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법소녀 최면물-110화 (110/299)

< 110화 > G rape (8)

나는 그레이프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며 조금이나마 안도했다.

내게 피해를 끼친 마법소녀가 괴로워하고 있다는 점이 마음을 안정시킨다.

그레이프의 절망을 느끼며 나는 안락함에 빠져 서서히 진정해갔다.

다른 직원들이 식사를 마치고 돌아오자 그레이프는 눈가를 비비고는 웃는 얼굴로 일어나 탕비실로 들어갔다.

잠시 후 커피를 손에 들고나온 그레이프는 떨리는 목소리로 다른 직원들에게 식사를 잘 했냐고 인사하며, 내 쪽을 힐끔거리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나는 그레이프가 내 쪽을 힐끔거릴 때마다 흠칫 놀라며 시선을 피했고, 그레이프는 그런 내 모습을 보며 비튼 입가를 부르르 떨었다.

다시 업무시간이 되고 조용해졌을 무렵 나는 점점 냉정해져 가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사람들이 많아지고 그레이프가 나를 함부로 공격하거나 피해를 줄 수 없는 환경이 조성되고 나자 머릿속이 점점 차분해진다.

공포감과 위기감에서 벗어난 나는 그레이프에게 대체 뭐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에 빠졌다.

왜 그레이프가 나를 강간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런 이상행동이 나오게 된 원인은 고민할 것도 없이 최면이 틀림없다.

문제는 어떤 최면이 어떤 과정을 통해 그레이프에게 어떠한 자극을 가해서 나를 강간하는 결과를 산출해냈느냐 하는 것이었다.

문제가 되었을 것이라 예상되는 건 야근했을 때와 엘리베이터에 탑승했을 때 건 최면들이다.

내가 야한 눈으로 보면 호감을 느낀다거나, 야한 눈으로 보는 걸 당연하게 여긴다는 최면은 아무 문제가 없다.

나를 보면 야한 상상을 하는 최면은…뭔가 영향을 끼쳤을 것 같기는 하지만 그건 이미 내 의도와 다른 이상한 반응이 일어나는 걸 확인하고 확실히 취소해 뒀다.

천천히 생각해 봐도 잘 모르겠다.

모르겠다.

왜 그레이프가 나를 강간한 거지?

나를 보면 야한 생각을 하게 된다는 최면을 제외하면 문제가 될만한 최면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정말 그나마, 조금이나마 영향을 끼쳤을까 싶은 건 나를 생각하며 자위하면 절정하지 못하게 해 둔 최면이다.

나를 보면 야한 생각이 들게 하고, 나를 상상하며 자위하면 절정하지 못하게 해 뒀었으니…그레이프는 나를 상상해서 야한 생각이 들고, 야한 상상이 들어 자위하고, 자위하면 절정하지 못하고 하는 일이 반복되었을 것이다.

아마 처음 이상 현상을 보인 건 이 때문이겠지.

그래서 엘리베이터에 탔을 때 최면을 수정했다.

그랬는데, 왜 이렇게 된 거지?

내가 건 최면은 자위로 절정하지 못하는 최면이 아니라 나를 상상하며 자위하면 절정하지 못하는 최면이다.

나를 대상으로 야한 상상을 하는 최면은 이미 풀어줬으니, 문제가 되지 않아야 옳다.

혹시 로제처럼 최면을 취소하고 나서도 흔적이 남아서 그레이프에게 계속해서 나를 대상으로 야한 상상을 하게 한 건가?

조금이라도 나를 대상으로 한 상상을 하면 절정하지 못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절정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해서 강간하는 게 말이나 되는 일일까?

그레이프는 평범한 사람도 아니고 범죄자도 아니다.

정의로운 마법소녀가 자위하면서 절정 좀 못했다고 사람을 강간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답이 나오지 않지만…그나마 조금 마음에 걸리기라도 하는 건 역시 나를 상상하며 자위할 때 절정하지 못하게 해둔 최면이다.

내게 피해를 주지 못하게 해뒀는데 이번에도 내 허리가 박살 나도록 찍어대 내 몸을 이렇게 만들었다는 것도 마음에 걸린다.

강간하는 건 내게 피해를 준 게 아니라고 생각하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기존에 걸어둔 다른 최면이 또 마음에 걸린다.

나를 강간한 것에 죄책감을 느끼게 해 뒀는데…어떻게 또 강간할 수 있지?

강간을 하는 행위 자체에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지만, 강간을 했다는 과거가 되면 죄책감을 느끼게 되는 건가?

지금 괴로워하는 건 그렇다면 최면이 제대로 걸려있기 때문에 괴로워하는 거라고 봐야 하는 걸까.

어렵다.

최면에 걸린 듯, 최면대로 행동하는 듯하면서도 제대로 되는 게 없다.

