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화 > 준비 (6)
컴퓨터에 사직서 파일을 잘 저장한 나는 한숨을 쉬면서 퇴근했다.
과장도 좀 예민하긴 하지만 이렇게까지 시비를 거는 사람은 아니었는데…그레이프와 관련된 일이면 전부 예민하다.
다른 직원들도 남녀 할 것 없이 예민하고, 부장도 예민하고, 다른 부서 사람들도 예민하다.
그런 엄청난 미인이니까 그럴 만도 하긴 하지.
잘 생각해보면 회사 전체가 그레이프의 팬클럽이다.
마법소녀 그레이프가 아닌, 팀장 그레이프의 팬클럽.
그레이프가 모든 직원들과 거리를 두고 있기는 하지만, 다들 어떻게든 친해지고 싶어서 어찌할 줄을 모르는 팬클럽이다.
그레이프에게 피해를 주면 다들 싫어하고, 그레이프와 먼저 친해지는 게 보이는 사람이 있으면 견제한다.
자신이 그레이프와 친해질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친해지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나도 래피드를 좋아하니까, 래피드의 팬이니까 그런 마음은 이해할 수 있다.
만약 누군가가 래피드랑 친해졌다거나, 래피드랑 같이 야근하거나, 래피드랑 공적인 대화를 하는 걸 봤다면 가만두지 않았겠지.
이해는 할 수 있지만, 그 질투의 당사자가 내가 되니 기분이 좀 나쁠 뿐이다.
그레이프랑 섹스 좀 한 걸 제외하면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팀장과 부하 직원 관계인데 왜 나를 괴롭히는 걸까.
그레이프가 오기 전에도 좀 이상한 회사긴 했지만, 예전에는 이 정도까지 이상하지는 않았다.
가만 생각해보니 확실히 그레이프가 온 뒤부터 조금 회사 분위기가 이상해졌다는 게 느껴진다.
“하아….”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온 뒤 래피드에게 최면을 걸 준비를 한다.
지금까지 최면을 걸어오면서 알아온 최면 조건과 가능한 것, 불가능한 것들을 정리해 최면을 걸며 말할 명령을 정리해둔다.
옷차림을 미리 정해두고, 면도도 하고, 털도 정리하고, 머리 모양을 어떻게 할지도 정해둔다.
래피드가 좋아하는 음식, 래피드가 움직이는 동선, 래피드가 좋아하는 음료수, 래피드의 입맛, 래피드가 구매한 로맨스 소설들에 공통적으로 나오는 장면, 래피드가 멈춰서 길게 머무르는 곳.
래피드가 싫어하는 것, 래피드가 싫어하는 괴수, 래피드의 특기, 래피드의 취미, 래피드가 피하는 것.
첫 번째 인터뷰 때 한 발언, 바이러스성 괴수가 퍼져 사람들이 정신적인 타격을 입어갈 때 마법으로 치유해주며 했던 말들, 래피드의 목격담, 래피드의 신체 사이즈, 래피드의 키, 래피드의 몸무게, 래피드의 얼굴 피부 톤….
래피드에 대해 생각하는 것만으로 일상 속의 스트레스가 완전히 사라진다.
래피드와 섹스하기 위해, 친해질 준비를 하나하나 진행할수록 내가 해야 할 것을 확실히 하고 있다는 충실감이 차오르며, 기대감과 만족감에 젖어 행복한 기분이 된다.
점점 머릿속이 몽롱해지며 래피드의 모습이 떠오른다.
손톱의 색, 손톱 끝의 정리상태, 몸매, 팔의 굵기, 머리카락의 형태, 바람에 휘날릴 때 맡아지는 래피드 특유의 달콤하고 진한 향기, 긴 속눈썹, 상냥해 보이는 눈매, 허리에서 엉덩이로 떨어지는 음란한 곡선과 부드러워 보이는 살결, 피부 하나하나부터 입술의 색, 치열, 혀의 길이까지….
신기할 정도로, 이상할 정도로 선명하다.
다른 여자를, 마법소녀를 떠올릴 때는 이 정도까지 선명하게 떠올려지지 않는다.
오직 래피드만, 특히 래피드만 이렇다.
사랑을 뛰어넘은 원초적인 끌림, 본능적으로 래피드를 원하고 있다는 감각이 점차 진하게 느껴진다.
래피드와 섹스하기 위해서, 조금 더 가까이에서 친해지기 위해 다가갈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 이렇다.
마약 같은 행복감, 충실감이 뇌를 점령한다.
“음….”
피곤해서 그런 건지, 조금 머리가 멍하다.
그레이프가 이틀 정도 회사에 안 오는 사이 갈굼 당한 것만으로 이렇게 피곤하다니….
주말이 끝난 후부터는 제대로 회사에 출근해줬으면 좋겠다.
