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화 > 준비 (7)
4번 구역 상가 사람들은 래피드를 숨겨주고 보호하는 것 같았으니, 길거리에서 최면을 걸다가 이상하다는 낌새를 눈치채지면 공격당할 수도 있다.
저녁 시간이 되면 찾아가는 언덕 위는 4번 상가 전체가 내려다보이는 장소다.
반대로 생각하자면, 누가 상가에서 언덕을 올려다보고 있을지 모른다.
동선을 체크하며 어디에서 최면을 걸면 좋을지 고민해봤지만, 이곳만큼 좋은 장소가 없다.
래피드에게 최면을 가장 걸기 좋은 장소, 걸 기회는 지금뿐이다.
래피드의 눈에서 초점이 사라지고, 손에 들고 있던 포크를 떨어뜨린다.
나는 빠르게 손을 내밀어 포크를 잡은 뒤 접시 위에 조심히 올려놨다.
최면을 거는 것까지는 성공했다.
비전넷에서 봐둔 후기대로 가게 안에는 주변의 대화 소리가 잘 안 들려오는 정도의 음악이 계속해서 흘러나오고 있어 내가 래피드에게 최면을 걸며 하는 말소리가 들릴 염려는 없어 보인다.
래피드가 앉아있는 자리는 내가 몸으로 슬쩍 가리기만 하면 가게 어느 곳에서도 래피드의 모습을 볼 수 없게 되는 구석 자리다.
여기까지는 계획대로 실행했다.
아마도 가게 주인은 크레이프 케이크를 만든 뒤 타르트는 좀 더 걸린다며 크레이프 케이크를 먼저 가져와 줄 것이다.
시간이 그렇게 많지는 않다.
나는 래피드를 내려다보며, 소설책을 펼쳐 안에 적어둔 명령문을 확인했다.
긴장감에 혹시라도 최면을 걸 내용을 잊어버릴까 봐 메모해 둔 내용이다.
다른 사람에게 들리지 않게, 주변에서 너무 이상해 보이지 않게 태도를 조심하며 작은 목소리로 명령을 하나하나 읽는다.
“래피드는 내게 피해를 주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
첫 번째로 가장 중요한 안전장치부터 시작한다.
아르나에게 뺨을 맞았던 걸 기억하며, 공격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닌 피해를 줄 수 없다는 최면을 건다.
“나와 대화할수록 이성적인 호감을 느낀다.”
나를 좋아한다거나, 내게 호감을 가진다는 최면은 위험할 수 있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기존의 기억과 위화감을 느끼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상위권 마법소녀는 중위권 마법소녀보다 저항력이 훨씬 강하다.
애쉬가 나오는 영상을 봤을 때, 래피드는 최면에서 풀려나 자신의 행동 자체에 위화감을 느끼는 모습을 보였다.
영상의 진실성 여부는 둘째치고, 그 모습만으로도 조심해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중요한 건 위화감이다.
그레이프에게 최면을 걸 때도 조심하는 것이지만, 최면을 걸 때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위화감이 느껴지면 자신의 행동이 이상하다는 걸 눈치채게 되고, 저항력이 점점 커질 가능성이 크다.
해결책은 하나다.
만약 최면에서 풀려나더라도 최면에 걸려 있던 자신의 행동이 전혀 이상하지 않게 느껴지게끔, 최면을 걸어 행동을 강제하는 게 아니라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조금씩 유도하면 된다.
“나와 대화할 때 마음이 편안해지고, 비밀을 공유하고 싶어지며, 더욱 친해지고 싶어진다.”
애쉬에게 만약 래피드와 섹스했다는 사실을 들켜도 살아남는 방법은 이것뿐이다.
최면을 걸어서 섹스하는 게 아니다.
최면을 걸고 유도해, 래피드 스스로 나와 섹스하고 싶어지게 만든다.
래피드의 남자친구가 된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 때 래피드가 나랑 사귀는 건 말이 안 된다.
나는 돈이 많은 것도 아니고 무언가 특출난 재주가 있지도 않다.
몸이 좋은 것도 아니고, 외모는 잘 생겼다기보다는 음침한 쪽에 더 가깝다.
하지만 내게는 최면어플이 있다.
최면이 점점 한계치에 온 것인지 래피드의 머리에서 빛이 나기 시작한다.
파직파직 하고 작은 소리가 나지만 카페의 음악 소리에 묻힌다.
밝은 빛은 내 몸으로 가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려진다.
