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법소녀 최면물-100화 (100/299)

< 100화 > 준비 (8)

“으응? 아가씨 친구였어?”

“앗, 아저씨….”

잠시동안 대화가 이어지고 래피드의 표정이 점점 밝아지며 경계심이 흐려질 때쯤 안쪽에서 주인아저씨가 내 케이크를 들고 걸어 나왔다.

래피드는 친구라는 말에 대답하기 곤란한지 입을 다물었고, 나는 주인아저씨에게서 케이크를 받으며 대답했다.

“친구라기보다는, 구해진 쪽입니다.”

“오? 그러면 아가씨가 아니라 내 친구셨구먼?”

주인아저씨는 웃는 얼굴로 의족이 달린 발을 들어 올려 보였다.

말투도, 표정도 조금 전과는 다르게 완전히 변해 나를 좀 더 친밀하게 대하는 게 느껴진다.

구해진 쪽이라는 말에서 동질감을 느끼는 건가.

“흐음…그런데 조금 이상하네, 이런 얘기는 못 들었는데.”

가만히 웃고 있던 아저씨는 갑자기 뭔가 이상하다는 듯 말하더니 나를 가만히 보다가 다시 웃으며 내 어깨를 두들겼다.

아프다.

“뭐, 사람이 조금 음침해 보이긴 하지만, 나쁜 사람 같지는 않네.”

“음침해 보인다니…윽, 윽….”

“나쁜 사람이었으면 이렇게 얌전할 리 없으니 말야, 그러면…블루베리 타르트였지? 조금 더 기다리면 가져다줄게.”

내 어깨를 아프게 두드리던 아저씨는 말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다시 주방으로 들어가버렸다.

빵을 만드는 사람이어서 그런지 손이 상당히 무겁다.

묵직한 느낌이 어깨에서 사라지질 않는다.

래피드에게 가까이 있는 모습을 들키면 경계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경계심이 얕다.

구조된 쪽이라는 말이 잘 통했던 건가?

래피드는 아저씨의 말을 듣고 뭔가 멍한 듯 가만히 내 쪽을 바라보다가 케이크를 한 번 더 잘라 먹었다.

“치, 친구인 줄 아셨나 보네요.”

“너무 즐겁게 얘기하고 있었나 봐요. 뭐…저야 기분 좋죠, 래피드 씨랑 친구 취급당하면.”

“…케이크 얘기를 이렇게 막 해본 건 처음이라서 제가 너무 신났나 봐요.”

나는 래피드의 말을 듣자마자 이거다 싶어 곧바로 크레이프 케이크를 조금 잘라 먹으며 대답했다.

“좀 특이하죠? 남자가 케이크를 좋아하고.”

‘조금 특이하죠? 남자가 꽃을 좋아하고.’

이 대사는 래피드가 구매한 로맨스 소설책들 중 한 권에서 나오는 대사다.

래피드는 내 말을 듣고 깜짝 놀라더니 손사래를 치며 대답했다.

“아뇨, 전혀…좋아할 수도 있죠!”

“제가 남자 치고 조금 취미가 특이하긴 해서, 케이크 좋아하고, 책도…이런 거 읽어서 다른 사람들한테 놀림 받기도 하고 그래요.”

“이런 거라뇨? 이거 얼마나 재미있는데요!”

로맨스 소설책의 제목을 보여주며 말하자 래피드는 곧바로 눈을 빛내며 얼굴을 내밀었다.

긴 속눈썹이 살짝 흔들리고 초롱초롱한 눈이 내 눈에 마주친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어오르고, 머리가 몽롱해진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래피드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 읽어 보셨나 봐요…?”

“네! 좋아하는 소설책 중 하나에요. 굉장히 로맨틱하고…특히 남주인공이 평범하다고 말은 하지만 좋아하는 마음만큼은 누구한테도 지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평범하지 않다는 게….”

“유명한 가수인 여주인공만 보는 게 아니라 가수인 모습과 본인 전부를 봐 주는 점이 말이죠?”

“맞아요!”

래피드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내 말에 공감하며 화제가 이어진다.