래피드를 만날 준비를 마친 나는 준비물을 전부 가방에 잘 정리해 두고, 계획을 다시 한 번 되짚어 보면서 래피드의 머리카락을 하나 꺼내 향기를 만끽했다.
비전폰의 마력감지 센서를 가져다 대 보니 아직도 마력이 꽤 남아있다.
전투할 때 떨어진 것과 빗질을 해서 채취한 건 품질 자체가 다른 걸까?
남아있는 마력이 높을 때만 맡을 수 있는 특유의 향기가 머리를 찌른다.
래피드와 친해지고 싶다.
친해지면 섹스할 수 있다.
나는 할 수 있다.
래피드와 섹스한다.
상상만 해도 너무 기분 좋다.
머리가 이상해 질 것 같다.
쌓여있던 스트레스가 한 번에 확 날아간다.
아니, 날아간다기보다는…래피드를 향한 욕망이 내 생각 전부를 덮어씌우는 것에 가깝다.
나는 래피드의 머리카락을 넣어둔 비닐 팩을 다시 잘 밀봉한 뒤 그레이프가 선물해준 갈색 양 인형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았다.
…아쉽지만 슬슬 냄새가 빠져나가는 게 느껴진다.
머리카락과는 다르게 이건 래피드의 마력이 묻어있거나 하지 않아서 그런지, 향이 오래가질 않는다.
머리카락처럼 진하지 않고 좀 더 부드럽고 푹신푹신한 향이 나서 좋았는데, 조금 아쉽다.
래피드에게 줘서 다시 끌어안고 놔 달라고 하면 향을 충전할 수 있을 것 같지만…이 커다란 걸 들고 다니기는 조금 망설여진다.
가방에 넣어도 가방이 꽉 차버릴 테고….
양 인형을 다시 밀봉해 정리해 둔 나는 침대에 누워 그레이프의 영상을 보며 잠들기 전까지 계속해서 자위했다.
사정한 뒤 잠깐 쉬고, 또 자위하고 쉬고, 또 자위하기를 반복해 세 번 정도 사정한다.
아쉽게도 새 영상이 올라와 있지는 않았지만, 그레이프가 자위하는 것 자체가 평소 모습이 떠올라 무척 자극적이어서 충분히 즐기며 자위할 수 있었다.
세 번 정도 사정하자 더는 한계인지 흥분해도 자지가 지쳐 제대로 발기하지를 않는다.
래피드는 자지가 발기한 걸 감지할 수 있고, 자신을 보고 발기한 사람을 경계한다.
이 정도면 래피드를 만날 준비는 충분한 것 같다고 생각한 나는 주변을 대충 정리한 뒤 이불을 덮어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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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레스투성이였던 회사 생활과 다르게, 래피드를 만나러 가는 건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는 것마저도 너무 즐거웠다.
최면어플을 켜서 위치를 확인해보니 래피드는 오늘도 역시나 4번 구역에 도착해 오늘도 케이크 가게에서 케이크를 즐기는 중이었다.
애쉬는 오늘도 A 시의 바깥 구역에서 괴수들을 사냥하고 있다.
오늘도 안전하게, 래피드를 만나 최면을 걸 수 있는 날이다.
래피드에 대한 분석도, 최면어플에 대한 이해도 일단 이 정도면 충분하다.
마진사와 최면어플을 사용하며 조금 더 알아가게 된 정보와 내가 원래 알고 있던 것들을 조합해 래피드의 성격을 최대한 파악했고, 어떤 걸 좋아할지…어떤 상황이 좋을지도 계획해뒀다.
래피드의 취향과 어떤 상황을 만들지에 대한 건 다른 것보다도 래피드가 읽는 로맨스 소설들이 큰 도움이 되었다.
지하철에서 내려 케이크 가게, 케이크당 앞에 도착하자 창문 너머로 래피드가 케이크를 먹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나는 옷매무시를 다시 한 번 확인해 본 뒤 가방에서 과일 향기가 나는 향수를 꺼내 몸에 아주 약하게 뿌리고 로맨스 소설책 한 권을 꺼내 손에 들었다.
마법소녀는 감각이 예민하니, 향수 냄새가 너무 강하면 싫어할 수도 있다.
내가 손에 들고 있는 소설책의 제목은 ‘절벽 위의 꽃’.
평범한 남자가 다른 사람 모두에게 사랑받고 존중받는 가수를 만나 이루어지는 일을 다룬 연애 소설이다.
남주인공은 비실거리지만 않는 수준의 평범한 몸에 그리 특출난 매력도 없어 보이지만 오직 하나, 여주인공을 사랑하는 마음만큼은 누구보다 뛰어난 남자다.
옷차림은 깔끔한 정장 차림, 머리 모양은 지저분해 보이지만 깔끔하게 정리하려고 노력해 보이는 머리 모양, 몸에서는 아주 약간이지만 달콤한 냄새가 난다는 묘사가 있다.