나는 급하게 가장 중요한 최면을 걸었다.
“내…내게 손을 만져질 때 손을 보지처럼 느낀다.”
최면에 걸린 당사자에 따라서 반응이 조금씩 달라지는 건 이미 확인했다.
손을 만져지는 게 기분 좋다는 명령이나, 짜릿하다는 것만으로는 어떤 반응이 나올지 모른다.
내가 원하는 건 래피드가 나와 손을 잡거나 할 때 큰 쾌감을 느끼는 것이다.
이상한 명령이지만, 반드시 걸어야 하는 명령이기도 하다.
마지막 명령과 동시에 래피드의 머리에서 새어 나오던 빛이 터져 나오고, 래피드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아주 잠시동안 초점이 나가며 감각의 이상함을 느낀 것인지 래피드가 당황스러워하며 눈을 몇 번이고 깜빡인다.
나는 살짝 눈살을 찌푸리는 래피드에게 부드럽게 웃어 보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가만 보니까…맞죠? 오랜만이네요.”
“아, 안녕하세요…?”
최면에서 풀려난 래피드는 내게서 묘한 느낌을 받는 듯 약간 경계하는 눈빛으로 가만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래피드의 얼굴에 노이즈가 끼며 일그러진다.
래피드가 나를 조금씩 경계하는 건 이 노이즈 때문이다.
래피드가 얼굴에 걸어두고 있는 건 자신을 쉽게 인지하지 못하게 만드는 인지를 저해시키는 마법이다.
정확하게 무슨 마법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추측하고 있다.
나는 최면어플의 추적기능을 통해서 래피드의 위치를 확인하고 있어서 당사자가 래피드라는 걸 강제로 인지할 수 있었지만, 이런 마법을 쓰고 있는데도 자신을 알아본다는 건 래피드에게 무척이나 이상한 일로 느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상가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는 것으로 볼 때, 이 마법은 래피드를 알아보지 못하게 하는 마법이 아니라 래피드가 누구인지 헷갈리게 하는 마법 정도라고 생각된다.
사람들이 먼저 래피드에게 인사하던 걸 생각해보면 꽤 가능성이 큰 추측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해도, 내가 래피드를 알아보는 게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문제가 되지 않는 이유는 바로 내가 지금 손에 들고 있는 소설책과 래피드가 구매한 다른 로맨스 소설책에 공통되어 나오는 내용 때문이다.
운명의 상대라면 좋아하는 사람의 모습이 아무리 바뀌어도 순식간에 찾아낼 수 있다.
조금 바보 같기도 하지만, 래피드와 친해지겠다는 내 계획의 핵심이기도 하다.
“음…뭔가 되게 이상한 느낌이네요.”
“네?”
“그게, 어쩐지 래피드 씨…같다? 는 생각이 들어서, 가만히 보고 있으니까…정말 래피드 씨인 것 같아서.”
나는 일부러 래피드의 몸에서 느껴지는 묘한 느낌을 콕 집어 말하며, 눈살을 찌푸리며 래피드를 가만히 바라봤다.
잘 보이지 않는 것처럼, 좀 더 자세히 보려는 것처럼 가만히 래피드의 눈을 바라본다.
래피드가 보는 소설에는 눈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장면이 유독 많다.
그리고 여주인공이 첫 만남에 눈을 칭찬받는 장면도 아주 많다.
“그래도…이상하게 잘 안 보이지만 래피드 씨의 눈빛만큼은 잘 보여서, 래피드가 맞는 것 같아서 인사하고 싶었어요.”
“어? 누, 눈요…?”
“아, 혹시 이거 뭔가 마법 같은 건가요? 정체를 숨기는…? 죄송해요, 이름 부르면 조금 곤란할까요?”
나는 래피드에게 해를 끼칠 생각이 없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곧바로 사과부터 했다.
래피드는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눈빛을 보고 알아봤다는 말이 수줍게 다가왔는지 얼굴을 살짝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은 그렇긴 하지만…괜찮아요, 작게 불러주시면 다른 사람들 한테는 안 들리니까.”
“그러면…흠흠, 래피드 씨…그때 구해줘서 고마워요.
“그, 괜찮아요…저기 흠, 흠…몸은 괜찮으세요?”
“덕분에요, 고마워요.”
래피드는 계속해서 내가 어색한지 얼굴을 힐끔거리더니, 아주 잠시동안 내 다리 사이에 시선을 향했다.