나는 최대한 웃는 얼굴을 유지하려고 하며 머릿속으로 열심히 소설책의 내용을 떠올렸다.

읽어본 것 중 그나마 제일 읽을 만하다 싶어 가져온 건데, 래피드가 좋아하는 소설책이 이 책일 줄은 몰랐다.

“가수의 모습이라는 게 사실 본래의 모습과는 조금 다를 수밖에 없잖아요?”

“그렇죠, 가수로서 만나는 다른 화려한 사람들보다 평범하고 우연히 만난 남주인공이랑 사랑에 빠지는 묘사가 좋더라고요.”

“우연히도 여주인공이 좋아하는 향을 남주인공도 좋아해서 향수로 쓰는 것 때문에 여주인공이 살짝 이끌리는 장면도 무척…?”

래피드는 말을 하다 말고 멈추더니, 갑자기 눈을 크게 뜨고 코를 움찔거렸다.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민감한 반응이다.

나는 래피드의 행동을 눈치채지 못한 척하며 향수를 뿌린 곳이 좀 더 잘 드러나게 옷깃을 펼쳤다.

지금 래피드와 대화하는 중심 화제인 ‘절벽 위의 꽃’ 이라는 소설책의 중심적인 내용을 떠올리며 무표정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다.

달콤하고, 여주인공이 좋아하는 냄새를 풍기는 남자 주인공.

분명 우연한 만남인데도 차례차례 느껴지는 운명적인 느낌.

가수인 자신을 좋아하지만, 무척 좋아하기 때문에 오히려 팬심을 참고 평범한 사람처럼 대해주려고 노력하는 남자주인공의 모습에 점점 이끌림을 느끼는 여주인공.

대화 하나하나가 평범해 보이지만 자신이 좋아할 수 있는, 비일상에서 일상으로 돌아오는 화젯거리.

사소한 행복, 같이 먹는 음식이나 대화에서 느끼는 공통된 화제와 공감.

확신이라고 느낄 정도로 큰 감각을 느끼기 전부터 이어지는 운명의 상대라는 예감이 래피드가 좋아하는 로맨스 소설의 중심 소재다.

“뭔가…조금 묘한 느낌이네요. 사실 저 래피드 씨 팬이거든요.”

“네? 패, 팬 말이죠…?”

“예전에는 방위군 준비하려고 하기도 했고, 저한테는 재능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포기했지만요.”

래피드가 보는 로맨스 소설 안에서 남주인공은 원래 음악 쪽에서 일하려고 해보다가 재능의 한계를 느껴서 포기하게 된다.

여주인공은 자신과 비슷한 일을 좋아한다는 모습에서도 공통점을 느껴 점점 이끌린다.

“사람을 구해준다는 것도 멋있고, 그…무척 예쁘니까, 죄송해요…흠흠, 저도 모르게…쉬고 있는데 이런 얘기를 꺼내는 게 아니었네요.”

“아, 아니에요….”

“손님, 블루베리 타르트.”

“아, 타르트 나왔네요.”

여주인공이 부르는 노래를 들으며 매일매일 치유를 받는 남주인공을 생각하며, 래피드의 존재 자체가 언제나 내게 도움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부각시킨다.

래피드는 어딘가 묘한 느낌이 느껴지는지 나를 바라보는 두 눈을 계속해서 깜빡거렸다.

주인아저씨가 타르트를 가져오자마자 나는 더 얘기가 길어지기 전에 크레이프 케이크를 빠르게 먹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무 오래 대화하는 건 오히려 안 좋을 수도 있다.

“저는 그럼 이만 가볼게요. 생각해 보니 그러네요, 래피드 씨는 쉬고 있는 건데 괜히…그냥 인사하고 싶었어요, 늘 도움이 되고 있다고.”

“앗, 네….”

소설책에서 나온 대로 여주인공을 배려해주는 남주인공의 모습을 떠올리면서도 어디까지나 래피드를 생각해 자리를 떠난다는 말을 잊지 않는다.

래피드가 좋아하는 로맨스 소설책에서 나오는 모든 첫 만남은 지금처럼, 우연하지만 어딘가 빠르게 스쳐 지나가듯 이루어진다.

