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화 > 준비 (5)
“앵거 씨, 오늘은 원래 하던 업무좀 하죠?”
“예?”
“예는 또 무슨 예야? 앵거 씨 원래 하던 거 있잖아? 이런 단순 업무는 내가 하고…원래 하던 개발 해야죠?”
조용히 업무를 하던 나는 뜬금없이 다가온 과장이 하는 말에 이어폰을 빼고 가만히 올려다봤다.
내가 원래 하던 개발이라면, 지금은 과장이 전부 맡아서 하고 있는 앱 개발업무다.
지금은 그레이프를 통해 작업영역을 완전히 분할해버려 나는 손대지 않고 있는 쪽이기도 하다.
“원래 하던 거요?”
“기억 안 나세요?”
“아뇨, 뭔지는 알지만, 팀장님이 이게 더 효율이 높아 보인다고…나누기로 했잖아요?”
“아, 효율은 효율이고…어차피 팀장님 오늘 안 계셔서 앵거 씨가 자료 만들어도 체크해주지도 못하잖아요? 근데 자료 만들어서 뭐해요? 앵거 씨 말대로 효율 생각하면 이렇게 해야지?”
“하지만 얼마 전에 휴가 쓰셨을 때는….”
“그때 겪어 보고 아니다 싶으니까 이렇게 하자는 거죠? 왜 자꾸 하기 싫어하세요? 개발하기 싫어요?”
“…하겠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다.
지금 내가 만드는 건 그레이프가 확인한 후 팀장이 앱에 적용하기 위한 전자화되고 일차적인 정리가 된 자료일 뿐이다.
그레이프가 내용 체크를 해줄 수 없는 지금 이걸 손에 잡고 있어 봤자이긴 하다.
나는 작업하고 있던 창을 내리고 예전에 하던 업무대로 코딩을 하기 시작했다.
만든 건 데이터베이스에 올리고, 다시 만들고…짜 맞춰 놓고 건드려보기를 반복한다.
그렇게 조금 시간이 지나니, 과장이 다시 내 자리로 와 이상한 말을 꺼냈다.
“앵거 씨 지루해요?”
“…네?”
“개발 지루하냐고요, 코드 왜 이래? 요즘 안 하니까 까먹었어요?”
나는 뭐가 문제인가 싶어 내가 짠 코드를 체크했다.
그러자 과장은 어디에 어떤 줄인 지 제대로 보여주지도 않고 팔짱을 낀 채 턱짓으로 가리키며 내가 짠 코드를 지적했다.
“저거랑 저거, 저거…이게 어려워요? 디테일을 조금만 더 신경 쓰면 안 돼요?”
“어디 말씀이시죠?”
“딱 말하면 몰라요? 아…혹시 앵거 씨 아직도 그 디버깅 프로그램 써요?”
“네, 그게 빠르니까….”
“내가 팀장님 오시기 전부터 얘기했죠? 디버깅 프로그램 좀 쓰지 말라고, 그런 거 잘할 필요 없다니까요? 나처럼 스크립트를 열심히 분석해야 개발 실력이 늘지….”
“아, 예.”
“그런 거에 의존하니까 말해도 팍팍 못 알아보고 자기가 쓴 스크립트에서 뭐가 잘못된 것인지도 바로 모르고….”
“아, 예….”
“똑바로 해주세요, 이상한 변칙 말고 기본 좀 더 공부하고…앵거 씨도 개발자로서 성장을 좀 해야죠?”
과장은 한동안 나를 코딩으로 갈구고 난 뒤 자신의 뛰어남을 자랑하고 만족한 듯 웃는 얼굴로 돌아섰다.
개발자로서 성장이라…오랜만에 듣는다.
그레이프가 팀장으로 오기 전에는 자주 들었던 얘기다.
“앵거 씨, 아직도 못했어요?”
“다 했습니다.”
“그럼 올려놔야지 왜 안 올려놨죠?”
“올려놨습니다.”
“그러면 채팅을 통해서 보고해 주셔야죠?”
“했습니다.”
“못 봤으면 다시 한 번 보내야지…많이 당당해지셨네요? 팀장님이 매번 감싸주니까 일 편하게 하고 좋았나 봐요?”
과장은 계속해서 나를 갈궈대며 딱히 이유가 없어 보이는 지적을 계속했다.
단순한 지적이 아니다.
주변 직원들을 의식하며 다른 직원들의 앞에서 면박을 주며 내 기를 꺾어놓으려 하고 있다.
나를 갈구고 있다.
대체 왜 이러는지 이유를 모르겠지만, 갈군다는 것부터 이미 목적은 나와 있다.
내가 과장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아 나를 길들이려 하고 있다.
왜 이제 와서 이러나 싶기도 하지만, 갈굼에는 시기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다.
방위군 훈련병 시절에 익히 배운 사실이다.
과장이 원하는 게 뭔지 모르겠지만, 내가 원하는 대로 행동할 때까지 갈굼을 멈출 생각은 없어 보인다.