발기해있는지 안 해있는지 무의식적으로 확인한 건가?
내가 발기하지 않았다는 걸 확인한 뒤에는 뭔가 신기해하면서도 안심한 듯 눈을 크게 뜨면서 한숨을 쉰다.
“원래 여기 자주 오세요?”
“네, 여기 맛있으니까요.”
“그렇죠? 케이크 엄청 맛있어요, 특히 과일 케이크가…아, 벌써 먹고 있었네요.”
꽤 어색하다.
마법소녀라는 정체를 숨기고 있다가 들켰다는 상황이 당황스러운지 눈을 계속해서 깜빡인다.
래피드와 나는 한번 구해주고, 구해진 사이라는 걸 제외하면 아무런 사이도 아니다.
아직은, 그렇다.
나는 조금이라도 래피드와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 래피드가 먹고 있는 케이크 얘기를 꺼냈다.
래피드가 먹고 있는 건 딸기 생크림 쇼트케이크다.
그 옆에는 딸기의 과육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딸기잼이 준비되어 있다.
가게 주인이 직접 만드는 것으로 유명한 딸기잼으로, 크림과 빵 사이에 들어가는 잼이기도 하다.
래피드는 달콤한 걸 무척 좋아하는지 딸기 케이크를 먹으면 딸기잼을, 살구 케이크를 먹으면 살구 시럽을 추가로 주문하는 것 같았다.
“여기 그러고 보니까…딸기를 가족분이 직접 만드시지 않나요?”
“어? 맞아요.”
“예전에 이 가게 알려준 사람이 얘기해줬어요. 살구 시럽도 직접 만드는데 살구도 직접 따고 케이크도…굉장히 정성이 많이 들어간 맛이 난다고.”
자신이 좋아하는 걸 알아봐 주는 사람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래피드는 내가 가게의 케이크를 칭찬해주자 괜히 자신이 기분 좋은지 입꼬리를 살살 올리며 케이크를 조금 잘라 먹었다.
나는 래피드의 앞에 가만히 서서 있다가, 의자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잠깐 앉아도 돼요? 저도 크레이프 케이크 먹을까 하고 있는데.”
“앗, 네!”
래피드는 곧바로 고개를 빠르게 끄덕이며 테이블 밑에서 의자를 발로 살짝 밀어 앉기 좋게 해줬다.
앉지 못하게 하면 못 들은 척하고 억지로라도 앉을까 했는데, 다행히 대화가 어느 정도 통했는지 쉽게 앉게 해줬다.
나는 일부러 소설책의 표지가 보이게끔 테이블 위에 놓으며 래피드에게 말을 걸었다.
“딸기잼에 딸기 케이크…저는 그런 생각 못 해봤네요…엄청 맛있겠다.”
“어? 네, 그쵸…? 맛있어요.”
“생각해보니 크림 사이에 끼워져있는 딸기잼은 좀 크리미해졌을 테고, 이렇게 먹는 게 훨씬 진하고 맛있겠네요.”
“어?! 마, 맞아요!”
“저는 오늘 딸기 녹차 크레이프 케이크 먹으러 온 건데, 저도 이렇게 먹어볼까 봐요.”
딸기잼이 크리미해진다는 얘기는 비전넷에서 후기를 보며 외워둔 내용이다.
이것만으로 래피드는 내가 케이크를 꽤 많이 먹어봤다고 생각했는지 경계심이 훨씬 녹아내린 얼굴을 했다.
내가 정말로 케이크를 좋아한다고 생각한 것인지 입에 포크를 물고 커다란 가슴을 살짝 테이블 위에 올린다.
굉장히 좋은 반응이다.
래피드는 편한 자리에서는 오래 앉아있고 싶어하는지 가슴을 테이블 위에 올린다.
빨리 떠나고 싶거나 불편하면 가슴을 테이블에서 떨어뜨린다.
대화할수록 나를 편해지고 내게 호감을 느낀다는 최면 덕분인지, 잠깐 사이에 태도가 많이 변해있다.
나는 조금 용기를 내서 래피드가 먹고 있는 딸기잼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혹시…이거 제 케이크 나오면 조금만 올려 먹어봐도 괜찮을까요? 괜찮으면 저도 하나 달라고 하려고….”
거절하지는 않을 것이다.