나는 자리를 깔끔하게 정리해 케이크를 먹고 난 그릇을 주인아저씨에게 건네주며 계산을 마치고 블루베리 타르트가 포장된 상자를 가방에 잘 넣은 뒤 래피드의 앞으로 다시 되돌아왔다.

“아…이건, 조금 욕심인데…혹시 악수 한 번만 할 수 없을까요?”

“악수요?”

“팬…이라서.”

“앗, 네에.”

로맨스 소설 안에서 결국 팬심을 이기지 못하고 여주인공에게 근처 카페에서 사 마셨던 영수증을 내밀어 사인을 부탁하는 남주인공의 모습을 떠올리며 래피드에게 악수를 부탁한다.

내가 계획한 건 지금 이 순간이 핵심이다.

나는 래피드가 머뭇거리며 내민 손을 갑자기 꽉 잡으며 흔들었다.

“응?! 후으읏….”

단지 손을 잡힌 것뿐인데 반응이 상당하다.

그럴 수밖에 없다, 지금 래피드에게 있어 이 손은 보지와 다름없는 상태다.

나는 래피드의 손을 꽉 잡고 살짝 힘을 풀었다가 다시 잡아주며 흔들었다.

“후엑?! 히익! 읏!”

“아, 아가씨…?”

그저 악수할 뿐인데 래피드의 얼굴이 점점 엉망이 된다.

래피드가 갑자기 고개를 젖히며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벌리면서 표정이 이상하게 풀려버리는 걸 본 주인아저씨는 래피드의 상태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지 카운터에서 다급하게 뛰쳐나왔다.

이 정도로 할까.

나는 래피드의 손을 놓아주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인사했다.

“그러면 저는 먼저 가 볼게요.”

“헤엑…헤엑? 헤에? 네? 앗, 아…?”

“여기 자주 오니까 다음에 또 봐요.”

“네에? 네…? 어?”

얼굴을 상기시키고 숨을 헐떡이던 래피드는 방금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혼란스러워하며 손을 쥐었다 폈다 하기를 반복하고 있다.

그래 봤자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 리가 없다. 나와 손을 잡았을 때만 손이 보지처럼 변하는 최면이니까.

생각보다 반응이 조금 더 강하지만, 오히려 좋다.

래피드가 읽는 대부분의 로맨스 소설에서 공통되어 나오는 내용 중 하나가 처음으로 몸이 접촉한 순간 느껴지는 기분 좋은 감각과 빠른 심장 소리다.

정신보다도 육체가 먼저 상대를 의식하며 흥분하고, 감각이 예민해지는 장면이 흔하게 나온다.

사랑의 예감, 연애의 예감, 운명의 예감.

래피드가 늘 읽는 로맨스 소설에서 배워왔을 감각을 최면으로 느끼게 해 준다.

나는 곧바로 혼란스러워하는 래피드를 뒤로 하고 가게를 나왔다.

래피드의 반응을 보니 보지가 상당히 예민한 쪽인 것 같다.

아니면 상상도 할 수 없는 감각이어서 당황한 걸지도 모르겠다.

보지가 손에 있어 꽉 쥐어지며 흔들린다는 건 대체 무슨 느낌일까?

첫 번째 최면은 계획대로, 아니 계획 이상으로 잘 되었다.

케이크 가게에서 나오기는 했지만, 당연히 아직 돌아갈 생각은 없다.

우연한 만남이라는 건 원래 연속으로 겹치는 게 좋다.

우연이 연속된다면 그건 운명이다.

래피드가 좋아하는 로맨스 소설에도 나오는 말이다.

내가 손에 들고 있는 로맨스 소설에서도 여주인공과 헤어진 남자주인공이 얼마 되지 않아 꽃집에서 마주해 서로 좋아하는 꽃이 같다는 걸 알게 되고 화제를 이어가는 장면이 나온다.

그 상황에서 여주인공은 점점 평범한 남자주인공과 대화를 나누는 게 즐겁다는 걸 느끼다가, 꽃을 하나 선물해 주며 악수를 하는 순간 남자에게 큰 이끌림을 느낀다.