“수고하셨습니다.”
“아, 앵거 씨 퇴근해도 돼요?”
“네?”
“팀장님도 말씀하셨었잖아요? 자기 할 일 다 하고 나서 퇴근하라고…그래서 전에 야근했었잖아요? 앵거 씨 오늘 자기 일 다 했어요?”
퇴근 시간이 되고 퇴근하려 하자 과장이 갑자기 직원들 사이에서 나를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다른 직원들은 모두 과장의 얘기를 듣고 키득키득 하고 웃으며 나를 한심하다는 듯 쳐다봤다.
“와…진짜 과장님 말대로 팀장님이 쉬운 일만 줘서 실력 안 좋아진 거 아니에요?”
“신입도 아닌데…어떡해, 일 좀 익숙해 져야 할 것 같아요.”
“팀장님이 요즘 일 빨리하자고 했는데…앵거 씨도 열심히 해야죠? 팀장님한테 민폐 안 끼치려면?”
“뭐야? 앵거! 또 뭐 잘못했어? 어!”
아…이거 오랜만이다.
그레이프가 오기 전에 당장 퇴사할까 하고 고민하던 그때의 회사 분위기다.
직원들이 그때보다도 왠지 더 과장 편을 들고 있기도 하고, 과장도 더 시비를 많이 걸고 있기는 하지만, 크게 다르지 않다.
나는 과장을 가만히 보며 대답했다.
“다 했습니다.”
“진짜야? 내가 믿어도 돼?”
안 믿으면 뭘 어찌하겠다고 저러는 거지?
나는 맘대로 하라는 의미로 어깨를 으쓱하고 그냥 퇴근해버렸다.
“아~진짜 우리 팀장님 어떡해, 피곤하셔서 쉬실 만 하다.”
“그러게, 진짜 맛있는 거라도 사드려야겠어.”
“팀장님 예쁜데 피곤해서 피부 상하는 거 아냐? 걱정이야.”
엘리베이터에 탑승하니 직원들이 계속해서 나를 힐끔거리며 그레이프 얘기를 한다.
대체 왜 나를 보고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묘하게 눈치를 주는 게 느껴진다.
나 때문에 일이 많아지고 피곤해져서 그레이프가 휴가를 냈다는 식으로 생각하고 있다.
어이가 없는 얘기다.
“고생하셨습니다~”
“내일은 팀장님 오시겠지~? 내일 같이 밥이라도 먹으러 갈까?”
“점심에 맛있는 거 사드려야지~”
직원들은 다들 뿔뿔이 흩어지며 알아서 퇴근했고, 나는 뒤에 남아 천천히 지하철 역으로 걸어가며 생각에 잠겼다.
이 느낌 굉장히 오랜만이다.
어쩔 수 없이 회사에 다니기는 하지만, 당장 퇴사하고 싶어지는 이 기분….
그레이프가 팀장으로 온 뒤로는 회사 상황이 점점 좋아지며 느끼지 못한 기분이다.
퇴사하고 싶다.
A 시의 직장은 직종의 구분 없이 전부 레드오션이다.
편의점 아르바이트도 한번 자리가 났다 하면 1/100의 경쟁률은 가볍게 넘는다.
다른 지역에 있는 회사라면 얼마든지 이직할 수 있지만, A 시에 계속해서 버티고 싶다면 되도록 이직 시도를 하지 않는 게 좋다.
A 시는 상위권 마법소녀 다수가 밀집해있는 가장 안전한 도시였으니 당연한 일이다.
회사도 사람들이 A 시에 거주하고 싶어 직장을 구하는 걸 알고 있어 고급 인력이라 해도 나가려면 나가라, 올 사람 많다 하는 식으로 대하는 일이 잦다.
정말 대체할 사람이 없는 업무라면 그렇지도 않지만, 나는 언제든지 대체가 가능한 수준의 개발자 인력이다.
A 시에 거주하기 위해 지금까지는 막대해져도 그냥 참고 지냈고, 그레이프가 온 뒤로는 그래도 그럭저럭 다닐만 해져서 편하게 다니고 있었지만…오늘 오랜만에 겪어 보니 퇴사 생각이 강해진다.
나는 이것 때문에 늘 퇴사하고 싶어 하면서도, 래피드를 보고 싶어서 퇴사하지 않고 참고 다니고 있었다.
오랜만에 정말 격렬히 퇴사하고 싶어졌다.
사실 이제는 퇴사를 참을 필요가 없다.
어차피 퇴사하게 되어도 래피드의 머리카락을 빗어서 팔면 되니까.
퇴사하게 되면 조금 걱정되는 건 그레이프와의 관계다.
친해지긴 했지만, 내가 퇴사해도 그레이프가 나랑 만날 일이 있을까?
앞으로도 그레이프하고는 계속해서 만나고 싶다.
묘한 관계가 되긴 했지만, 결국 그레이프와 서로 대화하거나 가까워지고 있는 관계의 핵심은 내가 그레이프의 비밀을 지켜주고 있다는 것이다.