마진사에서, 그리고 이전의 인터뷰 내용에서 래피드는 다른 사람과 같이 식사하는 걸 좋아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혼자 먹는 것보다 같이 먹는 게 더 즐겁다면서, 애쉬에게 매번 같이 먹자고 졸라대거나 한다고…에스더가 네거티브가 되기 전에 있었던 인터뷰 내용 중에 있었다.
에스더가 진행하는 방송에서도, 래피드는 시간만 나면 먹을 걸 들고 찾아와서 같이 먹자고 한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다.
래피드는 내 얘기를 듣고 가만히 나와 딸기잼을 번갈아 보더니, 갑자기 딸기잼을 스푼으로 조금 퍼서 쇼트케이크에 뿌린 뒤 작게 잘라줬다.
손으로 집어 먹을 수 있는 정도의 크기의 케이크가 담긴 접시를 내밀며 티슈도 한 장 뽑아서 넘겨준다.
“…이것도 한입 드실래요?”
이건 뜻밖이지만, 생각보다 훨씬 좋은 반응이다.
나는 거절하지 않고 곧바로 손가락으로 케이크 조각을 집어 입 안에 넣었다.
그와 동시에 머릿속이 멍해지고, 케이크의 맛과 다른 무언가가 입안을 진하게 물들여온다.
래피드의 입이 닿은 포크가 닿은 케이크….
어질어질할 정도로 달콤한 맛이 난다.
래피드의 맛이 살짝 느껴진다….
나는 눈을 멍하니 뜨며 입을 살짝 벌리고 있다가 초점이 엇나간 시야 너머로 래피드와 눈을 마주쳤다.
곧바로 초점이 돌아오고, 잠시동안 어딘가로 날아가 있던 의식이 빠르게 돌아온다.
래피드는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에 공감해주기 바라는지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가만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으으으음….”
“어, 어떠세요?”
“엄청 맛있어요…딸기잼에 들어가는 설탕이 다른 곳하고 다른 것 같은 맛…장난 아니네요.”
“앗?! 그, 그거 아시겠어요?”
이건 전에 미행할 때 래피드가 다른 시럽과 잼을 먹으며 가게 주인아저씨에게 했던 말이다.
래피드는 설마 내가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는지 무척 놀라면서도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는 상대에게 진심으로 기뻐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딸기 씹히는 느낌도 좋고, 생크림도 부드럽고…그거 아세요? 여기 케이크 중에 살구 케이크에 살구 시럽 올려 먹는 것도 맛있어요.”
“어? 그거 제가 자주 먹는 건데….”
“정말요? 왠지 입맛이 비슷하네요. 맛있는 건 누구나 똑같이 느껴서 그런가.”
“그렇죠? 마, 맞아요!”
맛있는 건 누구나 똑같이 느낀다는 말도 래피드가 주인 아저씨에게 한 말이다.
전에 미행할 때 들은 말이기도 하다.
“여기는 근데 과일 케이크도 좋지만, 초콜릿이…그거 먹어봤어요? 헤이즐넛으로 초콜릿 시럽을 감싸고 있는 볼이 올려진 케이크인데, 일부러 먹기 좋게 조그마한 조각을 여러 개 합쳐서 한 조각으로 만들어서 파는 거.”
“그거 제가 만들자고 한 거에요!”
“오, 그거 맛있던데…안에 초콜릿은 그냥 시럽이 아니고 원래 있는 초콜릿을 비율을 바꿔서 녹여서 만든 거죠?”
“그거 알겠어요? 우와, 우와…어때요? 맛있어요?”
“초콜릿에 대한 애정이 느껴지는 듯한 맛이에요.”
“앗, 그렇죠?! 그쵸?”
아주 조금씩 바꿔서 말하고 있을 뿐, 전부 다 래피드가 하던 말들뿐이다.
생각보다 래피드의 반응이 뜨겁다.
자신이 좋아하는 걸 공감하고 공유하는 게 기쁜지, 점점 얼굴이 밝아지고 눈빛이 초롱초롱해진다.
“케이크 좋아하시나 봐요?”
“케이크도 좋아하고…책도 좋아해요. 이 주변에도 자주 오고요.”
케이크는 맛있긴 하지만 너무 달아서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는다.
이 가게는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는 단맛이라고 할 만한 적당한 단맛이어서 좋지만…케이크 자체를 좋아하지는 않는다.
책도 별로 안 좋아한다.
하지만 래피드가 좋아하는 로맨스 소설책은 읽어봤다.
이 주변에도 자주 안 온다.
위치를 추적해서 오게 된 것뿐이다.
전부 거짓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