“저 딸기 쇼트케이크 하나만 더 먹어도 돼요?”
“응~물론이지, 이번에 들어온 딸기가 조금 맛있지?”
“네!”
문을 열고 가게 안으로 들어간 나는 래피드가 가게 주인아저씨와 대화하는 모습을 힐끔거리며 천천히 카운터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래피드와 한 공간에 자리하게 된 것만으로 머릿속이 멍해지고 숨이 막혀온다.
진득할 정도로 달콤한 향기, 매일같이 머리카락을 통해 맡아오는 래피드의 향기가 가게 안의 케이크 향기를 전부 냄새로 격하시켜 버릴 정도로 진득하게 느껴진다.
“스으으읍…아, 블루베리 타르트 주세요.”
나는 래피드의 향기를 맡으며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카운터 앞에서 주인아저씨에게 케이크를 주문했다.
한쪽 발이 의족인 아저씨는 캉, 캉 하고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를 내며 나를 가만히 보고 있더니 곤란하다는 듯 대답했다.
“이런…블루베리 타르트는 지금 다 나갔는데.”
“아…혹시 아직 안 됐나요?”
“응? 못 보던 분이신 것…자주 오시던 손님이신가…? 조금 있으면 되긴 합니다.”
블루베리 타르트가 다 나가 있는 건 이미 알고 있다.
카운터 앞의 케이크가 진열되어 있는 냉장고 안에 매진되었다고 적혀있는 걸 보고 일부러 시킨 거다.
비전넷을 통해 이미 이 가게에서 새 케이크를 만들어 진열하는 시간을 알아봐 뒀다.
그 중에서도 블루베리 타르트는 이 가게의 인기 메뉴로, 매번 추가로 만들어도 부족할 정도로 잘 나가는 케이크다.
이미 새로 만들 준비는 해뒀을테고, 원하는 손님이 있다면 예정된 시간보다도 조금 더 빨리 만들러 갈만한 케이크이기도 하다.
“딸기 녹차 크레이프 케이크는요?”
“아…그것도 다 나갔는데, 그건 조금만 시간 주면 바로 만들 수는 있기는 합니다.”
이것도 이미 매진되어 있는 걸 확인해 두고 주문했다.
크레이프 케이크는 얇은 크레이프 사이사이에 생크림을 넣으며 쌓아올려 만든다.
크레이프만 미리 만들어 뒀다면, 언제든지 바로바로 만들 수 있는 종류의 케이크다.
“그러면 크레이프 케이크랑 블루베리 타르트 둘 다 주문할 수 있을까요? 블루베리 타르트는 중간 거로, 늦으면 기다리고 크레이프 케이크는 조각 케이크로 바로 먹을까 하는데.”
“아, 잠시만 기다리세요…크레이크 케이크 먼저 내 드리겠습니다.”
비전넷에서 미리 가게 후기들을 보고 파악해둔 정보를 통해 시간은 조금 걸리지만 바로 만들 수 있는 케이크와 좀 더 걸리지만 가게 주인이 자신 있어 하는 타르트를 주문했다.
이걸로 주인아저씨는 한동안 카운터 주변을 벗어나 주방 안에서 시간을 보내게 된다.
가게 안에는 아직 여러 사람들이 있었지만…래피드의 자리는 일부러 방해받지 않길 원하는 것처럼 따로 떨어져 있었다.
가게 후기를 보니 주인아저씨가 특별한 사람을 위한 자리라고 하며, 다른 사람에게는 내주지 않는 자리라고 한다.
다른 사람들은 가족을 위한 자리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저곳은 래피드 전용석이다.
“앗?”
가까이 다가가자 래피드가 나를 알아차린 듯 눈을 크게 뜬다.
미행할 때는 일부러 알아보지 못하게 옷을 입고 나왔지만, 오늘은 내가 누군지 잘 알아볼 수 있도록 얼굴을 조금도 가리지 않고 있다.
래피드는 자기가 구조해 준 사람과 대화하는 걸 좋아한다.
그런 목격담이, 래피드와 대화한 후기가 비전넷에도 마진사에도 많이 올라와 있다.
래피드는 케이크를 물고 있다가 나를 발견하고 반가운 듯, 그러면서도 아는 척해도 될지 망설이며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반가워하면서도 자신의 앞에 다가온 나를 조금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다.
나는 일부러 래피드에게 잘 보이도록 제목이 잘 드러나게 쥐고 있는 소설책을 살살 흔들었다.
래피드의 시선이 천천히 밑으로 향하다가 내 손에 들려있는, 래피드가 좋아하는 소설책의 제목을 보고 시선이 고정되는 게 보인다.
“안녕하세요?”
곧바로 나는 소설책을 뒤집어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게 켜두고 있던 최면어플의 화면을 래피드에게 보여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