퇴사한 순간 어차피 회사 사람들과 접점이 거의 없어지게 되니, 그레이프는 더 이상 나와 이런 관계를 유지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지도 모른다.
평화로운 회사 생활을 유지하려고 했던 건 결국 최면어플에 익숙해지는 동안의 시간을 벌고, 그레이프와 좀 더 단단한 관계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전자의 목적은 이미 거의 달성했다.
그레이프와의 관계가 퇴사해도 이어질 수 있을지는 아직 확신이 들지 않는다.
그레이프와 친해지고 팀장으로서 내게 잘 대해주게 하는 것보다 중요한 건 마법소녀로서 나를 지켜주고 보호해주게 만드는 것이다.
지금 그레이프가 나를 보호해 줄 만큼 친밀하거나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 관계인지를 물어본다면, 확답을 내기는 어려웠다.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하루 동안 그레이프가 없는 회사에 다니고 과장에게 갈굼당하며 오랜만에 강렬한 퇴사 욕구를 느낀 나는 앞으로 어찌하면 좋을지에 대해 고민하며 집에 도착했다.
이 한 주 동안 래피드의 동선이나 취미, 좋아하는 소설 내용에 대해서는 시간이 날 때마다 공부해 뒀다.
취향도 어느 정도 파악했고, 최면어플도 익숙해졌다.
슬슬 래피드에게 최면을 걸어 봐도 좋지 않을까?
주말에는 래피드에게 최면을 걸러 가야겠다.
어차피 퇴사를 하는 건 확정이고, 언제 퇴사하는 게 좋을까.
그레이프와 좀 더 친밀한 관계가 되면 좋을 것 같으니, 조금만 더 다녀 봐야겠다.
열심히는 일하지 말고 그레이프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 정도만…적당히 일하고 적당히 퇴근하며 그레이프와의 관계를 내가 원하는 대로 구성하는 것에 주력한다.
그레이프랑 어느 정도 관계 정리가 되고 나면 곧바로 퇴사해버려야겠다.
당분간은 퇴사 생각 없이 다녀야 할 것 같지만, 그래도 내일부터는 다시 그레이프가 출근할 테니 오늘처럼 기분 나쁜 회사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래피드가 좋아하는 로맨스 소설을 읽으며 어떤 최면을 걸지 머릿속으로 정리하다가 잠이 들었다.
다음날 나는 전날 일하면서 느낀 불쾌함을 출근길에 로제와 섹스하면서 털어버리고 기분 좋게 회사에 도착했다.
오늘은 그레이프가 와 있겠지 하고 사무실에 도착하자, 조금 신경에 거슬리는 시선이 느껴진다.
그레이프가 앉아있어야 할 팀장 석을 보니, 오늘도 텅 비어있었다.
휴가 사유는 피로가 쌓여서 하루 더 쉰다고 한다.
어제 슬라임들을 잔뜩 사냥하고 힘들었을 테니, 그럴 만도 하다.
마법소녀로서의 입장을 알고 있는 내게는 조금 아쉬워도 납득이 갈 만한 휴가였다.
“팀장님 오늘도 쉰다던데?”
“와…진짜 병난 거 아냐?”
“대단하다 대단해 정말.”
하지만 대체 뭐가 잘못된 것인지 직원들이 보기에는 나 때문에 그레이프가 스트레스를 받아 이틀씩이나 회사를 쉬는 게 되어있었다.
평소에 나를 그냥 좋지도 나쁘지도 않게 보던 직원도 한심하다는 눈초리로 바라보고, 별로 사이가 좋지 않았던 여직원들은 킥킥 하고 비웃으며 내 자리를 스쳐 지나간다.
왜 이렇게 된 거지?
뭔가 원인이 있을 것 같은데, 원인을 잘 모르겠다.
그레이프가 잠깐 회사에 안 나온 것만으로 이렇게 되는 게 말이 되나?
직원들의 눈초리가 따갑다.
그 중에서도 과장의 눈빛이 굉장히 묘하다.
한심하게 보는 다른 직원들과 가지고 있는 감정이 다르다는 게 확실하게 느껴진다.
나를 비웃고 있다.
혹시 과장이 뒤에서 내게 안 좋은 소문을 내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럴 이유가 대체 어디 있나 싶기는 하지만, 내가 모르는 이유가 존재할지도 모른다.
과장은 내가 그레이프와 가끔 대화하게 된 뒤부터 나를 안 좋은 시선으로 보고 있기도 하다.
정말로 그레이프랑 조금 대화하는 거로 지금 이러는 건가?
찌질하게….
"진짜 눈치 없다…."
조용히 앉아서 업무를 하고 있었더니, 옆자리에서 신경 쓰이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눈만 움직여 힐끔거리니, 내 쪽을 가만히 보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격렬하게 퇴사하고 싶어졌다.
일단 사직서부터 전부 써 둬야겠다.