운명적 이끌림의 예감, 편안하고 기분 좋으면서도 짜릿한 감각이라고 서술되어있다.

나는 운명을 만들기 위해 최면어플의 추적기능으로 래피드의 위치를 체크하며 래피드가 다음에 갈 곳에서 먼저 기다렸다.

래피드는 케이크 가게에서 케이크를 먹은 뒤 언제나 서점에 들른다.

몇 번이고 동선체크를 하며 알아둔 사실이다.

서점에 먼저 도착한 뒤 래피드가 좋아하는 로맨스 소설책이 있는 코너 근처에서 기다린다.

물론 래피드의 위치는 계속해서 확인하고 있다.

여기까지는 계획대로, 계획 이상으로 잘 되고 있다.

특이한 취향이라고 생각하지만…전자책이 당연해진 시대에 래피드는 늘 서점에서 종이책을 구매하는 것을 고집하고 있다.

가끔 보면 책을 들어 책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으며 행복해하기도 하던데…책 냄새를 좋아하는 것 같다.

생각해보니 이 서점의 존재 자체가 조금 신기하긴 하다.

다른 구역에는 이제 더 이상 서점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를 않는다.

옛날 서적을 취급하는 중고 책 매장은 있지만, 아직도 서점이라는 간판으로 신간을 들여와 판매하는 서점은…아마도 지금 내가 있는 이 4번 구역 서점이 유일하다.

이제는 사라져 가는 문화다.

그런데도 이 서점에 있는 책들은 무척이나 깨끗하고, 신간도 계속해서 나오고 있었다.

그 사실이 어쩐지 이질적이게 느껴진다.

전자책이 당연해진 시대인데, 어째서 책을 판매하는 걸까.

오래된 중고 책 매장도 기계가 점원을 대신해주는 시대인데, 다른 구역의 상가들도 기계 점원을 도입해 둔 상황인데….

4번 구역의 상가는 어쩐지 옛날의 거리, 네거티브가 나타나기 전의 상가 같은 느낌을 준다.

그래서 래피드가 자주 찾아오는 걸까?

“후우우….”

길게 숨을 내쉬며 긴장감을 한번 풀어낸 뒤, 래피드가 좋아할 만한 소설을 책장에서 꺼내 점원 몰래 조금 높이 꽂아둔다.

전에 샀던 책들의 차기작, 비슷한 내용의 소설 중 몇 권을 나는 손에 닿지만 나보다 키가 작은 래피드는 손이 닿지 않는 높이에 아슬아슬하게 꽂아둔다.

비전넷에서 래피드의 취미는 독서로 알려져 있는데 래피드가 서점에 와서 있는 책들은 로맨스 소설뿐이다.

예전에 에스더의 방송에서 가끔 엄청 어려워 보이는 학술지를 읽는 래피드의 모습도 봤지만 그건 정말로 가끔이다.

어쩌면 그런 모습들은 전부 로맨스 소설만 읽는 게 부끄러워서 래피드가 꾸미거나 지어낸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래피드는 로맨스 소설을 좋아하니, 오늘도 이쪽으로 와서 책을 볼 게 분명하다.

준비를 마친 나는 적당히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내가 손에 들고 있는 책도 전자책으로만 나온 줄 알았는데, 이렇게 종이책으로 판매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은 못 했다.

잠시 책을 읽고 있자 케이크를 전부 먹은 래피드의 위치가 점점 서점에 가까워졌다.

나는 곧바로 최면어플의 추적기능을 사용하고 있던 비전폰을 주머니에 넣고 래피드가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앗, 아….”

서점으로 들어온 래피드는 책을 하나하나 꺼내보며 구매할 책을 고르기 시작했다.

역시나 곧바로 로맨스 소설책 코너에 와서 책들을 꺼내본다.

책을 하나하나 꺼내보던 래피드는 키가 닿지 않는 위치에 있는 책을 보고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며 커다란 가슴을 출렁거렸다.

바로 근처에서 책으로 얼굴을 조금 가리고 있던 나는 래피드의 귀여운 모습에 얼굴이 뜨거워지는 걸 느끼며 천천히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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