!”
“앵거 씨, 지금 뭐 하는 거야?”
“진짜 가지가지 한다, 조금 잘못 지적당하니까 관두는 거야?”
“관두면 뭐 무서워할 줄 아나? 팀장님도 저 인간 관두면 좋아하겠네. 잘됐다!”
퇴사를 한다고 생각하자 머릿속이 갑자기 가벼워진다.
지금까지 내게 스트레스를 주던 말들도 가볍게 무시해 버릴 수 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사무실 문으로 나가며 버릇처럼 퇴근 지문을 찍으려다가 손을 내려놨다.
퇴근이 아니니 이런 걸 찍을 필요는 없다.
“뭐 믿는 거라도 있나 봐? 지금이 옛날인 줄 알아?! 개발자여도 이 회사 나가면 부르는 곳 없어!”
“잔디 머리 아저씨는 그렇겠지.”
“잔디…? 너 지금 뭐라고 그랬어!”
“요즘 것들은 근성이 없어서! 이래놓고 내일 또 죄송합니다 하고 돌아오면 넌 죽는다? 니가 여기 나오면 갈 곳 있을 것 같아? A 시에 계속 머무르려면….”
퇴사하는 것만으로 최근에 있었던 모든 스트레스를 던져버리고 자유의 기분에 젖은 나는 과장과 부장에게 지금까지 못다 한 반말을 하며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나갔다.
두 사람은 갑자기 퇴사한다는 내가 황당했는지 사무실 문을 열고 큰소리로 소리를 질러댔다.
“진짜 책임감 없는 짓 끝까지 하네!”
“야! 앵거! 너 지금 이따구로 나가면 퇴직금이라도 있을 것 같아?”
“더러워서 안 받아. 있으면 문어 아저씨 맘대로 횡령하시던가.”
“뭐? 문어?! 이 새끼가!”
갑자기 사무실 문에서 뛰어오는 문어 부장에게 얻어맞고 싶지는 않았던 나는 곧바로 엘리베이터의 닫기 버튼을 연타해 문을 닫아버렸다.
다행히 부장의 손보다도 문이 먼저 닫혀 혼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안전하게 내려갈 수 있게 되었다.
“휴우~”
혼자서 엘리베이터에 탄 나는 머릿속이 점점 개운해지는 걸 느꼈다.
이제 그레이프 때문에 고민할 필요도 없고 회사 일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을 일도 없다.
진작 이랬어야 했다.
이왕 포기할 거 좀 더 일찍 그레이프를 포기했다면 강간당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레이프가 없는 사이 일어난 괴롭힘에 조금 충동적이게 저질러 버렸지만, 어차피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기도 하다.
후회는 하지 않는다.
한번 마음먹고 나니 행동에 망설임이 사라진다.
퇴사했으니까, 오늘은 집에 가서 쉬어야겠다.
안 그래도 너무 강간당해서 허리도 아프고 근육통도 몸 구석구석에 있어 움직이는 데에 지장은 없지만 묘하게 뻐근한 느낌이 거슬린다.
“아….”
“앗….”
그대로 퇴사해 집에 돌아가려던 나는 1층에서 그레이프와 우연히 마주쳤다.
그레이프는 손에 내가 단맛의 음료가 잔뜩 든 봉투를 들고는 엘리베이터에서 나온 나를 보고 깜짝 놀라더니 젖어있는 눈가를 손으로 비비며 당황한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걸었다.
“애, 앵거 씨…어디, 밖에 볼일 있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