래피드는 처음부터 계획해 천천히 유도해가고 최면을 쌓아올리고 있지만, 그레이프는 실험대처럼 최면을 걸어온 만큼 내가 모르는 사이 어딘가 망가져 있을지도 모른다.

어디가 망가져 있는지, 어디부터 최면이 걸리고 있는지, 어디부터 안 걸리고 있는지 모르겠다.

역시 상위권 마법소녀는 위험하다….

“애, 앵거 씨….”

“흣?!”

고민에 빠져있는 그때, 그레이프가 갑자기 내 등 뒤에서 조금 떨어져서 말을 걸었다.

나는 깜짝 놀라 숨을 집어삼키고 그레이프에게서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껴 조금 거리를 벌렸다.

그레이프는 내게 먼저 말을 걸었다가 반응을 보고 입을 다물더니 조심히 앞으로 다가와 부하 직원처럼 내 책상에 일하는 데 필요한 문서를 올려놓아 줬다.

“이…일 화이팅…하세요. 혹시, 그…어려운 뭔가 있으시면 말…해주시고…그리고….”

“일하겠습니다.”

“…네.”

평소에는 하지도 않는 말을 길게 하는 그레이프의 모습에 단호하게 말을 자른 나는 등을 돌리고 돌아서며 다시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레이프는 그 뒤로 잠시 내 등 뒤에 서 있더니 본인의 자리에 돌아가 앉아있다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내 자리 근처로 걸어왔다.

나는 그레이프가 가까워지자 흠칫 놀라며 몸을 살짝 피했고, 그레이프는 그런 내 모습을 보며 울상을 짓고는 그대로 걸어가 사무실 문을 열며 직원들에게 말했다.

“자, 잠시…흑! 저 본사에 연락 좀 하고 올게요…! 급한 일 있으시면 메시지 남겨주세요.”

그레이프가 사무실 밖으로 나가는 걸 확인한 나는 잠시 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안 그래도 같은 장소에 있는 것 자체가 오싹해지고 있었는데…그레이프가 나가며 살만해졌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레이프는 정의로운 마법소녀니, 이런 곳에서 나를 강간할 수는 없다.

나는 회사로 도망쳐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다시 고민에 빠져들었다.

그레이프가 왜 나를 강간한 건지는 모르겠다.

상위권 마법소녀는 최면에 얼마나 저항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지금은 알 수 있는 게 없다.

일단 회사에 와서 그레이프가 나를 강간하지 못하는 건 좋지만…회사에서 퇴근하면 또다시 강간당하는 건 아닐까?

나를 또다시 강간하지 못하게 그레이프에게 뭔가 최면을 걸기는 해야 하는데, 어떡해야 좋을까.

회사는 현재 내게 있어 그레이프에게 강간당하지 않는 방어벽이 되는 장소이기도 했지만, 냉정히 생각해 볼 때 계속 있어서 좋은 장소는 아니었다.

일하는 환경이 엄청 좋은 것도 아니고, 래피드의 머리카락이라는 수입원도 생겼고….

직원 대우가 좋은 것도 아니고, 팀장인 그레이프가 잘 대해줘서 참고 다니고 있었지만…그레이프는 팀장이 아닌 강간범이 되어버렸다.

그레이프에게 최면을 걸 때도 회사를 생각해서 더 조심히 걸어야만 한다.

최면에 걸린 그레이프는 내게 반응하며 최면대로의 행동을 보인다.

그 반응이 그레이프 본인, 회사 사람들에게 이상하게 보이게 되면 위화감을 느끼게 될 위험이 크다.

그레이프에게 건 최면의 반응 대상인 내가 그레이프와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기 때문이다.

최면에 걸리지 않는 일반인들인 회사 직원들이 볼 때 그레이프가 큰 변화를 보이면 당연하게도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느낄 것이고, 그에 따라 그레이프가 연쇄적으로 위화감을 느낄 가능성도 크다.

문제가 점점 복잡해지며 머리가 아파져 온다.

어떤 최면을 걸어야 할지, 어떡해야 그레이프가 위화감을 느끼지 않을지, 어찌해야 내 의도대로 행동하게 될지,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되었는지, 그레이프에게 건 최면이 왜 이런 결과가 나오게 변한 건지…모르겠다.

프로그래밍처럼 코드를 뜯어볼 수 있는 거였다면 그레이프가 왜 이런 오류를 일으켰는지 뜯어보기라도 할 텐데….

잘못 쓴 코드를 지울 수도 없고 오류가 나면 오류가 난 걸 상쇄하는 코드를 써야 하면서 왜 오류가 났는지는 확인할 수 없는 이상한 코딩을 하는 기분이다.

나는 일단 지금 답이 나오지 않는 의문이나 문제들은 덮어두고, 가장 먼저 해야 할 고민부터 하기 시작했다.

가장 큰 문제는 그레이프가 내 의도와 다른 결과를 보여줬다는 것이다.

이 얘기는, 내가 그레이프의 행동을 정확하게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이며 내가 건 최면이 내가 의도한 방향대로 강력하게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결국, 그레이프가 나를 강간한 것도 나의 최면에 대한 지식이 부족해서 생긴 문제다.

제대로 최면을 걸었다면, 내 의도대로 정확하게 행동하게끔 했다면 이런 일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2동 박사와 최면술사의 글을 좀 더 읽어보며 공부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지금 당장 필요한 고민부터 머릿속에서 정리해갔다.

왜 내 의도와는 다른 행동을 했고, 어째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걸까.

의도와 다른 방향으로 가는 걸 막으려면 어떡해야 할까.

어떡하면 그레이프를, 상위권 마법소녀를 내 의도대로 움직이게끔 최면을 걸 수 있을까.

최면을 더 강력하게 거는 방법이 뭘까.

조건을 걸 때 좀 더 상황을 제한하는 건 어떨까?

프로그램을 짤 때도 수치나 값, 상황을 제대로 해 주지 않으면 때때로 코드가 상황을 벗어나는 일이 있다.

최면의 상황을 깔끔하게 제한해 두면 오버플로우가 일어나는 걸 막는 것처럼 오류가 일어나는 걸 막을 수 있지 않을까?

좀 더 세세한 상황으로 제한한다면…최면을 말 그대로 쌓아올려서 좀 더 두껍게 한다면 괜찮지 않을까?

“앵거 씨.”

생각에 빠져있던 나는 갑자기 들려온 과장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며 정신을 차렸다.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온 과장은 그레이프가 내 책상에 올려둔 문서들을 손에 집어 들고 살펴보고 있었다.

그런데 뭔가 용무가 있어서 찾아온 것처럼 보였던 과장은 갑자기 주변을 둘러보고는 문서로 내 어깨를 툭툭 치기 시작했다.

“내가 진짜 이런 말을 하기 싫은데…회사 모두를 대표해서 말할게, 뭐 하는 거야?”

“네?”

“팀장님이 왜 저러시는지 몰라? 장난해?”

“…예?”

나는 갑자기 찾아온 과장의 말을 듣고 깜짝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

그레이프가 왜 저러는지 모르냐니, 대체 무슨 얘기지?

“적당히 해야 할 거 아냐, 앵거 씨…회사가 장난이야?”

“갑자기…무슨 말이신가요?”

“와…진짜 갑갑해 죽겠네, 앵거 씨…팀장님이 착해서 일하기 편하고 좋지? 일 못 한다고 신경 써 주니까 아주 일하기 편하지?”

과장은 입꼬리를 비틀고 점점 나를 비웃으며 희열이 담긴 눈으로 내려다봤다.

과장에게서 쾌감에 가까운 묘한 감정이 느껴진다.

“좀 이정도 해 주면 앵거 씨도 좀 제대로 일 좀 하지? 진짜 너무하다는 생각 안 해?”

“뭐가…말씀이시죠? 너무하다뇨?”

“와, 정말…지금 모르는 척하는 거야? 회사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데?”

정말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아 묻자 과장은 연극을 하는 것처럼 과장된 몸놀림으로 손에 든 문서를 팔락거리며 두 팔을 뻗었다.

직원 모두에게 보라는 듯 몸짓을 크게 하며 목소리를 크게 키운다.

“팀장님이! 일도 못 하고 제대로 하는 것도 없는 앵거 씨 감싸주려고 얼마나 열심히 했는데!”

“네?”

“팀 전체를 다 이끌어 가려고, 사이좋게 가려고 하는데 왜 앵거 씨는 매번 그렇게 분위기를 망치고 일도 똑바로 안 하는 거야? 이 문서 뭐야 지금?”

“과장님…?”

“얼마 전에 팀장님이 일 조금 많이 하고 빨리하자는 말 못 들었어? 그런데 팀장님이 앵거 씨가 가져갈 자료까지 이렇게 가져다 바치고…이게 말이 돼? 앵거 씨가 일을 똑바로, 빠르게 안 하니까 이렇게 답답해하시는 거 아냐!”

과장은 그레이프가 가져다준 문서로 내 책상을 내려치며 말하고는 주변 직원들을 쓱 둘러봤다.

그러자 직원들로부터 미리 정해둔 것처럼 나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와…진짜 적당히 좀 하지.”

“팀장님 착하다고 맨날 저러고 말야, 무슨 일하는 곳이 놀이터인 줄 아나?”

“제대로 하는 일도 없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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